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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국어 교원 Sep 18. 2021

베트남에서 보낸 추석

2017년 후에 세종학당 3학기

바빴던 글짓기 대회가 끝나고, 내가 이번 학기에 맡은 5주짜리 토픽(한국어 능력시험) 강의도 모두 끝나고 한숨 돌릴 때가 되니 어느덧 추석이 되었다. 베트남에도 추석은 있지만(Tết Trung Thu. '뗏 중 투'라고 한다.) 한국처럼 쉬지는 않는다. 베트남에서는 추석이 명절이라기보다는 어린이날과 비슷하다. 어린이들이 선물을 받는 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도 그냥 평소처럼 평범하게 지낼 줄 알았는데, 예상과 다르게 한국에 있을 때보다 더 특별하게 지내게 되었다.


추석 하루 전, 부모님이 다낭-후에-호이안 패키지여행으로 후에에 오셨다. 평소에는 해외여행도 패키지여행도 전혀 안 가시는 분들인데 내가 사는 환경이 궁금하다고 오신 것이다. 패키지여행이고 후에에서는 딱 1박밖에 안 하셔서 정말 짧은 시간 동안만 같이 있을 수 있었다. 나는 부모님이 묵을 호텔에 내 방을 따로 예약하고, 퇴근하자마자 호텔 로비로 가서 부모님을 기다렸다. 그리고 호텔에 온 부모님을 보자마자 달려가 푹 안겼다. 20대 후반이나 됐는데 오랜만에 부모님을 본 그 순간에는 아이가 되어 버렸다. 낯선 해외 생활과 나도 모르게 은근히 느꼈던 외로움, 바쁜 업무로 인한 스트레스가 부모님을 보는 순간 확 날아갔다. 같이 패키지여행을 하시는 분들이 우리를 보고 딸을 여기에서 만나냐고 신기해하셨고, 부모님이 내가 여기에서 일한다고 하자 대단하다고 하셨다. 그분들의 칭찬을 듣고 은근히 뿌듯해하시는 부모님을 보니 나도 뿌듯해졌다. 아쉽게도 다음 날 여행 일정이 아침 일찍 시작해서 우리가 같이 있을 수 있는 시간은 저녁부터 이른 아침까지였지만, 우리는 호텔 수영장에서 놀고 방에서도 실컷 놀았다. 잘 시간이 되어서는 아빠를 내가 예약한 방으로 보내고 나는 엄마와 같은 방 같은 침대에서 잤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엄마의 품은 참 포근하고 안락했다.


다음 날인 추석 당일, 부모님은 아침을 먹고 바로 버스를 타고 다음 여행지로 떠나셨다. 그날 저녁에 중급 반 학생들의 수업이 있었는데, 학생들이 수업이 끝나고 나와 같이 가고 싶은 곳이 있다고 해서 학생의 오토바이를 타고 같이 갔다. 베트남 소금 커피 카페였다. 카페 이름은 'cà phê muối'로, 한국어로 '소금 커피'라는 뜻이다. 후에에서는 아주 유명한 카페라고 한다. 나는 소금 커피를 한 입 먹어보고 처음 먹어보는 맛에 깜짝 놀랐다. 연유를 타서 아주 달달한 커피에서 은은하게 짠맛이 느껴졌다. 이전에는 소금 커피라는 것을 먹어 본 적이 없었다. 단 맛과 짠맛이 이렇게 어울릴 줄이야. 가격도 매우 싸서 학당이나 집과 가까우면 자주 오고 싶어질 정도였다. 학생들은 내가 커피를 아주 좋아하자, 선생님이 좋아해서 다행이라고 했다. 우리는 카페 주변 거리에서 산 망고와 베트남 자몽도 같이 먹었다. 베트남 사람들은 딱딱한 망고를 간장 양념이나 소금에 찍어 먹는데, 이것도 정말 별미였다. 과일도 맛있었지만 커피가 너무 맛있어서 한 번 더 시켰다.


잊을 수 없는 cà phê muối. 소금 섞인 연유에 충분히 커피가 내려오면 얼음을 섞어 마신다.


"선생님, 베트남 쩨(chè)를 먹어 봤어요?"

"아니요. 그게 뭐예요?"

"쩨는 음... 달아요. 맛있어요. 간식이에요. 학생들이 자주 먹어요. 음... 설명하기가 어려워요. 혹시 같이 가실래요?"


아무래도 학생들은 오늘 나와 같이 있어 주기로 작정을 한 것 같았다. 한국에 있으면 가족들과 같이 명절을 보낼 텐데, 외국에서 혼자 명절을 명절같이 않게 지내야 하는 한국인 선생님이 마음에 걸렸나 보다. 더군다나 내가 수업 시간에 오늘 부모님이 왔다 가셨는데 너무 조금 같이 있어서 아쉽다고 말했었다. 어쩐지 나를 보는 학생들의 눈빛이 왠지 약간 측은하더니... 혹시 혼자 남아 외로워할 나를 위해 오늘 소금 커피도 알려 주고 "쩨"라는 것도 알려 주기로 한 모양이다. 저녁 7시 반에 수업이 끝났고 소금 커피 카페에도 간 후라 조금 피곤하기도 했지만, "쩨'가 도대체 뭘까 궁금하기도 하고 학생들의 마음이 고마워서 같이 가기로 했다.


"쩨"를 파는 식당은 정말 작고 허름했다. 학생들이 여기가 유명한 쩨 가게라고 말했는데, 과연 손님들이 많아 보였다. 다행히 우리가 갔을 때 테이블이 하나 비어서 우리는 쩨를 앉아서 먹을 수 있었다. 자리를 잡고 쩨가 도대체 무엇인지 봤는데, 왜 학생들이 '설명하기가 어렵다'라고 했는지 이해가 갔다. 난생처음 보는 음식이었다. 젤리(?)와 떡(?), 콩 비슷한 것들과 푸딩 같은 것들을 이름 모를 것들과 같이 섞어 만드는 것이었다.


쩨의 재료들. 학생이 사진 찍어 보내 줬다.


학생들이 나보고 어떻게 먹고 싶냐고 물어보길래, 뭐가 뭔지 모르는 나는 그냥 "여러분이 맛있는 걸로 주문해 주세요."라고 했다. 구매자가 원하는 재료를 섞어 주는 것 같은데 학생들은 살짝 걱정하는 얼굴로 내가 마실 쩨를 주문했다. 아마 자기들이 주문하는 걸 내가 좋아할지 안 좋아할지 확신이 안 들어 그런 것 같았다. 나도 조금 걱정이 되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별로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쩨를 먹으니, 정말 어떻게 설명할 수 없는 오묘한 맛이 마음에 들었다. 떡은 아닌데 떡 같은 것의 쫄깃한 식감, 설탕물로 조린 것 같은 재료들로 인한 단 맛, 생전 처음 먹어 보는 종류의 음식. 나는 단 것을 매우 좋아하는데 소금 커피도 쩨도 맛있게 달아서 좋았다. 맛도 맛이었지만, 정말 베트남에서만 먹을 수 있는 특별한 음식이어서 좋았다. 학생들이 아니면 이런 것도 몰랐을 것이다. 학생들은 내가 쩨를 좋아하자 또 다행이라는 표정을 지으며 사실 선생님이 안 좋아할까 봐 걱정했다고 말했다. 나는 연기를 못하는 사람이라 맛이 별로였으면 아무리 좋은 척해도 티가 났을 텐데, 정말 내 입에 맞아서 다행이었다.


우리가 먹은 쩨



쩨를 먹는데 갑자기 주변이 엄청 시끄러워졌다. 무슨 일인가 했는데 탈춤 공연단이 쩨 가게 바로 앞에서 공연을 하고 있었다. 베트남은 추석 며칠 전부터 전통 공연단이 사자춤과 용춤 공연을 한다. 공연단은 트럭을 타고 다니며 도시 곳곳을 돈다. 그리고 가게나 집 앞에 내려 공연을 한다. 가게나 집주인이 따로 요청을 해서 가는 건지, 아니면 무작위로 하는 건지는 모르겠는데 공연이 끝나면 가게 주인들은 공연단에게 돈을 줬다. 그렇게 공연을 하는 집에는 복이 들어온다고 한다. 나도 추석 며칠 전부터 이 공연단이 돌아다니는 것을 보기는 했는데, 이렇게 가까이서 공연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공연단은 모두 탈을 쓰고 있었다. 빨간색, 노란색, 초록색, 주황색 사자탈을 쓴 춤꾼들이 노인 탈을 쓴 사람의 지휘에 맞춰 춤을 추고, 사자탈을 쓴 사람이 긴 장대에 혼자 올라가 아슬아슬한 묘기도 보여줬다. 사자춤이 끝나니 여러 개의 막대를 이용한 용춤 공연도 이어졌다. 사자탈을 쓰고 사자춤을 추는 사람들은 거의 아이들이었는데, 베트남의 추석이 아이들을 위한 명절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나는 이 공연이 신기하고 재미있어서 넋을 놓고 봤다.


사자춤 공연





이렇게 나는 베트남 추석 때 베트남 문화 탐방을 할 수 있었다. 소금 커피도, 쩨도, 탈춤 공연도 정말 베트남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이었다.


몽골에서 살 때도 부모님이 오신 적이 있었다. 그때는 부모님이 자유 여행으로 오셔서 나와 4일 동안 계속 같이 지내다가 가셨는데, 공항에서 부모님을 보내고 나 혼자 돌아오는 길이 너무 쓸쓸했다. 집에 도착한 후에는  부모님이 바리바리 싸 오신 반찬으로 채워진 냉장고, 내가 잠시 외출한 사이에 부모님이 반듯하게 개 놓은 옷장의 옷들, 하지만 혼자라서 텅 빈 것 같은 집에 있으니 눈물이 나왔었다. 그런데 2017년 베트남에서는 학생들 덕분에 전혀 외롭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외로울 줄 알았던 외국에서의 추석은 학생들 덕분에 잊지 못할 날이 되었다. 추석 연휴인 지금, 이날의 베트남이 특히 더 그립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날인 것을 잘 알지만, 그래도 다시 돌아가고 싶은 그런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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