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완 님의 목소리로 들은 <우리는 함께 자란다>
9월 1일, SBS 라디오 <아름다운 이 아침 김창완입니다>에서 김창완 님이 <우리는 함께 자란다>의 일부 내용을 읽어 주셨다. 내가 쓴 책을 김창완 님이 읽어주시다니, 내 책의 내용을 김창완 님의 목소리로 들을 수 있다니! 정말 영광이었고, 감동이었다. 나의 소중한 책이 라디오에서 낭독된 것도 영광이었지만, 낭독한 사람이 김창완이라서 더 영광이었다. 김창완은 나에게 특별한 가수이기 때문이다.
나는 원래 누가 같이 가자고 부추기지 않는 이상 콘서트에 가지 않고, 유명인을 만났다고 사인을 받으려고 하지도 않는다. 호감이 가는 연예인은 많지만 팬이 될 정도로 좋아하는 사람은 없고, 누군가의 공연을 보고 가슴이 설레 본 적도 공연에 열광해 본 적도 없다. 그런 내가 유일하게 가고 싶어서 간 공연이 바로 김창완 콘서트였고, 유일하게 사인을 청한 사람도 김창완이었다. 공연을 보는 내내 시간이 가는 게 아쉬웠고, 마지막 곡이 나왔을 때는 목이 쉬도록 앙코르를 외쳤다.
내가 김창완의 공연을 본 곳은 조금 생뚱맞을 수 있지만 한국이 아닌 몽골이었다. 2016년 9월 초, 코이카 단원 신분으로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에 살고 있을 때 주몽골 한국 대사관의 주최로 1주일 동안 '한국 주간 행사'가 열렸다. 한식 축제, 한복 패션쇼, 태권도 공연 등 다양한 행사가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김창완 밴드의 공연이었다.
당연한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외국에 살면 놀거리가 별로 없어서 한국에서 살 때보다 심심하다. 그 나라 여행을 할 수 있으니 좋지 않냐고 할 수도 있지만, 여행이 새롭고 즐거운 것은 평소에 경험해 보지 못한 익숙하지 않은 환경에 가기 때문이다. 나한테 몽골은 생활 그 자체였다. 울란바토르는 도시이기 때문에 오락거리가 꽤 있었지만 외국인인 내가 즐길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었다. 가끔 기분 전환을 하러 도시 외곽으로 나가 아름답고 드넓은 초원과 그곳에서 무리 지어 풀을 뜯는 양과 염소, 밤하늘에 선명하게 보이는 은하수를 구경하는 것도 세 번째부터는 평범하게 느껴졌다. 나는 2014년 11월에 몽골에 왔고, 2016년 11월에 귀국 예정이었다. 행사가 열렸을 때는 몽골에 온 지 거의 2년이 다 되어 귀국을 앞둔 시기라 일상이 조금 따분하던 터였다. 그런데 이 시점에 유명한 밴드인 김창완 밴드의 콘서트를 무료로 볼 수 있다니,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나는 다른 코이카 단원 몇 명과 같이 콘서트를 보러 갔다. 김창완 밴드의 공연은 한식 축제 장소였던 공원에서 축제가 끝나고 시작되었다. 솔직히 공연을 보기 전에는 그냥 유명한 사람의 공연을 무료로 볼 수 있어서 좋다는 생각만 했다. 그리고 김창완의 노래는 드라마 OST로 쓰인 곡 몇 개 정도만 아는 수준이었다. 팸플릿에 공연 때 부를 곡과 가사가 다 나와 있었는데, 내가 아는 노래는 겨우 세 개였다. 김창완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고, 콘서트를 좋아하는 성격도 아니었으니 공연도 그렇게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본격적인 공연을 하기 전에 B-BOY 공연이 있었는데, 춤이 너무 멋있어서 그 공연을 계속 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김창완 밴드의 공연이 시작되자 우리는 그 공연에 완전히 빠져들었다. 관객들의 상당수는 한국 사람이었고, 몽골에는 한국 사람들이 많지 않으니 당연히 콘서트라고 하기에는 관객이 너무 적었다. 하지만 김창완 밴드는 열과 성을 다해 멋진 공연을 펼쳤다. 신나는 노래를 부를 때는 우리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손에 있는 풍선을 흔들며 열광했고, 서정적인 노래를 부를 때는 김창완 님의 목소리에 완전히 녹아들어 노래에 몸을 맡겼다. '청춘'을 부를 때는 노을이 졌는데, 무대 뒤로 넓게 펼쳐진 들판과 산, 점점 붉게 물들어가는 하늘을 보며 세월을 흘려보내는 노래를 감미로운 목소리로 감상하니, 잠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모르는 노래를 부를 때는 따라 부르려고 노력했는데, 아는 노래가 많이 없다는 것이 아쉬웠다. 20대 중반이었던 나는 환갑이 넘은 가수의 공연에 그렇게 빠져들었다.
공연이 끝난 후 나를 포함한 관객들은 몇 번이나 앙코르를 외쳤고, 두 번인가 세 번의 앙코르 공연 후 정말로 공연이 끝났다. 많이 아쉬웠지만 다행히도 팬사인회가 있었다. 콘서트에 온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인을 받기 위해 줄을 섰고 우리도 고민 없이 사인을 받으러 갔다. 나는 원래 몽골에서는 늦어도 9시 전에는 집에 갔다. 몽골이 위험한 나라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나는 젊은 외국인 여자였고 또 밤에는 술 취한 사람들이 많아서 조심해야 했으며, 밤늦게 택시를 타는 건 무서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때는 너무 늦은 시간이었는데도 이대로 사인을 못 받고 돌아가면 계속 후회할 것 같아 남았다. 약 30분이 넘게 기다린 끝에 김창완 밴드를 만날 수 있었고, 우리는 팸플릿에 사인도 받고 같이 사진도 찍었다. 한 가지 후회되었던 것은, 그날의 멋진 공연은 김창완 님 혼자만이 아니고 키보드 이상훈, 베이스 최원식, 드럼 강윤기 님도 같이 만든 작품이었는데 김창완 님에게만 인사를 하고 사인을 받은 것이었다. 그분들이 있었기에 공연을 즐길 수 있었던 것인데 말이다. 몽골에서 봉사활동을 한다고 하니 좋은 일 한다고 칭찬을 해 주셨는데... 다시 만나면 그분들의 사인도 꼭 받고, 좋은 공연을 보여 주셔서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다.
김창완 밴드는 이렇게 나의 얼마 남지 않은 몽골 생활에 특별하고 멋있는 추억을 만들어 주었다. 그 이후로 나는 김창완 밴드의 노래를 혼자서 수십 번 들었다. 그리고 텔레비전에서 김창완 님을 보거나 그분의 노래를 들으면 행복했던 추억이 생각나 좋았다.
그런데 바로 그 김창완 님이 내가 좋아하는 그 목소리로 나의 책 <우리는 함께 자란다>의 일부 내용을 낭독해 주신 것이다! 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기쁜 일인가. 낭독된 부분은 책의 4장 네 번째 이야기인 '미안하고 또 미안해'의 일부였다. 이 부분은 진수가 나에게 서운해서 펑펑 우는 것을 보고 내가 스스로를 성찰하고, 더불어 진수를 만나고 내가 어떻게 바뀌었는지, 내가 진수를 얼마나 사랑하게 되었는지 말하는 내용이다.
진수를 가르치기 전에는 내가 과연 이 아이를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을까, 아이와 나의 만남에는 돈이라는 대가가 있는데, 대가가 있는 사랑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고민이 되었다. 하지만 진수와 만난 지 2개월이 지난 지금, 나는 진수를 정말로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
(중략)
처음에 진수를 봤을 때 등이 아이치고는 참 넓다고 생각했는데, 내게 등 돌리고 서럽게 우는 아이의 등이 지금은 왜 이렇게 작아 보일까. 너무 작아서 내가 꼭 끌어안고도 팔이 한참 남는다. 나는 이 아이를 왜 그렇게 크게 봤을까. 아마 문제가 많고 다루기 힘든 아이라고 들어서, 그리고 아이를 가르친 경험이 전혀 없는 나였기에 어렵게 느껴진 것은 아니었을까. 사실은 한없이 작은 여섯 살 아이였을 뿐인데, 툭하면 짜증 내고 투정 부리고 주먹을 휘둘러도 결국은 사랑받고 싶고 관심받고 싶어 하는 아이였을 뿐인데.
낭독이 끝난 후에는 이런 말씀을 덧붙이셨다.
맞다. 우리는 모두 사랑을 먹고 산다. 아무리 재물이 많아도 사랑이 없다면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까. 서로 사랑을 주고받으며 살기에 이 세상을 살아가는 힘이 나는 것 같다. 갑자기 책 홍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진심으로 <우리는 함께 자란다>도 사랑이 필요한 독자들, 코로나19로 인해 지치고 고된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세상을 살아가는 힘을 줄 수 있는 사랑이라는 양식을 조금이라도 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5년 전 나에게 귀중한 추억을 선물해 주신 김창완 님이 다시 잊지 못할 큰 선물을 주셨다. 김창완 님에게도, 더 좋은 책을 만들기 위해 함께 고생한 출판사에도, 진수에게도, 그리고 책을 읽어 주신 분들과 이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도 정말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