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바빠서 못했어" "오늘은 귀찮아서 안 했어"
두 문장에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첫 번째는 핑계라 할 수 있지만 두 번째는 핑계보단 게으르다고 해야 맞다. 하지만 이 두 문장에는 공통점이 존재한다 바로 "결정"이다. 바빠서 못했지만 그것 또한 내가 선택한 부분이고 귀찮아서 하지 않은 것 또한 나의 선택이다. 첫 번째는 강요된 결정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바쁜 일을 회피하지 않고 다른 것을 포기하며 그 일에 몰두하는 것이 바로 스스로에 결정이다.
사람들은 바쁘다고 할 때 스스로가 결정하는 폭이 좁아진다. 하지만 그 좁은 폭에서도 꼭 지키려는 생활적인 부분이 있다. 바빠서 식사를 거르는 사람이 있는 반면 바빠도 식사를 거르지 않는 사람이 있다. 다양하지 않은 선택이지만 사람에 따라 선택이 다양해진다. 당연한 거지만 수면을 논할 때 수면시간이 줄어들 뿐 수면을 안 하는 사람은 없지 않은가? 식사 때를 결정할 정도로 바쁘다면 그 '일'을 해결하기 위해 또는 집중하기 위해 우리는 생활에 크게 지장 되지 않는 부분 또는 그와 비슷한 모든 스케줄을 취소한다. 이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정당화다.
반면 두 번째 문장은 정당화로 설명하기엔 조금 부족하다. 게으르다를 논할 때는 스스로 해낼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능력을 발휘하지 않을 때이기 때문이다. 충분한 여유가 있고 식사할 시간이지만 요리하기 귀찮다는 핑계로 밥을 거르는 것은 생존을 위한 본능적인 부분인데도 불구하고 영양섭취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일반적인 정당성으로는 이해하기 어렵다.
우리는 흥미로운 것에는 항상 움직이는 경향이 있다. 인간 (또는 동물)은 에너지를 소비함으로 그에 마땅한 대가가 있어야지만 움직인다. 하지만 식사를 하기 귀찮을 만큼 식사를 안 하게 된다면 그것은 밥을 먹는 거에 귀찮은 것이 아닌 밥을 먹기 위해 움직여야 하는 것이 귀찮은 것이다. 한마디로 요리하는 것이 흥미롭지 않다는 것과 같다. 배는 고프지만 지금 나는 요리하기가 너무 싫어서 밥은 안 먹는다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서 정당성을 찾는다.
그렇다면 정당성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정당성은 '설명' 또는 '해석'에서 온다. 다른 말로는 '변명'도 가능하다. 시험기간에 친구들과의 만남을 스스로 금하고 핸드폰 사용을 제한하는 행위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나 자신은 이 설명이 타당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학생에게 가장 우선순위가 되어할 공부를 다른 일이 우선순위가 되어 공부를 못한다는 정당성을 논할 때는 설명보단 변명이 맞다. 물론 그것이 타당하다면 변명이 아닐 수도 있다. 귀찮은 것에 대한 정당성을 설명할 때는 해석이라 말할 수 있지만 보통은 변명인 경우가 대다수다.
완벽주의자 또는 그와 비슷한 사람들은 스스로가 정당성을 찾으며 그 모든 설명을 '변명'이라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즉, 충분한 설명과 이유가 있음에도 스스로가 변명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어떠한 결과가 스스로에 능력 부족이 아니어도 스스로가 노력이 부족했다는 생각을 갖는 사람들이다. 게으른 선택을 할 때도 자책하며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사람도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핑계는 나쁜 것만은 아니다.
건강심리학에서는 어느 정도는 자신을 의무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매일 요리해서 건강한 밥을 먹는 것도 좋지만 요리해야 되는 의무에서 벗어나 그 이유가 귀찮은 것이라도 배달이나 외식으로 나 자신을 쉬게 하는 것도 좋은 선택이라 말한다. 항상 남용하는 것은 아니되 생활에 지장 없는 게으른 선택이라면 허락하는 것이 좋다. 핑계라고 생각하는 선택을 할 때 스스로에게 '한번 정도'는 괜찮다고 인지하며 항상 의무를 지켜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는 것은 좋으며 자책할 때에도 정말 여러 번 한 것이 아니라면 자책하는 것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리가 항상 버스를 타지만 가끔은 택시를 타지 않는가? 이런 예와 비슷할 정도로만 지켜주는 것이 마음을 좀 더 편하게 할 수 있는 선택이다. 중요한 것은 핑계가 나 자신을 위한 설명으로만 사용해야지 변명으로 사용하는 것은 결국 변명만 낳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