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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국어 교원 Mar 02. 2021

실패한 코이카의 꿈

2) 세종학당 파견 교원이 되기 전까지

“우리 자기 나라에서 유명한 노래 가르쳐 주자!”
    

2011년 대학교 2학년 때, 국제워크캠프 프로그램으로 이탈리아의 ‘모길라제(Mogliazze)’라는 한 시골 마을에 봉사활동을 갔을 때였다. 리더였던 이탈리아 친구 유리(Yuri)가 자신들의 나라에서 유명한 노래를 서로에게 가르쳐 주자는 제안을 했다. 순간 나는 당황했다. ‘한국에서 유명한 노래가 뭐가 있지?’ 그것도 외국인 친구들이 쉽게 따라 할 수 있는 노래. 아무리 생각해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다른 친구들은 간단한 멜로디와 가사를 술술 잘 가르쳐 줬는데, 나는 부끄럽게도 애국가를 불렀다. 애국가가 부끄러운 노래는 아니었지만, 신나고 활기찬 분위기에 어울리는 멜로디가 아니었고 외국 친구들이 잘 따라 부를 수 있는 한국 노래가 생각나지 않아 그냥 생각나는 노래를 부른 것이기 때문이었다. 전공이 국어국문과였기에 더 부끄러웠다. 이런 일을 겪은 후에 나는 한국에 돌아와서 ‘나중에 외국 친구들을 사귀면 우리나라 문화를 재미있게 그리고 잘 알려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 일은 나에게 조금 후회되는 기억으로 남았다. 


대학교 4학년 때 전공 수업으로 ‘외국어로서의 한국어 교수법’ 수업을 들었다. 수업을 들으며 2년 전 이탈리아에서의 일이 생각났다. ‘한국어 교사’라는 직업이 있다는 걸 4학년이 되어서야 안 것이 후회됨과 동시에 ‘외국인들에게 한국 문화를 잘 알려 주고 싶다’는 마음의 불씨가 생겼다. 그 이후로 나는 한국어교원양성과정을 들으며 한국어교육능력검정 시험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세종학당 우수학습자 초청 한국문화 연수회’가 시작하기 전인 9월 28일, 나는 한국어교육능력검정 3급 필기시험을 봤다. 1년에 한 번 있는 시험이라 떨어지면 1년을 기다려야 했기 때문에 시험을 준비하기 시작한 7월부터 3개월간 정말 온 힘을 다해서 공부했다. 시험 당일, 대전역에서 택시를 타고 시험장까지 갔는데 택시 기사님이 나에게 시험을 잘 보라고 커피 맛 사탕을 두 개 주셨다. 기사님이 베푸신 사소한 온정 덕분인지 시험장에 가서는 긴장이 사라졌고, 시험이 끝나고 가채점을 해 보니 합격점 이상이 나왔다. 답을 마킹할 때 실수만 안 했으면 합격이었다.


세종학당 행사가 무사히 끝나고 필기시험 결과가 나오길 기다리는 시간은 길지 않았다. 행사는 끝났어도 마음은 여전히 거기에 남아 있어서, 페이스북으로 계속 사진을 올리고 이야기를 나누느라 정신없었기 때문이다. 또 기말고사를 준비하느라 정신없기도 했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나니 필기시험 결과가 나왔다. 184점으로 합격이었다.


페이스북과 카카오톡으로 필기시험에 통과한 것을 알리자 세종학당재단 행사 때 같이 자원봉사했던 동료들과 세종학당 학습자들이 아낌없이 축하를 해 주었다. 그래서 그런지 면접은 필기시험보다 쉽게 통과할 것 같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들었다. 그런데... 면접장에 들어가자 아는 것도 기억이 안 나고 말도 더듬고 질문에 대답도 잘 못했다. 아, 이번 연도는 망쳤구나. 난 왜 이렇게 바보 같을까. 시험이 끝나고 속상해서 싫어하는 소주도 마셨다. 그리고 면접 결과 발표 날까지 계속 비 오는 날쳐럼 축 쳐져서 지냈다. 그런데 웬걸? 면접시험에 당당히 합격했다! 너무 기뻐서 방방 뛰어다닐 정도였다. 


좋은 소식은 하나 더 있었다. 세종학당에서 자원봉사했던 경험을 ‘디지털서울문화대학교  한국어 교육수기 대회’에 공모했는데, 입선으로 상을 탄 것이다. 비록 제일 낮은 단계인 입선이었지만 내 소중한 추억이 인정을 받은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이제 한국어 교사로서 정식으로 출발한 준비를 마쳤다. 나는 꾸준히 한국어 교육을 공부하며 내가 지원할 수 있는 곳이면 모두 지원해보려고 했다. 그러나 현실은 쉽지 않았다. 어딜 가나 경력 있는 신입을 원하는 시대였다. 한국어 교육 또한 마찬가지였다. 심지어는 자원봉사도 경력자를 뽑았다. 하루 종일 한국어 교육 관련 카페와 채용 사이트를 쳐다보고 공고가 나오면 무조건 지원서를 제출했지만, 경력이 조금도 없는 사회초년생인 나에게는 서류 통과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2013년 12월, 90기 KOICA(한국국제협력단) 해외봉사단을 뽑는 공고가 나와서 ‘그래, 지원자가 많으니 여기도 힘들겠지만 그래도 도전은 해 보자’는 마음으로 지원을 했다. 그런데 운이 좋게도 서류 통과에 면접까지 통과해 버렸다! 코이카는 면접을 통과한다고 해서 최종 합격이 아니고 신체검사까지 해야 하고, 신체검사에서 아무 이상이 없어도 최종 선발 인원에 맞게 뽑기 때문에 탈락할 수 있었다. 


그러나 김칫국을 사발째로 들이킨 나는 면접을 통과했을 때 몸은 한국 청주에 있어도 마음은 이미 해외로 파견을 나가 버려서, 해외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그리고 한국어를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하루 종일 고민했다. 그리고 합격해서 국내 교육을 받고 파견 준비를 하면 여행할 시간이 없으니까 친구와 함께 제주도 여행을 가기도 했다. 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설레발을 너무 쳐 버려서 그런지 최종 결과에서 ‘불합격’을 받았을 때 좌절감은 면접을 망쳤다고 생각했을 때보다 몇 배로 다가왔다. 혹시 몰라서 코이카를 준비할 때도 지원했던 일자리는 여전히 서류 통과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좋은 경험을 했다고 생각하고 좌절감을 떨쳐버리고, 그래도 현실은 살아야 했기에 한국어 교사가 아닌 다른 일도 지원하기 시작했다.



* 한국국제협력단(KOICA. Korea International Cooperation Agency) : 대한민국의 대외 무상 협력 사업을 주관하는 외교부 산하 위탁집행형 준정부기관(출처: 위키백과). 코로나19 이전까지 매년 개발도상국에 기술, 의료, 교육 등 여러 분야의 자원봉사단을 파견 보냈다. (https://kov.koica.go.kr/ho/main.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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