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이카 동기였던 동생 재영이가 나를 보러 후에로 왔다! 몽골에서 가족같이 지내던 친한 동생이었고, 외국에 살면서 가족 말고 지인이 우리 집에 놀러 온 건 처음이어서 살짝 들떴다. 학기 중이라 내가 휴가를 낼 수 없어 주말에만 같이 놀 수 있고 같이 다른 지역으로 여행도 못 다녀서 아쉬웠다. 그래도 나를 보러 여기까지 와 줬는데 같이 있는 시간 동안은 잘 대접하고 잘 놀아야지! 생각하며 집 청소를 깨끗이 하고 재영이를 맞았다.
그런데... 집에 와서 짐을 풀자마자 전기가 나가버렸다! 하필이면 저녁에 도착해서 어두컴컴할 때였다. 아... 내 눈앞도 캄캄해졌다. 작년 여름의 악몽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한국에 있을 때는 집에 전기나 물이 끊기는 것을 한 번도 걱정해 본 적이 없다. 아주 가끔 잠깐 정전이 돼도 금방 전기가 돌아오니 크게 불편하지 않다. 그런데 해외에서는 이런 일이 종종 발생한다. 정전도 자주 되지만 꽤 오랜 시간 전기나 물이 안 들어올 때도 많다. 물이 끊기는 건 이유를 모르겠지만, 정전이 자주 되는 건 전압이 불안정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몽골에 있을 때도 그랬다. 어떤 때는 정말 하루 종일 전기가 안 들어올 때도 있었다. 물도 마찬가지로 잘 쓰다가 갑자기 끊길 때가 있었다. 처음에는 당황스러웠다.
'분명히 지난달 공과금을 냈는데 왜 안 들어오지? 뭐 문제 생겼나? 집주인이나 관리인한테 말해야 하나? 근데 전기가 갑자기 나갔다는 게 몽골어로 뭐지... 엄마 아빠 보고 싶다.'
하지만 이런 일이 워낙 자주 발생하니 곧 익숙해졌다. 저녁에 텔레비전 보다가 갑자기 전기가 나가면 '아 또 그러네. 내일이면 들어오겠지 뭐' 하고 손전등을 켜고 대충 씻은 다음 빨리 잤다. 전기는 그렇다 쳐도 물이 안 나오는 건 좀 곤란했지만, 낮에 끊기면 카페로 잠깐 피신을 가고 저녁에 끊기면 주변 코이카 단원들에게 지금 집에 물이 나오는지 물어본 후 나온다고 하면 짐을 챙겨서 그 집으로 갔다. 몽골에서 잠깐의 정전과 단수는 아주 조금 불편한 정도였다. 딱 한 번, 무슨 이유에서인지 동네 물이 3일 동안 끊긴 적이 있었는데 그때만 정말 불편했다. 단수 첫날에는 그러려니 하고 마트에서 5L짜리 물을 사 놨는데, 이틀째에도 물이 안 나와서 당황했다. 요리도 씻는 것도 못했다. 이틀째에는 마트에 물도 다 떨어졌다. 문제는 우리 아파트만 그런 것이 아니라 동네 전체가 단수여서 근처 코이카 단원 집으로 피신할 수도 없었다. 18L짜리 물통을 주문하려고 해도 이미 다 매진이었다. 단수 삼 일째 되자 어느 업체에서 온 건지 아파트에 물통을 가득 실은 트럭이 들어왔고 미리 물을 주문한 주민들이 받아갔는데, 나는 그런 정보를 몰라 주문을 못해서 답답했다. 다행히 삼 일째 늦은 밤에 물이 다시 들어왔다.
아무튼, 이렇게 정전과 단수는 이미 많이 겪어서 베트남에서도 별로 불편하지 않을 줄 알았다. 착각이었다. 겨울이 8~9개월인 건조하고 추운 나라 몽골, 7월 여름에도 건조해서 땀도 안 나고 햇빛이 없으면 시원한 몽골과 베트남은 전혀 딴판이었다. 다행히 베트남에서 단수가 된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처음 정전이 되었을 때 정말 지옥을 경험했다.
2017년 6월인가 7월의 한여름이었다. 밤에도 기온이 30도 가까이 되고 체감 온도는 더 높았다. 밤에 씻고 나와서 머리를 말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팍!' 하는 소리와 함께 전기가 나갔다. 창밖을 보니 이 일대가 모두 깜깜한 게 동네 전기가 다 나간 듯했다. '금방 다시 들어오겠지...' 하는 생각은 10분 정도가 지나자 '제발 빨리 들어와라'로 바뀌었다. 기온 자체가 사우나같이 덥고 습기 찬데, 나는 방금 머리를 감아서 더 축축했다. 게다가 땀도 주룩주룩 났다. 너무너무 더웠다. 등은 내 머리에서 흐른 물기와 땀으로 다 젖어 버렸다. 그런데 전기가 안 들어와서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휴대용 미니 선풍기를 틀었지만 그걸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답답한 무더위였다. 그때는 동기인 김 선생님과 잠깐 같이 살고 있을 때였는데 김 선생님도 탈진할 듯이 힘들어하셨다. 같이 있는 사람이 없었다면 정말 더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우리는 호텔로 피신하려고 했지만 이미 밤 10시가 넘어버려 호텔을 예약할 수 없었다. 호텔로 직접 가려고 해도 동네 호텔도 전기가 나간 걸 집에서 볼 수 있었고, 어느 지역까지 정전이 된 건지 알 수 없었다.
우리는 창문을 모두 열어 놓았다. 평소에는 벌레와 모기 들어올까 봐 환기시킬 때 빼고는 절대 하지 않았던 행동이지만, 그때는 창문이라도 모두 안 열어 놓으면 정말 죽을 것 같았다. 아파트 문을 열어 보니 다른 주민들은 대문도 다 열어 놓고 있었다. 우리는 대문을 열어 놓고 자는 건 무서워서 창문만 열었다. 근데 열어 놔도 죽을 것 같았다. 닫은 것과 전혀 차이가 없었다.
창문을 열고 모기장을 친 침대 안으로 들어갔는데 정말 지옥이었다. 머리는 하나도 마르지 않아 축축하지, 미친 듯이 덥고 땀나고 눅눅하지... 침대는 금새 물과 땀으로 젖어 버렸다. 다음 날 출근해야 해서 잠은 자야 하는데 너무너무 힘들어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땀이 비 오듯 흘러서 탈진할까 봐 물을 계속 마셨다. 그런데 물을 마시니 화장실을 너무 자주 가고 잠도 자기 힘들었다. 그리고 화장실이 불이 안 들어와 무서웠다. 그래서 물을 참고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인내의 시간을 보냈다. 숨을 쉬기가 힘들고 몸에 힘이 하나도 안 들어가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탈진해서 죽는 게 아닐까 무서웠다. 시간을 보니 새벽 2시였다. 4시간 동안 전기가 안 들어온 것이었다. 그렇게 버티다가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갑자기 느껴지는 찬바람에 눈이 떠졌다. 에어컨과 선풍기가 쌩쌩 돌아가고 있었다. 새벽 5시였다. 다행히 새벽이 지나기 전에 전기가 들어온 것이다. 나는 그때 잠을 잔 게 아닌 것 같았다. 확실하지는 않았지만 기절했었던 것 같다.
그날 이후 베트남에서 전기가 안 들어온다는 건, 특히 어디 가지도 못하는 밤에 그런다는 건 정말 끔찍한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더운 날 에어컨과 선풍기의 소중함을 아주 확실히 깨닫게 해 준 경험이었다. 그런데 하필 재영이가 우리 집에 놀러 온 첫날 정전이 된 것이다! 비가 억수로 많이 내리고 천둥번개가 쳐서 정전이 된 듯싶었다. 다행히 늦은 저녁은 아니었고 비가 오는 날이라 덥지는 않았다. 나는 바로 핸드폰 호텔 앱을 열어 호텔을 찾아봤다. 재영이는 그냥 기다려 보자고 했지만 지난번처럼 새벽에나 전기가 들어올까 봐 불안했다. 그런데 천만다행으로 이번에는 30분도 안 되어 전기가 들어왔다.
다음 날 우리는 같이 신나게 놀았다. 후에 왕궁도 놀러 가고, 왕궁 음식을 전문으로 하는 식당도 가고 발마사지도 받고, 야시장도 구경했다. 이미 왕궁은 2017년에 네 번이나 갔다 왔었지만 재영이와 함께 가니 색다른 느낌이었다. 그다음 날에는 재영이가 찾아본 브런치 맛집에 갔다. 후에에 브런치 식당이 있는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역시 맛집은 현지인이 아닌 여행자들이 잘 아는 것 같다. 한국에 있을 때는 브런치를 엄청 좋아했는데, 왜 후에에서 브런치 식당을 찾아볼 생각을 못했을까? 검색해보니 인터넷에서 정말 유명한 곳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수제 햄버거와 샌드위치도 있었다! 덕분에 단골 식당을 찾게 되었다.
맛있는 브런치!
저녁에는 흐엉 강이 다 보이는 루프탑 카페에 가서 분위기 있게 야경을 즐겼다. 재영이와 같이 놀 때는 누군가의 선생님, 동료 교사가 아닌 그냥 나로 즐길 수 있어서 좋았다. 마치 2년 전 몽골로 돌아간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