한 번의 방문이 그 한 번으로 끝나고 기억 저편으로 묻히는 곳이 있는가 하면, 다음에 또 오고싶다는 애정이 저절로 생기는 곳이 있다.
가을이면 습관적으로 찾게 되는 단골 완상지가청도운문사이다. 마치 안식처란 의미의 퀘렌시아 같은 곳이다. 힘들고 지쳤을 때 기운을 회복시켜주는 곳이다. 한두 번 좋아서 가다보니 어느새 매년 가자는 약속이 되었고 벌써 여섯 해가 되었다. 때론 신록의 봄에 가기도 하고 겨울 초입에 가기도 했으나 아무래도 운문사는450년 된은행나무가 있어서인지 가을이 제격이다. 일 년 중 가을에 그것도 겨우 하루 이틀 개방한다는 신비로움까지 더하니 꼭 보러 가게 된다. 물론 팬데믹 코로나로 몇년을 개방하지 않고 있으나 어떠랴, 그래도 좋은 곳이다.
석남사로 가는 왼편길과 운문사로 가는 오른편의 갈라진 길을 기점으로 운문로가 시작되고 이때부터 이미 단풍 완상은 시작된다.구불거리는 산길 양갈래로 단풍나무들이 반기고 돌아돌아 만나는 산들의 형형색색 단풍옷 입은 풍경은 절로 감탄이라 때론 갓길에 차를 세우고 감상하기도 한다. 올해는 늦더위가 기승했고 갑작스런 서리에 한파가 닥쳐서인지 나뭇잎들이 그대로 말라 다소 건강하지 못하고 본연의 이쁜 색을 드러내지 못한 듯하여 못내 아쉬웠다. (작년 가을 기록한 방문지이나 올해 역시 늦더위가 기승했음에 또 어떤 가을로 물들지 다녀와야겠다)
사찰 매표입구는 먹거리 거리가 조성돼 있어 식당뿐 아니라 각종 전통식재료 파는 난전들이 줄 서 있다. 우린 첫방문시 <소풍>이라는 이름에 이끌려 들어간 카페와 인연이 되어 그곳 주차장을 단골로 이용한다. 남편이 잘 나가는 치과 의사였으나 도시 삶과 사람에 치여 훌훌 털고 같이 내려왔다는, 이젠 낯익어 이웃같은 카페 여사장님도, 늘 홍시 두 상자씩 사가는 좌판의 사람 좋은 미소 지닌 아주머니도, 메기매운탕집 목소리 큰 여사장님도 정겹고 반갑다.
입장료 2000원 지불하고 들어서면 바로 시원하게 쭉쭉 뻗은 솔밭길이 이어진다.천 년을 제자리 지키고 선 소나무들을 보며 찰라 같은 우리네 삶이 서글퍼진다. 붙잡고 싶은 순간들을 기억하며 솔길을 부지런히 걷는다.
간만에 걷는 흙길도, 잘 단장된 낮은 울타리 안 아기자기한 들풀들도, 고개 들어 하늘을 보면 온통 하늘을 다 가린 기다란 소나무의 푸르름과 청정한 바람이 참 싱그럽다. 좋다.
이십 여분 걷다보면, 드디어 절 경내로 들어가는 입구가 나오고, 계곡 주위 은행나무와 어긋져 쌓은 돌담과 주위 단풍 나무가 멋스럽다. 사람의 눈은 다 비슷한지라 포토존이 되어 제법 많은 무리들이 사진으로 추억을 담느라 바쁘다.찍는 순간의 사람들의 표정이 젤 생생하다. 찍혀진 사진을 얼마나 되볼지는 모르나 사진을 찍을 때의 설렘과 긴장을 좋아한다.
1950년대 비구니 도량으로 혁신된 사찰답게 항상 단아하고 정숙함을 전하는 곳이다. 주위 산세와 멋드려지게 어울려서 사찰의 곡선과 산의 능선이 하나로 잘 이어지는 그야말로 명당에 위치한 천오백년 역사의 고찰이다
작년 방문시 천막으로 가려 치료 중이던 처진 소나무의 멋드러진 긴 팔들도 아직 건장함을 보이고 있었고, 색도 제법 제 색을 유지하고 있어 건강해 보여 다행이었다. 가파른 등산로는 없으나-그리하여 밋밋하다는 이도 있다^^- 생태보존지역 답게 자연과 어우러지는 산책로가 잘 조성되어 종교적 목적이 아닌 옛역사의 숨결을 느끼며 안정감을 느끼고자하는, 등산은 꺼리는 나에겐 안성맞춤이다.
산그늘이 일찍 내려오는 가을이라 다섯 시가 넘어가면 더 운치있는 분위기를 제공한다. 해넘이가 쓸쓸하기보다는 따스하다 느껴지는 곳이니, 벤치에 앉아 고즈넉한 분위기에 젖어보는 것도 행복하리라. 서서히 산그늘을 품어가는 절마당이 그리 넉넉할 수 없다.
저녁을 먹고 나서면 주위가 그냥 먹물 마냥 검다. 시골임을 실감한다. 북적대던 낮과 달리 가로등도 희미한 주변은 어둡고 바람은 차다. 가게들도 다 일찍 문을 닫고 산은 어둠 속에 숨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