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국어 교원 Mar 07. 2021

25살, 몽골의 한국어 교수님

2. 세종학당 파견 교원이 되기 전까지

“다 포기하고 한국으로 가고 싶어요.” “지금 가면 너만 손해야. 그냥 버텨.”


2014년 11월, 나는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 한가운데에 있는 ‘몽골국립교육대학교(Монгол Улсын Боловсролын Их Сургууль)’ 코이카 한국어교육 봉사단원으로 파견 갔다. 몽골국립교육대학교는 줄여서 보통 모비스(МУБИС)라고 불렸다. 모비스는 몽골의 초·중·고등학교 교사를 양성하는 대학교이다. 모비스를 졸업한 학생들은 몽골 교육부에서 주관하는 시험을 보고, 그 시험에 합격하면 교사 자격증을 취득한다.

이제는 그리운 몽골국립교육대학교

     

나는 이곳에서 동양어문학부 한국어교육학과 대학생들에게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가르쳤다. 내가 담당한 과목은 한국어 말하기 · 어휘학 · 나라학(한국학) · 한국어 문법 · 음성학 · 한국어 발음 · 한국어 듣기였다. 25살 어리다면 어린 나이에 졸지에 나와 나이 차이도 별로 안 나는 학생들에게 ‘교수님’ 소리를 들었다.


해외에서 혼자 생활하는 것도 처음, 한국어 교육도 처음이었던 나에게 몽골에서의 생활은 부담 자체였다. 물론 몽골에서 좋은 기억들도 많이 있었고, 시간이 지나고 생각해 보니 당시에는 힘들었던 일도 뒤돌아보면 추억이었던 것들도 많았다. 하지만 그때 나는 때때로 몽골의 매서운 추위가 약한 나를 채찍질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초보 교사였던 만큼 노력도 많이 했다. 주변 한국어 교육 봉사단원들에게 계속 조언을 부탁했으며, 인터넷이든 현지에서든 한국어교육과 관련된 자료라면 무조건 수집했다. 주말에도 새벽에도 내가 가르칠 교재를 연구하고 교수 학습 계획안을 만들었다. 수업이 끝나면 학교에 있는 참고 한국어 교재를 보며 수업 자료를 연구했다. <최고의 교사는 어떻게 가르치는가>(더그 레모브 지음. 해냄출판사) 등의 책을 보며 교사로서의 좋은 태도가 무엇인지도 공부했다. 또, 외국어를 배우는 학생의 입장도 이해하고, 어떻게 하면 외국어를 잘 가르칠 수 있는지 배우기 위해 몽골어 학원도 꾸준히 다녔다.


이렇게 노력했는데도 나는 항상 부족한 교사였다. 수업을 하기 전에 항상 긴장했으며 학생들 수준에 맞지 않는 자료를 준비해서 애를 먹었고, 학생들의 질문에 대답을 못해 얼버무린 적도 있으며 효율적인 수업 운영도 학생들을 지도하는 방법도 서툴러 쩔쩔매었다. 가끔씩 전기가 나가서 아예 안 들어오거나 수업 시작 바로 전에 학교에서 학생들 일정을 잡아 수업이 취소되는 등 대처 못하는 상황은 덤이었다.


'어떻게 하면 더 쉽고 재미있게 설명할까? 같은 학년인데 수준이 너무 다르고 분반도 안 되는 상황에서 어떻게 수업을 해야 하는 거지? 내 생각에는 쉬운 과제인데 왜 어렵다고 할까? 수업 시간에 대놓고 유튜브로 동영상을 보는 학생은 어떻게 지도하지? 나보다 나이가 많은 학생이 나를 친구처럼 대하려고 하는데 그러지 말라고 어떻게 기분 나쁘지 않게 이야기하지? 학생들이 숙제를 너무 안 하는데 대체 뭐가 문제일까? 다른 교수님 수업에도 이렇게 지각 결석을 자주 하나? 나이가 어리고 외국인이라고 나를 너무 얕보나? 대부분 장학금이 없으면 자퇴를 해야 될 만큼 형편이 안 되는 학생들인데, 내가 주는 점수가 학생들의 장학금을 결정한다고? 그럼 성적이 나빠도 점수를 잘 줘야 하나?'

   

고민에 고민의 연속. 그러나 조금 더 나아지는 건 있어도 완전히 해결되는 건 없고 새로운 고민거리는 항상 생겨났다. 몽골이라는 낯선 나라에 적응하는 것도, 초보 교사인 데다가 나이도 어린데 대학교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것도, 모든 문제를 혼자서 헤쳐나가야 하는 것도 힘들었다. 하지만 이런 점들은 초보 교사가 극복해 나가야 할 과제였다. 나의 문제였기에 경력과 경험이 쌓이면 해결할 수 있고 결국엔 나를 더 발전하게 해 줄 과제였다.      

중도 귀국을 하고 싶을 정도로 나를 힘들게 한건 내가 노력해도 해결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생각한 봉사활동과는 너무 다른 봉사활동, 그리고 내가 바꿀 수 없는 문제. 파견 6개월 후 나는 이대로라면 남은 파견 기간을 버티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다른 기관에서 일하는 선배 코이카 단원에게 중도 귀국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선배 단원은 나를 위로해 주며 이렇게 말했다.

     

“지금 귀국해 봐야 너만 손해야. 중도 귀국했다는 경력은 흠만 되는 경력이야. 힘들어도 2년 버티고 돌아가야 어디든 취업할 수 있어. 그냥 경력 때문에 버틴다고 생각해.”


그렇게 나는 남은 1년 6개월을 ‘버틴다’는 생각으로 지내기로 했다. 하지만 당연히 내가 맡은 일에는 최선을 다하려고 했다. 누구에게 싫은 소리 하는 걸 두려워했던 나였지만 학생들을 혼내야 하는 상황에서는 냉정하게 혼을 냈다. 수업 시간에 태도가 불량한 학생을 내쫓기도 했고, 학생들과 상담하는 시간도 자주 잡았다. 수준이 낮아 수업에 따라오기 힘들어하는 학생들을 위해 수업이 끝나고 특별 수업반을 매 학기마다 만들었고, 토픽을 준비하는 학생들을 위해 토픽 준비반도 운영했다. 한국어 관련 대회가 있으면 주말이든 평일 저녁이든 학생들과 함께 학교에서 대회를 준비했고, 내가 모르는 것을 물어보면 학생에게 ‘더 정확하고 쉽게 설명할 수 있게 시간을 달라’고 말한 다음 집에 가서 연구하고 설명했다. 봉사 단원이지만 기관에서 수업을 제일 많이 맡았으면서, 그것에 불만을 가지기보다 수업을 많이 할수록 실력이 늘 것이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그렇게 버티며 지내다 스승의 날이 되었다. 이날 받은 한 장의 편지로 인해  나는 봉사 단원 임기가 끝나고 나서도 계속 한국어 교사로 일하기로 마음먹었다.


(좌) 한국어 연극대회. 우린 장려상을 받았다. /(우) 퀴즈 온 코리아 예선 대회. 비록 예선 통과는 못했지만 준비하는 동안 즐거웠다.
학생들과 했던 문화 수업. 김밥 만들기와 부채 만들기
(좌) 1학년 수업 시작에 찰칵 / (우) 열심히 공부하는 특별 수업반 학생들. 이들은 지금 한국어 선생님이 되어 초중고등학교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