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이카 봉사 단원으로 파견되어 2년 동안 살았던 몽골 울란바타르. 귀국하고 한국에 살면서, 베트남에 살면서도 그곳은 항상 그리웠다. 몽골에서 사는 꿈을 꾸거나, 몽골이 너무 그리워 몽골로 여행을 가는 꿈을 꾼 적도 수도 없이 많다. 며칠 전에도 꿈을 꿨는데, 코로나19 시기에 가족들에게 말도 안 하고 몽골로 가 버려서 '코로나19에 걸리면 어떡하지, 귀국하면 자가 격리해야 하는데... 가족들한테는 어떻게 설명하지...' 하며 전전긍긍하다가 꿈에서 깬 적도 있었다.
베트남 학생들은 나한테 "선생님, 베트남이 더 좋아요 몽골이 더 좋아요?" 물어보고, 반대로 몽골 학생들은 "몽골이 더 좋아요, 베트남이 더 좋아요?" 물어본다. 그럴 때마다 나는 항상 둘 다 비교할 수 없이 좋다고 대답했다. 이건 사실이다. 베트남도 몽골도 다 나에게 소중한 추억을 안겨 주었고, 나는 더 성장하게 해 준 곳이다.
하지만 더 그리운 곳, 다시 한번 살고 싶은 곳은 몽골이다. 왜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아마 몽골은 내가 처음으로 해외 생활을 한 곳이자 처음으로 한국어를 가르친 곳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처음이었던 만큼 서툴렀고 실수도 많았고 힘들었다. 나 홀로 해외에서 살아가는 것도 힘들었고 한국어를 가르치는 것도 교사로서 부족한 점이 너무 많았다. 부끄럽지만 수업 때 실수도 많이 했다. 처음 1년 동안은 수업할 때마다 잔뜩 긴장을 했다. 아마 코이카 동료들이 없었으면 나는 1년도 못 버티고 귀국했을 것이다. 하지만 베트남에 갔을 때는 이미 해외 생활을 2년 해 봤기 때문에 해외에 적응하는데 큰 문제는 없었다. 그리고 한국어 수업도 익숙해져서 몽골에서보다 훨씬 더 잘, 능숙하게 가르쳤다. 그래서 베트남을 떠날 때는 후회할 것이 없었다. 하지만 몽골은 후회를 가득 안고 떠난 곳이라 아쉬움도 그리움도 더 큰 것 같다. '지금 다시 몽골에 가면 더 잘 살 수 있는데, 더 잘 가르칠 수 있는데' 하면서 말이다.
제일 아쉬운 일은, 몽골에서의 기억 중 잊히는 것이 점점 많아진다는 것이다. 사진으로 남긴 것이나 파견 초반에 일기로 써 놓은 것들은 자세히 기억이 나지만, 사소한 기억들은 나이가 들수록 사라진다. 몽골에서 알고 지낸 사람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어? 내가 그랬었어?", "그런 일이 있었나?" 하는 기억들이 많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일기를 매일 쓸 걸! 몽골에서부터 브런치나 블로그를 할 걸!... 사실 일기를 매일 쓰려고 했는데 심적으로 많이 힘들었을 때 항상 우울한 일만 쓰다 보니 더 우울해져서 그만두었다.... 그만두지 말 걸!
후회해 봐야 뭐 하겠나. 후회할 일만 늘어나겠지. 언젠가는 몽골에 다시 갈 수 있기를 기대하며, 몽골에 관련된 추억을 조금 풀어 본다.
내가 파견되었던 몽골국립사범대학교 인문사회대학. 봉사단원 신분이었지만, 2년 동안 동양어문학부 한국어학과 교수로 일했었다. 몽골은 교수 개인 연구실이 따로 없고 교무실이 있는데, 나 혼자 외국인이고 몽골어도 못하고, 또 이런저런 이유로 불편해서 교무실에는 오래 앉아 있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용기 내서 교무실에서 다른 교수님들과 이야기를 좀 많이 해 볼 걸 그랬다.
처음으로 가르친 학생들. 정식으로 수업을 시작하기 전에 학교에 갔었는데, 학생들이 내가 온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런 깜짝 이벤트를 해 줬다. 마침 이날이 내 생일이었다.
학생들과 수업이 끝난 후와 주말에 계속 모여서 같이 준비했던 연극 대회와 퀴즈 온 코리아 대회. 비록 결과는 그다지 좋지 않았지만 준비하는 과정은 참 즐거웠다.
울란바타르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자이승 전망대. 집에서 걸어서 20분 정도 거리라 운동하고 싶으면 여기에 올라갔다. 스트레스받아서 한국으로 가고 싶을 때 자이승에 올라 울란바타르를 내려다보면 '아, 여기서 보면 다 작아 보이네. 내가 안고 있는 스트레스도 사실 작은 거 아닐까? 그리고 여기도 내 삶의 터전이다!' 하는 생각이 들어 귀국 생각이 사라졌다. 운동도 하고 기분 전환도 할 수 있었던 최고의 장소.
아는 사람은 다 아는 몽골의 광활한 자연 풍경! 몽골의 전통 집 게르는 몽골의 초원을 더 돋보이게 한다. 몽골이 그리운 이유는 사실 어디 가도 볼 수 없는, 사진으로는 차마 다 표현하지 못하는 자연 때문인 것도 있다. 도시를 벗어나자마자 보이는 탁 트인 초원과 풀을 뜯어먹는 가축 무리들, 평지에 있는데도 가까워 보이는 웅장한 하늘. 무엇보다도 밤하늘에 흐르는 은하수를 아주 또렷하게 볼 수 있다는 것. 은하수를 바라보며 컵라면과 맥주를 마신 기억은 정말 죽을 때까지 잊히지 않을 것이다. 핸드폰으로 은하수를 찍을 수 없었다는 것이 아쉽다.
몽골의 자연을 제대로 즐기고 싶으면 고비 여행을 가야 한다. 고비 여행은 정말... 너무 힘들어서 두 번은 못하겠지만 살면서 한 번쯤은 반드시! 꼭! 가야 하는 곳이라고 생각한다. 고비의 웅장한 경관은 아무리 잘 찍은 사진이라도 10분의 1도 담아내지 못하는 것 같다. 꼭 직접 눈으로 봐야 한다. '와!'가 아니라 '와......' 소리가 자동으로 연달아 나오는 곳이 바로 고비다.
학생들에게 내 준 과제와 시험 문제. 귀국할 때 나중에 논문 쓰면서 연구 자료로 쓸 수 있을까 해서 이런 자료들을 좀 챙겨 왔는데, 논문에 사용하지는 않았고 기념품이 되었다. 어제 밑에 두 사진의 주인공 앙흐바야르에게 이 사진을 보냈는데, 이때 자기가 이렇게 귀여웠냐며 새해 선물을 받은 느낌이라고 아주 좋아했다. 이때 앙흐바야르는 한국어를 배운 지 약 1년이 지났을 때였다. 그랬던 앙흐바야르는 2년 전에 한국어능력시험 6급(제일 높은 등급)에 합격했고 한국어 번역 통역 일도 하는 직장인이 되었다.
3학년 학생들에게 천상병 시인의 <귀천>, 윤동주 시인의 <서시>를 주고 시화를 그려 보게 했다. 시에 대한 설명을 아무것도 해 주지 않은 상태에서 학생들이 스스로 시의 의미를 해석해서 그리게 했다. 그 후에 학생들이 자신이 어떻게 이해하고 그린 것인지 발표하게 하고, 발표가 끝난 후에 내가 어떤 시인지 설명해 주었다. 가운데 학생은 귀천의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해서 놀랐었다.
이 글을 쓰게 된 계기이다. 나는 몽골에 사는 2년 내내 학원을 다니며 몽골어를 공부했다. 오늘 어쩌다가 그때 공부한교재를 다시 훑어보았는데, 교재를 보니 몽골이 더 그리워졌다. 그리고 동시에 참 아쉬웠다. 그렇게 열심히 공부했던 몽골어인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행히 초급 수준은 얼추 기억이 나는데... 나는 몽골 교육부에서 인증하는 몽골어 시험도 중급 수준으로 합격했었다. 그런데 정말 중급 수준의 문장과 단어가 기억이 안 난다. 억울하다... 귀국한 이후 공부를 안 했으니 기억이 안 나는 건 당연한 건데 억울하다... 다시 간다면 하루 3시간은 몽골어 공부에 올인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