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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국어 교원 Nov 21. 2022

딸을 계속 해외로 보내는 엄마의 마음

2022년 문화원 세종학당 2학기

"그냥 한국에서 일해, 응? 뭐 하러 외국까지 나가? 도서관 인턴 합격했다며."


2014년 여름, 코이카 해외봉사단원에 합격하여 몽골로 파견이 확정되었을 때 엄마가 말했다. 코이카를 지원하면서 떨어질 것을 대비해 모교 도서관 인턴 자리에 지원했었는데 코이카 합격 발표 전에 인턴에도 합격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 플랜 B였을 뿐, 나한테 1순위는 코이카 파견이었다. 아빠는 "네가 원한다면 가야지"라고 했지만 엄마는 아니었다. 25살이었고 서울에서 혼자 자취한 경험도 있는데 엄마한테 나는 아직 품 안의 자식이었나 보다. 코이카 파견을 가려면 가족들의 동의서를 받아야 했는데, 미혼인 나는 부모님 두 분한테 동의서를 받아야 했다. 아빠는 흔쾌히 사인을 했지만 엄마는 펜을 잡고도 선뜻 사인을 못했다.


"정말 사인하기 싫다. 너 진짜 가야겠니? 다시 한번 생각해 봐. 떨어져 있어도 같은 나라에 있는 게 낫지!"

"내가 몇 번이나 말했잖아. 이미 결정했고, 바꿀 수 없어."

"이미 얘기 끝날 걸 왜 미적거려. 애가 고 싶다는 데 빨리 써."


엄마는 나와 아빠의 재촉에 정말 하기 싫다는 말을 반복하며 울상을 지으며 사인을 했다. 두 달 간의 국내 교육이 끝나고 또 3주의 시간이 지난 11월 5일 몽골로 출국하는 날, 부모님과 같이 인천 공항으로 갔다. 부모님은 나한테 봉투를 내밀었다. 엄마와 아빠가 쓴 편지였다. 편지에는 해외로 일하러 가는 딸에 대한 걱정과 사랑이 꾹꾹 담겨 있었다. 엄마한테는 어렸을 적부터 편지를 받은 적이 몇 번 있지만, 아빠한테는 처음이어서 더 감동을 받았다. 엄마는 편지에 나한테 잘 갔다 오라고 썼지만 정작 공항에서는 내 손을 잡고 기도를 하며 펑펑 우셨다. 그리고 출국 게이트에서 어쩔 수 없이 손을 놔야 할 때가 될 때까지 손을 놓지 못하셨다. 그런 엄마를 보니 나도 눈물이 나왔다.


2015년 여름, 부모님이 몽골 울란바타르에 놀러 오셨다. 울란바토르 근교 국립공원인 테를지에서 게르(몽골 전통 이동식 집) 캠핑도 하고 말도 타고, 울란바토르에 있는 우리 집에서도 시간을 보내며 행복한 3박 4일을 보냈다. 부모님이 한국으로 돌아가실 때 나는 징징거리며 말했다.


"엄마 아빠 여기서 나랑 같이 살면 안 돼요? 나 힘들어서 엄마 아빠랑 살고 싶어."


힘들다는 건 진담, 같이 살자는 건 농담. 아빠는 "네가 우리 여 살릴 수 있어?"라고 웃으며 받아쳤지만, 엄마는 투정 부리려고 한 말에 울적해졌다. 나를 두고 우리만 어떻게 가냐며 계속 나를 어루만졌고, 공항에서 헤어질 때는 정말 펑펑 울며 가셨다. 아빠가 없었으면 정말 몽골을 못 떠났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 2016년 12월, 몽골에서 귀국하고 세종학당재단 2017년 상반기 파견 교원에 최종 합격했다. 파견지는 베트남 후에 세종학당! 듣기로는 세종학당 파견 교원이 한국어 교육계에서 대우가 좋은 편인 대신 경쟁률이 높다는데, 나는 한국어교원자격증도 3급인 데다가(한국어교원자격증은 3급부터 1급까지 있다.) 경력도 코이카 경력밖에 없어 합격하기 못할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합격하다니! 나는 방방 뛰며 가족들에게 합격 소식을 전했다. 가족들도 엄청 기뻐해 줬다. 단 한 사람만 빼고.


"왜 또 나가 그냥 한국에 있지! 어이구 참냐, 국내에는 그렇게 일자리가 없니?"


엄마는 몽골 파견 때처럼 울지는 않았지만 또 인상을 구기며 분위기를 꺾었다. 나는 화가 났다. 내가 해외로만 다니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라 국내에서는 3급 자격증으로는 취업이 어렵다고, 그리고 세종학당 파견은 옛날부터 원했던 거라고 했었는데! 낮은 스펙으로 합격한 걸 축하하지는 못할망정 저렇게밖에 말 못 해주나 싶었다. 그래서 엄마와 잠깐 다투기도 했지만 결국 엄마는 내 두 번째 해외 파견을 응원해 줬다. 마지못해, 어쩔 수 없이 한다는 듯이 말이다.


2017년 추석, 부모님이 후에에 오셨다. 나를 보러 온 거지만 이번에는 자유 여행이 아닌 다낭- 후에 패키지여행을 예약해서 오셨다. 내가 추석 때도 수업을 해야 돼서 휴가를 쓰지 못하는 탓이었다. 그래서 패키지여행 일정 중 후에에 있는 동안 호텔에서만 봤지만, 엄마 아빠가 묵는 호텔을 나도 예약해서 짧은 시간이나마 같이 즐겼다.


"딸이 해외에 있으니까 딸 덕에 이렇게 해외여행도 다녀 보네~"

"에이, 누가 들으면 내가 돈 쓴 줄 알겠다. 엄마 아빠 돈으로 왔으면서."

"그래도 네가 해외에 있으니까 이렇게 다니는 거지 없으면 너네 아빠가 해외여행을 할 생각이나 하겠니?"


아빠는 해외여행을 별로 안 좋아하신다. 평소 엄마가 아빠한테 많이 의존을 하는 편인데 해외 나가면 더 챙겨야 할 게 많아서 피곤하단다. 그리고 본인이 직접 인정한 적은 없지만, 사소한 점에서도 걱정 불안을 많이 하는 아빠 성격아마도 비행기 타는 걸 무서워하시는 것 같다. 아무튼, 후에에서 헤어질 때 엄마는 아쉬워하긴 했지만 내가 몽골에서보다 잘 지내는 것 같아 다행이라며 울지 않고 헤어졌다.


베트남 후에에서 귀국하고 2년 후인 2020년 12월, 나는 다시 2021년 상반기 세종학당재단 파견 교원에 합격하여 베트남 하노이에 있는 한국문화원으로 파견이 확정되었다. 이번에는 덤덤하게 합격 소식을 전했다. 근데 엄마의 반응도 덤덤했다.


"나 하노이로 가게 됐어."

"그래? 축하해~"

"? 엄마 이번에는 반대 안 해요?"

"반대를 왜 해."

"몽골 때랑 후에 때는 반대했었잖아."

"참냐, 내가 반대하면 네가 안 가니?"

"아니지."

"것 봐. 어차피 갈 거면서 뭐. 잘 살고 왔으니까 이번에도 잘 살고 오겠지. 그리고 니 인생 네가 사는 거지 내가 사니."


헐! 몽골 파견 때는 울고, 후에 파견 때는 아쉬워하더니 이번에는 완전 쿨(cool)하다! 후에 파견 때처럼 안 다퉈서 좋긴 한데 섭섭하다! 이제 정말로 다 큰 자식이라는 건가? 이번에는 내가 반대로 엄마한테 반대해 달라고 투정을 부렸다.


"나 걱정되지 않아? 반대해 줘."

"뭐래."


2022년 8월, 이번에도 부모님께서는 하노이에 놀러 오셨다. 우리는 하노이에서 2박, 닌빈에서 2박을 했다. 몽골과 후에에서는 부모님이 전적으로 돈을 다 내고 오셨지만 나도 이제 직장 생활 N년차, 비행기 값만 부모님 돈으로 하고 나머지 비용은 내가 거의 부담했다. 제대로 효도해 드리고 싶었다. 맛집도 알아보고 사전 탐방도 하고 여행 코스도 한 달 내내 고민하고. 덕분에 부모님은 아주 만족스러운 관광을 하고 가셨다. 특히 닌빈을 너무너무 좋아하셨다. 전망 좋은 고급 리조트, 닌빈의 신비스럽고 아름다운 섬들을 구경할 수 있는 보트 투어, 닌빈의 절경을 구경할 수 있는 항무아 산... 엄마 아빠는 최고의 여행이었다며 극찬을 하셨다. 여행 마지막 날, 엄마는 나한테 이렇게 말하셨다.


"얘, 다음에는 어디 갈 거니?"

"계획 없는데. 계약 끝나면 어학연수 잠깐 하고 한동안 한국에만 있을 건데. 왜요?"

"다음에는 유럽 가면 안 되니? 엄마 유럽 가고 싶은데."

"그냥 여행 가면 되잖아?"

"너 없으면 뭐 하러 가. 그리고 너네 아빠가 네가 있어야 같이 가잖아!"

"나 유럽 갈 생각 없어~"

"그럼 호찌민 가라, 호찌민도 궁금하다."

"엄마 뭐야. 몽골 갈 때 그렇게 울던 엄마 맞아?"

"그땐 그때지."

"몰라 나 섭섭해~ 엄마한테는 계속 어리게 보이고 싶단 말이야. 나 해외 파견 또 가면 반대해 줘요."

"싫어. 갈 거면 경치 좋은 데 가라고 할 거야."

 

나에 대한 엄마의 사랑은 8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지만 해외로 보낼 때의 마음과 태도는 변했다... 사람은 변하는 것이고 엄마도 변하는... 아니 난 엄마가 안 변했으면 좋겠는데! 엄마 말 안 듣고 마음대로 해외 파견 갔으면서 엄마가 나를 걱정하는 태도는 8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았으면 는 이중적이고 이기적인 마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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