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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국어 교원 Apr 05. 2022

베트남을 달군 축구 열기

2018년 후에 세종학당 2학기

2018년 1월 베트남은 아주 뜨거웠다. 박항서 감독이 이끄는 베트남 축구대표팀이 AFC(아시아 축구 연맹) U-23 축구 선수권 대회에서 베트남 축구 역사상 첫 AFC 주관 대회 결승 진출이라는 엄청난 업적을 달성했기 때문이다. 베트남은 축구에 관심이 많은 나라지만 국제 대회에서 축구 성적은 매우 좋지 않았다. 그런데 결승 진출이라니, 이건 베트남 국민들에게 아주 큰 선물이었다. 베트남 전국이 축구 응원 열기로 불탔다. 2018년 1월에 나는 비자 연장을 할 겸 휴가를 쓰기 위해 한국에 있었지만 열광의 도가니에 빠진 베트남 분위기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한국 언론에서도 연일 베트남 축구 소식과 현지 응원 상황을 다루었기 때문도 있지만, 학생들의 SNS에 축구에 관련된 것만 계속해서 올라왔기 때문이다. 박항서 감독과 한국에 감사를 표하는 글, 대표팀을 응원하는 글, 거리 응원을 하는 영상과 사진들... 정말 신기했다. 한류가 아닌 축구로 한국에 대한 이미지를 이렇게나 끌어올릴 수 있다니. 그것도 한 사람의 힘으로.


한국에서 베트남 대 우즈베키스탄의 결승전을 보며 나도 진심으로 응원했다. 갑자기 내린 폭설에도 결의에 찬 눈빛으로 최선을 다하는 베트남 선수들을 보니 가슴이 뭉클해졌다. 상대팀인 우즈베키스탄은 눈에 익숙한 나라지만 베트남은 최북단 지역을 제외하고는 눈을 볼 수가 없는 나라이다. 생전 처음 보는 눈인데 게다가 폭설이다. 그 속에서 그들은 비록 졌지만 우즈베키스탄을 상대로 쟁쟁한 경기를 펼쳤고 1:2로 경기를 마무리지었다. 박항서 감독은 베트남의 영웅이 되었다. 베트남에서 박항서 감독의 위치는 마치 2002년 한국에서 거스 히딩크 감독과 비슷했다.


베트남에서 축구 영웅이 된 박항서 감독님(출처: 연합뉴스)


박항서 감독의 마법은 계속 이어졌다.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 게임 4강 진출, AFF 스즈키컵(동남아시아 축구 연맹 선수권 대회) 우승이라는 엄청난 결과를 만들어 낸 것이다. 베트남의 분위기는 완전 한국의 2002년 월드컵 때와 똑같았다. 2월에 베트남에 돌아갔을 때 붉은 옷을 입고 떼를 지어 축구를 응원하는 베트남 사람들을 보며 2002년의 분위기가 생각 나 그립기도 하고 반갑기도 했다. 나는 사실 축구를 포함한 스포츠에 관심이 없다. 내가 축구 경기를 재미있게 본 것은 2002년 월드컵이 마지막이었다. 축구가 재미있었다기보다는 축구를 보며 사람들과 그 분위기를 즐기는 것이 좋았다.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은 대부분 여자들이었는데, 이 학생들도 AFC U-23경기 전에는 축구에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2018년 1학기 수업을 할 때 학생들은 나한테 이렇게 말했다.


"베트남 축구 보셨어요?"

"선생님 박항서 알아요? đạo diễn(감독) 이거 한국어로 뭐예요?"

"박항서 감독 만나 봤어요? 후에에 오셨어요!"


박항서 매직은 이렇게 축구에 관심이 없는 학생들도 축구에 열광하게 만들었다. 나는 박항서 감독이 후에에 오셨다는 것도 몰랐고 알았다고 해도 굳이 가지는 않았겠지만 만약 만나게 된다면 베트남에 사는 한국 사람으로서, 한국어 교원으로서 진심으로 감사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었다. 박항서 감독 덕분에 한국과 베트남의 교류가 더 많아지면 한국어 교원들의 일자리도 더 많아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2018년 6월 러시아 월드컵이 시작되었다. 술집마다 실내와 실외에 커다란 티브이가 생겼다. 베트남 술집들은 월드컵을 포함해 국제 축구 경기를 하는 기간에 이렇게 티브이를 설치했다. 축구 경기가 시작되면 수많은 남자들이 티브이 앞에 앉거나 서서 뚫어지게 경기를 시청했다. 러시아 월드컵 때 후에의 여행자 거리는 축구 경기를 보는 사람들만 가득한 거 같았다. 베트남이 월드컵에 진출한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축구를 집중해서 볼까, 정말로 축구를 좋아해서 그런 건가 싶어 학생들에게 수업 시간에 말했다.


"베트남 사람들은 정말로 축구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 베트남 축구 경기도 아닌데 술집에서 다 같이 보네요. 한국 사람들도 축구를 좋아하지만 이 정도는 아니에요."


그러자 학생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학생들은 조금 민망해진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베트남 사람들이 축구를 좋아하기는 해요. 그런데 그래서 보는 거 아닐 거예요."

"네? 그럼 왜 보는 거예요?"

"토토예요. 남자들이 월드컵 때 그걸 많이 해서 문제예요."


토토가 뭘까 잠깐 생각했다. 아, 스포츠 토토! 학생들은 남자들이 토토를 많이 하는데 이게 꽤 심각하다고 했다. 스포츠 도박에 거의 전 재산을 쓴 사람도 많다고 했다. 심지어 경기가 끝나고 자살하는 사람도 말이다...

가게 앞에서 긴장한 표정으로 축구 경기를 보며, 골을 넣을 때마다 환호하는 모습을 보고 축구가 좋아서 그런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니 안타까웠다.


가게마다 이런 티브이가 새로 설치가 되었다.


하지만 베트남 사람들은 한국이 나온 경기는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한국을 응원하는 것 같았다. 한국이 경기를 할 때는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한국을 응원했다. 모인 사람들도 다른 경기 때보다 훨씬 많았다. 정작 한국 사람인 나는 한국 경기에 관심이 없었는데 베트남 사람들은 한국 경기에 엄청난 관심을 보였다. 거리에는 금성 홍기(베트남 국기) 옷을 입고 오토바이를 타고 시내를 질주하며 한국 대표팀을 응원하는 무리들도 많이 보였다.


2018년 러시아 월드컵에서 한국은 조별 예선 탈락을 했다. 그리고 월드컵 마지막 경기로 독일과 승부를 보게 되었다. 마지막 경기라니 술집에서 경기를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응원 현장의 분위기를 몸소 느끼고 싶었다. 그래서 전에 몇 번 가 본 DMZ 술집에 코이카 선생님과 같이 가서 경기를 보기로 했다. 술집에 가니 역시 외부에도 티브이가 있고 내부 2층에도 전에는 본 적이 없던 대형 티브이가 있었다. 티브이 앞에는 마치 교실처럼 식탁과 의자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남은 공간들도 다 의자로 빽빽하게 채워져 있었다. 도착하자마자 좋은 자리에 앉으려고 했는데 점원이 아직 못 앉는다고 해서 기다렸다. 앉을 수 있는 시간이 되자 사람들이 빠르게 채워졌다. 발 디딜 곳이 없을 정도였다. 우리는 다행히 일찍 간 편이라 구경하기도 좋고 상도 있는 좋은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우리는 한국 대 독일 경기를 보며 맥주와 피자 등 안주를 먹었다. 전반전은 0:0으로 끝났다. 후반전이 시작되고 몇 분이 지났지만 여전히 양 팀 모두 득점이 없었다. 주변 사람들은 한국을 응원하며 한국이 골을 넣으려고 할 때마다 흥분했고, 실패하면 탄식했고, 골키퍼 조현우 선수가 독일의 공격을 멋있게 막아낼 때마다 일어서서 손뼉 치며 환호했다. 비록 한국이 계속 골은 넣지 못했지만 나와 코이카 선생님은 이런 분위기를 즐기기 위해 온 것이었기 때문에 만족했다. 후반전에서도 골을 넣을 가망이 없어 보여 우리는 너무 늦기 전에 집으로 돌아왔다. 아무리 후에 치안이 안전한 편이라고 해도 밤늦게 돌아다니는 건 피하고 싶었고, 사람이 너무 많아서 경기가 끝나고 택시를 잡으면 안 잡힐 것 같기도 해서였다.


집에 와서 잘 준비를 하는데 밖에 시끄럽다. 떼를 지어 울리는, 일정한 박자를 맞춘 오토바이 경적 소리와 소리와 환호 소리가 갑자기 울렸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도 끊이질 않았다. 인터넷 뉴스를 보니 세상에, 한국이 독일을 이겼단다. 그것도 후반전 추가 시간 6분 때 2:0으로! 축구 강국 독일을 상대로 이길 거라고는 전혀 생각 못했는데 이기다니! 밖에서 그 기쁨을 사람들과 같이 나눴으면 얼마나 재미있었을까. DMZ에서 조금 더 자리를 지킬걸 하는 아쉬움과, 한국이 이기는 것까지 봤으면 정말 집에 오기 힘들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던 밤이었다.


술집에서 맥주를 마시며 축구 경기를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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