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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국어 교원 Mar 04. 2021

거리 모금가, 그리고 다시 코이카

2. 세종학당 파견교원이 되기 전까지


2014년 3월, 코이카의 꿈과 한국어 교사의 꿈을 잠시 접고 하루 종일 채용 사이트를 검색하며 구직활동을 하고 있을 때였다. 약 2개월간 코이카 해외봉사단을 준비하는 동안 국제 개발 협력에 관심이 생겨서 구직 활동도 NGO, 국제 원조 분야 중심으로 했다. 하지만 내가 들어가고 싶었던 비정부기구, 국제 원조 기구 역시 한국어 교육 직종처럼 경력 있는 신입을 원했다. 힘들고 돈을 못 벌어도 일단 경력을 쌓을 수 있는 일을 찾자 다짐하며 일을 찾다가 ‘거리 모금가’라는 일을 찾게 되었다. 딱 ‘돈도 못 벌고 일은 힘들어도 경력은 쌓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그렇게 나는 한 비영리기구 홍보 대행업체에서 거리 모금가로 활동하게 되었다. 내가 홍보를 담당한 기구는 *유엔난민기구(UNHCR)였다.


유엔난민기구 홍보 대사 안젤리나 졸리(출처: 유엔난민기구 홈페이지)


거리 모금가는 말 그대로 거리에서 담당하는 비영리단체를 홍보하며 모금을 하는 사람이다. 단, 현금을 받는 게 아니라 정기 후원을 받는다. 우리의 일과는 이랬다. 사무실에서 간단한 회의를 하거나 교육을 받은 후에 점심을 먹고 유니폼을 입고 지정된 장소로 홍보 도구, 후원 약정서를 챙겨 간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저녁 6시까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홍보를 하고 후원을 부탁한다. 수백 수천 명이 우리를 지나쳐 간다. 일부의 부담스러운 눈빛, 혹은 좋은 일 하는 사람들을 그냥 지나친다는 죄송한 눈빛, 그리고 다수의 무덤덤한 눈빛을 받으며 그러나 미소를 유지하며 끊임없이 홍보한다. 그러다가 운이 좋으면 하루에 두세 명 정도 후원을 받는다. 후원을 받으면 항상 후원자에게 후원을 결심한 이유를 물어본다. 다양한 사람들이 있듯 후원을 하는 이유도 다양했다.


“평소에 관심이 있었는데 사는 게 바빠서 못했어요.”

“우리나라도 옛날에 원조를 받았으니까요.”

“TV에 나오는 광고를 보고 돕고 싶다고 생각했었어요.”

“이미 아동 결연을 하고 있는데 여기는 난민 돕는 거니까 또 할게요.”

“저도 어렸을 때 너무 힘들게 살아서 어려운 사람 심정을 알아요. 조금이라도 먹고 살 만큼 돈을 벌면 남 돕는 일에 쓰겠다고 다짐했었어요.”

“제가 진짜 가난해서 힘들거든요. 그래서 돈 없으면 힘든 걸 누구보다도 잘 알아요.”


수많은 후원자들이 있었지만,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후원자가 있다. 나는 유엔난민기구에 관심을 보이는 한 중년의 시민에게 유엔난민기구에 대해 짧게 설명하고 후원을 부탁드린다고 했다. 그러자 그분은 일말의 고민 없이 바로 후원 약정서를 써 주셨다. 그분께 감사하다고 인사드리며 ‘후원을 결심하시게 된 이유를 여쭤봐도 될까요?’라며 형식적인 질문을 했다. 그러자 그분은 바로 후원을 결정하신 것과 달리 머뭇거리며 뜸을 들으셨다. 그리고 간신히 한 마디 뱉으셨다.


“제가 가족이 없어요...”


나는 당황해서 뭐라고 말을 받아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했고, 그분은 몇 초 가만히 계시다가 자리를 뜨셨다. ‘가족이 없다’는 말에 얼마나 많은 말들이 함축되어 있을까. 그 한 마디는 얼마나 많은 고통과 설움과 슬픔이 뭉친 덩어리인가. 나는 단지 5분 동안만 이야기를 나누었을 뿐인 중년 남성이 어떤 삶을 살아왔을지 단지 그 한 마디로 짐작할 수 있었다. 이렇게 힘든 상황에도 자기보다 더 힘든 사람 혹은 자기와 같이 힘든 사람을 위해 선뜻 선의를 베푸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도 우리 주변에 꽤 많이.


거리 모금가로 활동하면서 정신적으로 신체적으로 많이 힘들었다. 쉴 새 없이 지나가는 시민에게 말을 걸어야 하고 목이 아팠고 계속 서 있어야 해서 다리가 아팠다. 가끔 몇몇 나쁜 사람들에게 멸시가 담긴 말을 들으며 마음이 상했고, 후원 유치를 하나도 못하는 날이 많아지며 스스로 무능력하다는 생각에 자존감이 무너졌다. 그러나 거리 모금가로 활동하며 점점 커지는 것도 있었다. 나도 후원자들처럼 남을 돕는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 후원자들은 대부분 이미 다른 곳에도 후원을 하고 있거나 봉사 경험이 많았다. 그에 비해 나는 돈이 없다고 정기 후원도 안 하고 봉사 경험도 없었다. ‘나도 이분들처럼 봉사하고 싶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선뜻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사람이 되고 싶다.’ 이런 생각은 몸과 마음이 너무 힘들어서 거리 모금가 활동을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과 동시에 커져 갔다.


그렇게 힘들었지만 힘들었던 만큼 값진 경험을 했다고 생각하고 일을 그만둔 2014년 여름, 나는 다시 코이카의 꿈에 도전했다. 2013년 말에는 한국어 교육 경력을 쌓고 싶어서, 즉 국제 원조라는 코이카의 원래 목표와는 다른 개인적인 목표로 코이카 해외봉사단에 도전했지만, 이번에는 ‘사회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봉사를 하고 싶어서’ 도전을 결심했다. 그래서일까? 나는 한국어 교육 봉사단원으로 당당히 합격했고 드넓은 초원과 사막이 펼쳐진 나라 ‘몽골’로 파견을 가게 되었다. 그렇게 한국어 교사로서의 첫 시작을 몽골에서 시작했다.


코이카 단원 시절 갔던 몽골 고비 사막. 언젠가 다시 한번 갈 수 있을까?






*유엔난민기구:  United Nations High Commissioner for Refugees. 각국 정부나 유엔의 요청으로 난민들을 보호하고 돕기 위해 설립된 유엔 산하 기구이다. 1950년 12월 14일 스위스 제네바에 설립되었다. 1954년과 1981년 두 차례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출처: 위키백과)



표지 이미지 : 거리 모금 활동을 하고 있는 유엔난민기구 친선대사 정우성(출처: 유엔난민기구 네이버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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