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청주라는 작은 도시에서 태어나 대학에 진학하기 전까지 쭉 같은 곳에 살았다. 어릴 때 가끔씩 새롭게 전학 오는 친구들에게 난 항상 먼저 다가가 인사하고 친해지려고 했었는데, 그 아이들을 보면 느끼던 작은 호기심, ‘아, 전학이라는 걸 가는 건 어떤 기분일까?’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우리 가족은 지금도 모두 청주나 그 근방에 살고 있고, 아직도 나에게 돌아갈 고향이라는 넉넉한 마음을 남겨두어 주고 있다는 점에서 감사하고 있다. 나는 스무 살에 상경해 어느덧 17년째 서울살이를 하고 있으니 이젠 서울 사람이란 말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어릴 때부터 책 읽기를 좋아하고 남 앞에 나서 발표하기를 좋아했던 나를 임신하고 계실 때 임산부 육아교실에서 노래 부르는 사람에게 선물을 준다는 말에 서슴없이 나가서 노래 한 곡조를 뽑아내셨던 우리 엄마 덕택인지 나는 남 앞에 나서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 아이였다. 학교에 다니던 때부터 열심히 손들고 발표하는 것에 주저함이 없었던 기억이 난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발표를 하기 위해 선생님 말씀을 주의 깊게 듣고, 선생님이 물어보는 게 뭔지 잘 캐치했다가 번쩍 손을 들다 보니 자연스레 나는 공부 열심히 하는 아이, 모범생이 되었다.
지금에서야 사람은 각기 다르고 각자의 재주와 고유의 장점이 있다는 걸 알고 이해하는 성인이 되었지만, 그때 당시만 해도 선생님이 책 읽기를 시키거나 발표를 시킬 때 두려워하고 떨려서 어쩔 줄 몰라하던 친구들을 보면 왜 그럴까 이해를 하지 못하기도 했던 기억이 난다.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사실을 고백하자면 입학했을 땐 국민학교였다.) 그런 연유로 반장이 되고, 자연스레 선생님들의 관심과 애정을 받게 된 나는 엇나가지 않고 쭉 모범생으로의 길을 걷게 된다. 사람에게 찍힌 낙인이란 건 이렇게 무서운 일이다. 학창 시절 중간에 어떤 계기를 통해 노선을 바꾸는 아이들도 더러 있지만 보통 아이들은 처음 받은 관심과 애정도에 따라 계속 잘하고 싶고 열심히 하고 싶은 동기부여를 받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초등학교 6학년 내내 반장을 하다 보니 맞벌이를 하느라 학교에 자주 오는 게 쉽지 않으셨던 엄마는 딸이 반장인 게 뿌듯하고 자랑스럽기도 한 한편, 학교에 내야 하는 학부모 회비나 시간들이 버거우셨었다고 나중에서야 고백하셨다.
나는 체육과 미술을 빼곤 곧잘 했다. 앞의 두 과목엔 정말 정말 소질이 없었는데, 그럴싸하게 그렸던 밑그림은 항상 채색 하하면서 망쳐놓았고, 내 긴 팔다리를 제어하지 못해 아무리 연습해도 체육 실기시험은 C를 도맡아 받아왔다. 항상 큰 키였는데 하도 달리기가 느려 남들 두 걸음 걸을 때 한 걸음만 걸으면 되는데 왜 뛰질 못하냐는 소리도 들었다.
여자아이들이 상대적으로 약한 수학과 과학 과목도 잘했었던지라, 자연스레 고등학교 때 이과를 지망하게 되었고 그게 나의 길이라 생각했다. 그땐 내가 하고 싶은 것보단 내가 잘하는 것에 초점을 맞췄던 시절이랄까. 밥벌이 역시 하고 싶은 일 보단 내가 잘하는 일로 구하는 게 마땅하다는 무언의 공감대가 있었던 듯하다. 또래의 부모님들은 안정적인 직업을 선호하셨기에 우리 부모님도 주에서 교원대나 청주교대에 진학하여 선생님이 되는 길이나, 약대에 가서 안정적인 직업을 가지면 어떨지 넌지시 말씀하셨던 것 같다. 나도 자연스레 서울에 있는 약학대학에 진학해서 약사면허를 따고 제약회사의 연구원으로 근무하다가 나이가 좀 들면 작은 약국을 개업해서 전문직으로 안정적인 삶을 사는 꿈을 그렸더랬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연구실 안에서 실험을 하는 내 모습을 그려보니 너무나 답답한 나머지 실험실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어 하는 내 모습을 떠올리게 됐다. 사람을 만나고 대화하는 걸 좋아하는 내 성격에, 끊임없이 반복된 실험을 통해 데이터를 수집하고 연구하는 게 정말 내 적성일까? 이런 생각이 든 거다. 이런 생각이 조금 더 늦게 들었거나 들지 않았다면 지금의 나는 어떤 모습과 직업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하는 생각도 가끔 한다. 그러한 연유로 해외에도 많이 다닐 수 있고 다양한 나라에서 온 사람들을 제일 많이 만날 수 있는 직업이 뭘까 하는 고민 끝에 호텔리어라는 그 당시 내가 살던 청주에선 너무도 생소한 (그 당시에 청주엔 호텔이라곤 터미널 근처의 관광호텔이 전부였다. 지금은 어린아이들도 부모님과 함께 소위 ‘호캉스’라는 걸 많이 하러 오니 호텔이라는 공간에 익숙하지만, 그땐 여행을 가면 텐트를 가지고 가거나 펜션, 민박에서 자는 게 자연스러웠던 때였던 것 같다.) 직업을 꿈꾸게 되었다.
그때만 해도 호텔은 비즈니스맨이나 해외 패키지여행에나 함께 엮여있는 것이었다. 이런 시절에 갑자기 호텔리어가 되겠다고 호텔경영학과를 지원하겠다고 하니 선생님들은 반대가 많으셨다. 상경계열을 가도 호텔에 취업할 수 있는 방법은 많을 거라시며 좀 더 선택지를 넓게 가져가는 게 나중에 좋을 거라는 조언이었다. 그때의 그 조언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상경계열로 진학해서 경영학과를 갔다면 지금 내 직업은 달라졌을 수 있을 것이지만, 계속 호텔이라는 목표를 상기시키며 현재의 회사에 올 동기부여를 받지 못했을 것 같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타 대기업에 비해 인건비 비중이 높고 이익률이 높지 않은 산업인 호텔산업은, 친구들이 다니는 직장에 비해 급여가 박한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때 나의 선택이 내 인생을 20년 이상 좌우하게 될 줄은 그때의 나는 크게 자각하지 못한 채 진로를 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