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고급’ 한국어를 맡게 되었다. 7년 전 몽골에서 일할 때 정규 수업 이후 동아리 형식으로 고급 수업을 한 적이 있기는 하지만, 한 달 정도 짧게 했었고 학생도 3~4명만 왔었다. 중급의 마지막 단계는 몇 번 해 봤지만 정식으로 고급을 가르쳐 보는 건 이번 학기가 처음이다.
전 세계에는 200개가 넘는 세종학당이 있다. 나라마다 세종학당마다 특징은 모두 다르지만, 공통적인 특징은 몇 개 있다. 그중 하나는 중급 단계 이상의 수업이 잘 개설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세종학당 한국어 수업은 ‘취미’ 목적으로 한국어를 공부하는 학생들이 대상이라는 것이 큰 이유이다. 그러다 보니 초급까지만 공부해도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학습자들도 있고, 더 깊이 있는 공부를 하기 위해서나 세종학당 정규 과정에는 없는 한국어능력시험(TOPIK) 수업을 듣기 위해 다른 학원을 다니는 학생들도 있다. 내가 근무했었던 후에처럼 도시가 아닌 지역의 경우, 어느 정도 한국어를 공부하면 한국 회사에 취직해서 한국 회사가 있는 도시로 가기 때문에 세종학당을 그만두는 학생도 많다.
하지만 한국문화원의 경우 중급 단계 이상 수업이 꾸준하게 열리고 있다. 학생 수는 초급에 비해 적지만 다른 학당에 비해 많은 편이다. 더 특이한 것은 ‘고급’ 단계가 열린다는 것이다. 세종학당 정규 교재인 세종한국어 책은 중급 단계까지만 있다(이 글을 쓰기 한 달 전에 고급 단계 읽기, 쓰기 책이 나오긴 했다). 그런데 마지막 단계인 세종한국어 8권을 수료한 한국문화원 학생들이 문화원에서 계속 한국어를 배우기를 희망했다. 그래서 올해 상반기에도 고급 한국어 과정을 개설했었고 하반기인 이번 학기에도 개설했다. 상반기에는 원 선생님이 담당하셨지만 이번 학기에는 내가 담당하게 됐다.
고급 한국어 수업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고민이 많이 되었다. 그냥 대학 기관에서 만든 고급 단계 한국어 교재를 쓸 수도 있지만, 고급 학습자들은 이제까지 한국어 교재로만 수업을 들었다. 내가 학생이라면 몇 년 동안 한국어 교재로만 공부했으면 책 이외의 것으로도 공부해 보고 싶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교재를 사용하지 않고 내가 따로 자료를 준비하면 수업 연구부터 자료 만들기까지 시간이 좀 오래 걸리지만, 문화원에서의 마지막 학기인 만큼 조금은 틀에 벗어난 수업을 하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고민 끝에, 전체 15주 중에 7주 정도는 매주 다른 주제를 정해서 말하기와 쓰기 연습을 같이 하고 나머지 8주는 정규 수업 시간에는 다루지 못한 ‘특별한 주제의 수업’들을 하기로 했다. 먼저 주제를 정해서 말하기와 쓰기 연습을 하는 것은 OPIc 시험 방식을 따랐다. 나는 영어와 베트남어 OPIc 말하기 시험을 봤었다. 이 시험은 컴퓨터가 10개의 질문을 하는데, 시험 전에 수험자가 직업, 취미 생활 등 설문조사에 응답한다. 질문 중 8개는 수험자가 응답한 설문조사와 관련된 주제 중에 질문이 나오고 나머지 두 개는 돌발 질문이 나온다. 그래서 이 시험은 먼저 어떤 주제로 말을 할지 주제를 정해 놓고 작문을 한 다음 달달 외우는 방식으로 준비를 하는데, 영어와 베트남어 OPIc 준비를 할 때 나한테 익숙한 주제의 글을 쓰고 외우니 공부가 비교적 잘 되었고 기억에도 오래 남았었다. 그래서 고급 학생들도 이런 방식으로 공부를 하면 한국어가 더 기억에 오래 남지 않을까 싶어 7주 차까지는 ‘주제에 맞는 작문하고 말하기’ 수업을 하기로 했다. 수업 자료는 <한 번에 끝! OPIc 베트남어 고급> 책에 있는 한국어 표현들을 참고했다. 자기소개, 살고 있는 집, 여가 생활, 여행 경험 등 주제로 먼저 예시문을 보며 새 단어와 예시문에 나온 표현들을 가르쳤다. 그리고 학생들이 글을 쓸 때 바꿔서 쓸 수 있는 표현들을 가르친 후 작문하게 했다. 작문을 한 후에는 학생들이 작문한 내용을 바탕으로 질의응답을 했다.
“회사에서 한국어를 잘하면 혜택이 있다고 했는데, 정확히 어떤 혜택이 있어요?”
“저희 회사에서는 한국어 능력시험 5급에 합격한 직원들의 월급을 인상해 줘요. 저는 작년에 시험을 봤는데 합격을 못했어요. 제 동료는 합격해서 월급이 00% 인상됐는데 동료하고 월급 차이가 커서 아쉬워요.”
“여가 시간에 자전거를 탄다고 했는데, 자전거를 타면 어떤 점이 좋아요? 프린트에 있는 표현을 사용해서 말해 보세요.”
“자전거는 유산소 운동이에요. 유산소 운동을 하면 체중 감소를 할 수 있어서 심혈관 질병 예방도 되고 체력도 좋아져요.”
이렇게 7주 차까지 수업을 진행하고, 그다음부터는 내가 논문 검색 사이트에서 '고급 한국어 학습자' 키워드로 검색해서 찾아낸 주제들로 수업을 하기로 했다. 그런데 7주 차 수업 때 갑자기 '학생들이 원하는 수업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수업이 끝나고 물어봤다.
"여러분, 혹시 수업 시간에 배우고 싶은 게 있으면 말해 보세요."
"저는 한국의 관용어하고 속담을 배우고 싶어요."
"저는 경제와 관련된 거요."
"음... 혹시 한국문학 돼요, 선생님?"
의견이 다양하게 나왔다. 학생들한테 물어보길 잘한 것 같다. 배우고 싶은 것을 배우는 수업, 정말 좋지 않은가? 일단 8주 차에는 '반신반의', '일석이조', '동문서답' 등의 사자성어 수업을 했다. 그리고 9주 차에는 '경험'과 '체험', '모두'와 '다', '감정'과 '정서', '싸우다'와 '다투다' 등 뜻이 비슷해서 사용할 때 헷갈리는 단어들을 수업했다. 10주 차에는 학생이 요청한 관용어와 속담을 수업했다. 관용어와 속담은 '누리 세종학당' 사이트에 '진짜 한국어는 다르다'라는 제목으로 그림 자료가 올라와 있는데, 그것을 먼저 보여주고 무슨 뜻인지 추측해 보게 한 다음 설명하는 방법으로 수업했다.
이미지 출처 : 누리 세종학당
11주 차에는 한국 문화를 공부하고 싶다는 학생의 요청을 받아들여 '한국의 시'를 수업했다. 수업 자료를 준비하며 한국의 시를 다룬 다른 한국어 교재들도 살펴보고 논문도 살펴봤는데, 고민이 되는 것이 있었다. 그냥 한국의 시를 읽고 설명하며 문제를 푸는 방식으로 하면 재미가 없을 것 같았다. 시는 한국 사람들도 이해하기 어려운 주제가 아닌가. 문학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어렵게 느껴질 것이다. 그래서 그냥 '시'만 수업하는 게 아니라 다른 주제를 잡기로 했다.
내가 생각한 주제는 한국의 1940년대 시대 상황이었다.한국에서 가장 유명하고 한국인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시인 윤동주의 <서시>,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나왔으며 마찬가지로 유명하고 몇몇 한국어 교재에도 나온 이육사 시인의 <청포도>를 가르쳤다. 그리고 윤동주 시인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동주>와, 일제강점기 말 일제가 한글 사용을 탄압한 시기 한글과 한국어를 지키기 위해 '우리말 큰사전'을 편찬한 이야기를 담은 영화 <말모이>를 소개했다.영화를 보여 준 것은 아니고 유튜브에 나온 예고편과 짧은 영상 등을 보여주며 설명했다. <말모이>라는 영화를 소개한 이유는, 이육사와 윤동주 모두 1940년대 시기에 '한글'로 시를 썼는데 학생들은 한국인이 한글로 시를 쓴 게 뭐가 특별한지 모를 테니 그 시기는 한글과 한국어가 탄압을 받던 시기였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였다.
<동주>, <말모이> 포스터
수업 자료를 준비하며 우려되는 것이 있었다. 수업은 한국문화를 가르치는 차원에서 유명한 한국 시와 그 시의 역사적 배경을 소개하는 것이 중점인데, 혹시나 의도와 다르게 학생들에게 너무 민족주의적인, 그러니까 '일본이 이렇게 나빴고 한국인은 역경 속에서도 우리말과 글을 지켜 낸 훌륭한 민족이다'라는 느낌을 은연중에 주지는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수업 때도 수업의 원래 목적을 강조하기는 했는데 혹시 모를 일이다. 학생들이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기를 바란다.
또 하나 걱정된 것은 안 그래도 어려운 단어가 많은데 어휘에 함축적, 비유적 의미도 있어서 학생들이 너무 어려워하는 것이었다. 역시 수업 후에 학생들이 너무 어려웠다고 했다. 그래도 문학에 관심이 있는 학생은 집중했지만, 자신은 완전 '이과 스타일'이라며 문학과는 안 친하다고 한 학생들은 간신히 집중하는 듯했다. 하지만 내가 소개한 영화를 베트남어 자막으로 볼 수 있는 방법을 찾아서 보겠다고 했고(합법적인 방법으로 봤기를...), 수업 전에 하상욱 시인의 <서울 시>에 나온 시들을 몇 개 소개하며 시의 제목을 추측해 보는 활동을 했는데 그게 재미있었다고 했다.
12주 차에는 '경제'에 관련된 것을 공부하고 싶다는 학생의 요청을 반영해 경제 관련 신문기사 읽기 수업을 했다. 그냥 신문기사는 너무 어려우므로 조금 쉽게 편집을 했고, 한국과 베트남 모두 연관된 경제 관련 기사를 수업 자료로 썼다. 12주 차 수업이 끝난 후 주말, 고급 한국어반 학생 한 명이 나한테 메시지를 보냈다.
"선생님, 갑자기 생각났는데요, 혹시 시간이 있으면 '인간관계' 주제로 공부했으면 좋겠어요. 그냥 제 의견인데 시간이 안 되면 안 해도 돼요."
인간관계라... 좀 수업 준비하기 어려운 주제라서 고민은 되었지만 일단 알겠다고 했다.
13주 차에는 '대통령 취임사 활용한 고급 한국어 학습자 문화교육 방안'(김영준. 2017) 논문을 참고해서 수업을 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취임사를 짧게, 그리고 역시 몇몇 단어는 쉽게 바꿔 편집해서 읽고 현대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적 상황을 공부하는 활동을 한 후, 역대 대통령 몇 명의 취임사를 통해 그 당시 한국의 상황을 알아보는 읽기 겸 문화 수업을 했다.
그다음 14주 차에 학생이 요청한 '인간관계'에 대한 수업을 준비했는데, 마침 그때 세종학당재단에서 고급 학습자를 위한 읽기와 쓰기 교재를 개발해서 '누리-세종학당' 사이트에 책을 게재했다. 그리고 읽기 교재에 '인간관계'에 대한 단원이 있었다. 그래서 <세종학당 한국어 읽기> 책에 나온 자료와 내가 따로 준비한 '인간관계에 대한 명언'으로 수업 자료를 만들고, 추가로 인간관계 때문에 고민하는 사람에게 조언 글을 쓰는 활동을 했다.
15주차 마지막 수업은 <언어의 온도>였다. 언어의 온도 역시 <세종학당 한국어 읽기>에 나오는 것인데, 책의 서문이 읽기 자료에 있다. 거기 있는 지문과 문제를 쓰고 언어의 온도에 나온 '더 아픈 사람', '사내가 바다에 뛰어드는 이유' 에피소드를 읽기 자료로 추가했다.
이렇게 15주를 교재 없이 각기 다른 주제를 선정해 수업을 하는 방식이 좋은 방식일까? 학생들이 너무 어려워하거나 불편해하지 않았을까?수업이 다 끝난 지금도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수업 준비에는 최선을 다해서 개인적으로 아쉬움은 없다. 석사 논문을 썼을 때 못지않게 논문을 많이 읽어본 것 같다.
고급 한국어 수업은 다른 수업보다 준비 시간은 많이 걸렸지만 마음은 편했다.중급 수준 학생들까지는 내가 말할 때 '이 단어/문법 이 학생이 이해할 수 있나?더 쉽게 말해야 되나?' 하고 생각하고 말하게 되는데, 고급 수업을 할 때는 학생들과 비교적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고급 학습자를 가르칠 기회가 또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