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 작가와 함께 다시 쓰는 안데르센 세계 명작
우리가 아직 가보지 못한 세상의 끝에 섬 하나가 있다. 오색으로 빛나는 바다는 파도가 되어 밀려와 섬의 발치에서 하얗게 부서진다. 인간을 사랑한 인어가 거품이 되어 사라졌다는 옛이야기처럼.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바위를 적셨던 바닷물 자국이 햇볕에 말라 사라져 버리듯, 전설은 날로 희미해지기 마련이다. 기실, 사람들은 진짜 인어의 이야기를 잊은 지 오래였다. 꺼져가는 모깃불이 간혹 '타닥' 소리를 내듯, 기억에 잠깐 스치는 허무한 결말이 전부일 만큼. 그러니 여기, 인어의 영혼이 깃들어 전설의 일부가 된 소녀의 이야기를 들어보라. 머지않아 우리가 놓친 진실을 발견하게 될 테니까.
여름날 뜨거운 햇볕 아래에서 달리고 있는 소녀가 보이는가? 한낮 해변의 모래가 반짝일 때면 소녀는 맨발로 바다를 향해 달려 나가고는 했다. 발바닥에 느껴지는 열기와 따끔거림을 이내 덮어버리며 발목까지 차오르는 바닷물을, 소녀는 사랑했다. 가만히 서서 바다 너머를 바라보면, 눈부셔 바라보기 힘든 수평선 끝에 육지가 있었다. 어린 시절 내내 육지는 소녀가 매일같이 눈에 담는 풍경에 불과하였다. 어느 날, 이마에 은빛으로 반짝이는 비늘이 돋기 전까지는.
“인어의 비늘이야.”
노파가 말했다. 노파는 소녀가 사는 마을에서 가장 나이 든 여성이었다. 생명이 탄생하고, 피어나고, 스러져가는 모습을 수백 번에 걸쳐 보아 온 노파를 마을 사람들은 가리사니라 불렀다.
“좋은 것인가요?”
소녀가 묻자, 주름진 가리사니의 입가에 언뜻 미소가 보이는듯하였다.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란다. 단지 때가 왔다는 것을 알려주는 게야.”
소녀는 무언가 알 수 있기를 기대하고 가리사니를 찾아온 것이었는데, 질문이 거듭될수록 모든 것이 더 불분명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비늘이 사라지는 날에는 그 의미를 알 수 있을지도 모르지.”
소녀는 가리사니의 마지막 말을 오랫동안 곱씹었다. 그러나 이후 사흘, 나흘, 여드레가 지나는 동안에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므로 그 말은 기억 저편에 묻혔다.
어쨌거나 변화는 소녀의 마음속에서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열 하루째 되는 날 드디어 석양 아래 붉게 빛나는 육지가 소녀의 시선에 들어왔다. 문득 육지에 대한 호기심이 차올랐다. 그 생각은 너무 강렬하여, 그곳은 어떻게 생겼는지, 누가 살고 있는지, 어떤 언어를 쓰는지 모든 것을 온몸으로 확인하고 싶은 열망이 소녀를 지배하였다. 그리하여 소녀는 육지를 향해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육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바다를 건널 배가 필요했다. 소녀는 즉시 배를 만드는 일에 뛰어들었다. 나무를 베어 수액을 발라 건조하고, 턱을 조각해 짜 맞추고, 못을 박았다. 손에는 굳은살이 박이고 팔과 다리에 상처를 입는 날도 많았으나 개의치 않았다. 아마포에 촛농을 먹여 요기할 음식을 싸는 것도 잊지 않았다. 마침내 손수 깎아 만든 노가 준비되었을 때 소녀는 작은 항해를 시작했다. 맨눈으로 보이는 육지인데도 가는 길이 녹록지 않았다. 파도와 씨름하다 드러눕기를 며칠, 아마포 보자기 속이 비어갈 때 즈음 소녀는 드디어 뭍에 닿았다.
바위 사이에 배와 노를 잘 숨겨서 뉘어 놓고, 소녀는 사람들이 사는 곳을 찾아 바다로부터 멀어져 갔다. 사람들이 사는 곳은 쉬이 보이지 않았고, 숲길이 이어졌다. 그때 다급한 비명과 몸싸움하는 소리가 들려와, 소녀는 몸을 숨기며 조심스레 가까이 다가갔다.
한 사내가 소년에게서 무언가를 빼앗으려 위협을 가하고 있었다. 소년이 소리를 지르며 저항하고 있었지만 사내가 끈질겼다. 소녀는 근처에서 무거운 돌을 잡아 던져 사내의 등에 맞추고 사내가 넘어져 있는 틈을 타 소년을 데리고 달려 나갔다. 한참을 달려 숲 귀퉁이에 다다랐을 때 소년은 무언가 말을 하였으나 소녀는 소년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도 이 아름다운 소년이 감사의 표시로 자신을 초대하고 싶어 한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다.
섬을 떠난 지도 수일이 지났다. 둘은 함께 들판을 거닐고 냇가에서 고기를 잡았다. 장이 서는 날이면 새로운 음식을 맛보고 왁자지껄한 거리를 걷기도 했다. 소녀는 결국 한동안 소년의 집에 머물기로 했는데, 그간 둘이 사랑에 빠지게 된 까닭이었다. 언어가 통하지 않아 깊은 속내를 알 수는 없었지만, 눈빛과 손짓만으로도 서로 스미기에 충분했다. 어느덧 몇 번의 계절이 지나, 소녀는 육지의 말을 완전히 터득하였다. 누구도 소녀가 말하는 것만 듣고서 이방인임을 알아챌 수 없게 된 것이다. 소녀는 비로소 가장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았다.
“너는 왜 쫓기고 있었던 거니?”
“내가 그 사내의 보물을 훔쳤으니까.”
소년의 반짝이는 눈과 발그레한 볼은 전과 다름이 없었다. 그 다름없음이 소녀를 더는 같은 마음으로 남아있을 수 없게 하였을 뿐. 소녀는 아마포 보자기를 챙겨 나와 숲을 향하여 걸었다. 소년의 울음소리를 들은 듯하였으나, 뒤를 돌아보지 않아 알 수 없었다. 숲을 통과하며 소녀는 산딸기를 따서 보자기에 담았다. 소녀가 육지에 머무는 동안 촛농이 닳아 산딸기즙이 보자기에 스며 땅으로 흘렀다. 소녀의 걸음 뒤로 붉은 자국이 점점이 선명했다.
해변이 나뭇가지 사이로 언뜻 보이기 시작한 순간, 숲이 옆으로 솟고 산딸기가 하늘을 날고 코에는 짓이겨진 풀과 흙냄새가 가득 들어찼다. 소녀가 소년을 구하기 위해 던졌던 돌이 그곳에 남아 소녀의 발끝에 걸리고 만 것이다. 소녀는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발목이 아파 주저앉았다. 울컥, 목이 메는 것을 느끼며 소녀는 잠시 웅크리고 있었다. 오래지 않아 도착한 바닷가 바위 뒤에는 배가 조금 기울어진 채로, 기다렸다는 듯이 그 자리에 있었다. 소녀는 절뚝이며 배를 밀었다. 다리는 부러졌지만, 노를 저을 수는 있었다. 귀향하는 뱃길은 통증과 배고픔과 정리되지 않은 감정의 덩어리로 어지러웠다. 그리고 이것은 처음 소녀가 기대했던 것과는 아주 달랐다.
마을에 돌아온 뒤 얼마지 않아 소녀는 이마의 비늘이 사라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소녀는 가리사니에게로 갔다.
“비늘은 나쁜 것이었어요.”
소녀의 눈빛에서 느껴지는 원망을 가리사니는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평온하기만 했다.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란다. 다만 때가 왔다는 것을 알려주는 게야.”
“그렇지만 비늘은 이미 사라졌고, 다리도 마음도 다쳤는걸요.”
소녀가 소리치듯 말하고 있었음에도 가리사니는 동요하지 않았다.
“비늘이 다시 돋는 날에는 그 의미를 알 수 있을지도 모르지.”
소녀는 코웃음을 치고 가리사니에게서 등을 돌렸다. 어쩌면 가리사니라 해도 뭐든지 아는 것은 아닐 테지. 소녀는 여전히 절뚝였고 아마포 보자기는 아직 붉었다.
세월이 흘러 소녀는 나이를 먹었다. 소녀, 아니 여자는 그간 배를 만들어온 경험을 살려 사람들과 함께 더 큰 배를 만드는 일을 하게 되었다. 아마포는 머리 두건이 되어 여자와 함께했다. 촛농은 벗겨지고 때는 탔지만 붉은 기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여자는 육지의 언어를 능숙하게 구사하였으므로 육지로의 항해에 상인들과 종종 함께하기도 했다. 항해를 마치고 돌아온 날이나 고된 노동을 마친 날 저녁이면 여자는 어린 시절처럼 해안가를 거닐었다. 바다 위에는 늘 어디선가 날아온 새들이 있었지만, 이들이 유유히 날갯짓하는 모습은 그저 편안한 풍경에 불과하였다. 어느 날, 여자가 새로운 모험을 시작하기 전까지는.
저 새들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그곳은 어떻게 생겼을까, 그곳은 얼마나 멀리에 있을까. 느껴본 적 있는 그리운 열망이 여자를 온통 사로잡았다. 여자는 문득 가리사니를 떠올렸고, 때가 왔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무언가 깨달은 듯 가장 높은 언덕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고 있었다. 바닷바람에 머리 두건이 벗겨져 살랑이며 떨어져 내렸다. 땀이 흐르고 숨이 가빠왔지만, 언덕 꼭대기에 다다를 때까지 쉬지 않고 달려갔다. 여자는 숨을 고르고 마침내 바로 서서 섬을 내려다보았다. 눈길이 닿는 곳마다 황금을 머금은 청록의 물결이 끝없이 이어졌다. 섬에 닿아 가냘픈 거품으로 부서져 내리는 바다는 그곳에 없었다. 오로지 다정하게 어루만지는 듯한 푸른 물결만이,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거대한 흐름이 되어 섬을 오롯이 품고 있었다. 어느새 타오르던 석양빛이 여자의 얼굴을 비추자 눈동자 속 하늘과 바다가 주홍빛으로 하나 되어 일렁였다. 여자의 이마에서 무언가 반짝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