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고. 벌써 며칠 째 이 높임말 때문에 진도를 못 나가고 있다. 아미르는 높임말을 계속 반복해서 가르쳐도 기억을 못 한다. '계시다, 드시다, 주무시다' 같은 객체높임법은 외국인 성인 한국어 학습자에게도 어려우니 9살 인도 아이인 아미르가 어려워하는 건 어떻게 보면 당연하다. 그런데 문제는 아미르는 공부할 의지가 없다는 것이다. 수업 시간에 가르치는 내용도 흘려듣고, 배운 내용을 복습할 생각도 없으니 똑같은 걸 반복해서 알려 줘도 기억에 안 남을 수밖에.
그때 아미르와 같이 수업을 듣는 1학년 민우가 나섰다.
"선생님, 나 알아! 내가 쓸래요!"
민우는 보드마카로 화이트보드에 크게 '주무세요'를 썼다. 민우의 아버지는 한국인, 어머니는 중국에서 오신 분이다. 그래서 그런지 한국말은 아미르보다 훨씬 잘했다. 말할 때 어른한테도 반말을 자주 쓰는 거 빼고 말이다. 지금 공부하는 <초등학생을 위한 표준 한국어 :저학년 의사소통 2> 책은 아미르에게는 적당하고 민우에게는 너무 쉬운 단계였으나, 두 아이를 따로 가르칠 수가 없어 어쩔 수 없이 같이 공부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이렇게 아미르가 못하는 걸 민우가 해낼 때가 많고, 그럴 때마다 아미르는 기분 나빠했다. 이번에는 민우가 좀 조용히 해 주길 내심 바랬지만, 또 이런 상황이 되어 버렸다. 게다가 공부를 싫어하는 아미르가 조금이나마 좋아하는 '화이트보드에 답 쓰기' 활동이었는데 말이다. 역시나 아미르는 민우에게 눈을 흘기며 말했다.
"야! 나 써!(내가 쓸 거야)"
아미르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민우는 흥얼거리며 보드마카로 화이트보드에 낙서를 하기 시작했다. 민우를 말리고 있는데 아미르가 사고를 쳐 버렸다. 민우의 낙서가 아미르 바로 앞 화이트보드를 향하자, 아미르가 보드마카로 민우의 팔을 죽 그어버린 것이다!
"아미르! 뭐 하는 거야!"
"아, 뭐야. 더러워졌어 아이잉..."
잉크는 민우의 손과 옷에 일자로 크게 묻어 버렸다. 민우는 손과 옷을 보며 속상해했고, 아미르는 자기도 그렇게 심하게 할 건 아니었었는지 당황해했다. 아마 순간적인 화를 참지 못하고 저지른 모양이다. 나도 '민우의 부모님이 교사가 애들 관리를 잘 못했다고 항의를 하시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 들었다.
"아미르 왜 그랬어?"
"쟤가 나 써야 되는데 써요."
"그럼 '내가 쓸 거니까 넌 이따가 해.'라고 말하면 되지 이렇게 하면 어떻게 해?"
"쟤도 저번에 나한테 장난쳤어요."
"아미르 미워, 아이 이게 뭐야아. 선생님, 나 아미르 싫어."
맞다. 며칠 전에는 민우가 아미르에게 장난을 쳐서 아미르가 화를 많이 냈었다.
"그때는 그 때지. 그래서 선생님이 민우 혼냈었잖아. 그럼 나중에는 민우가 아미르한테 이렇게 해도 돼?"
"..."
"실수로 그런 거지? 민우한테 미안하지? 민우한테 사과해."
"... 미안."
"더 크게 사과해."
"미안."
"아미르 미워."
"민우야, 많이 놀랐지? 근데 아미르 형도 실수한 거래. 미안하대. 화장실에 가서 손 닦고 와."
"아이, 힝..."
민우는 울상을 지은 채로 화장실에 갔다. 나는 아미르에게 지난 일로 민우를 괴롭혀서는 안 된다는 걸 다시 말하고, 앞으로는 화가 나도 말로만 하라고 했다. 아미르는 알겠다고는 했지만 과연 지켜질지는 의문이다.
이번뿐만 아니라 민우와 아미르는 서로 장난도 많이 치고 싸우기도 많이 싸워서 수업할 때 정신 사나울 때가 많았다. 민우는 틈만 나면 아미르에게 장난을 쳐서 아미르의 신경을 돋운다. 어느 날은 내가 잠깐 다른 데 눈 돌린 사이에 아미르가 민우의 실내화를 몰래 숨긴 채 하교해 버려서(아미르는 학원 시간 때문에 민우보다 일찍 하교한다) 내가 그걸 찾느라고 온 교실을 다 뒤진 적도 있다. 저학년 수업 때 내가 수업 시간에 하는 말의 절반은 잔소리인 것 같다. 그래도 저학년 아이들만 가르치는 월요일은 내가 어느 정도 통솔을 할 수 있지만, 4학년 수민이와 5학년 샨드라도 같이 공부하는 목요일은 힘들다.
"와, 수민아. 글을 아주 잘 썼는데? 틀린 글자가 조금밖에 없다. 선생님이 고쳐줄.... 민우야 책상에 올라가지 말고 앉아!"
"자, 샨드라, 수민아. 오늘은 '친구'에 대해서 글을 써 볼 거야. 너희하고 가장 친한 친구를 생각해 봐. 그 친구는... "
"선생님, 아미르가 나 때려요!"
"아니 민우가 먼저 때렸어요!"
이 외에도 아미르와 민우를 가르칠 때 어려웠던 점은 또 있었다. 아미르의 경우는 앞에서 썼다시피 의지가 전혀 없는 것이었다. 수업 시간에 내가 뭔가를 설명하면 '그저 빨리 시간이 자나 갔으면' 하는 표정으로 무표정하게 듣는다. 책을 읽을 때, 질문에 대답할 때 목소리도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이다. 목소리를 키울 때는 민우와 장난칠 때만이다. 배운 문법하고 단어를 잘 알고 있는지 확인하려고 질문하면 틀리기 일쑤이다. 집중을 전혀 안 하니 당연하다. 쓰기를 하라고 하면 정말 하기 싫다는 표정으로 느릿느릿 쓴다. 그나마 숙제를 내 주면 잘해 오지만 숙제한 것에 대해 물어보면 대답을 못한다. 의욕 없이 정말 기계적으로 시키는 것만 하는 것이다. 교사 입장에서 이렇게 의욕 없는 학생은 참 답답하다. 수업에 있어 가장 중요한 건 배우려는 의지인데 그 의지가 없으니 어찌하란 말인가. 나는 원래 초등학교 수업 때는 색종이나 아이클레이, 색칠도구 등 놀잇감을 가져가서 쉬는 시간에 아이들과 같이 한다. 그런데 아미르는 그것조차 싫어한다.
"아미르, 한국어 공부 어때?"
"싫어요. 재미없어요."
"그럼 아미르가 좋아하는 건 뭐야?"
"없어요."
"누나는 그림 그리기 좋아하는데, 아미르도 그림 그리기 좋아해?"
"아니요."
"학교 수업 중에서 어떤 과목이 제일 좋아? 체육, 음악, 미술, 수학..."
"다 싫어요."
"너 태권도 좋아하잖아."
"... 태권도만."
아휴... 한국어 수업 시간에 태권도를 할 수도 없고. 이 힘 빠지는 상황을 어떻게 할까. 한국어 공부를 싫어한다는 아이를 붙잡고 3교시나 수업을 하는 건 나도 참 지치는 일이다.
민우는 한국어 수업이 재미있다고 하기는 하는데(집중은 전혀 하지 않지만 말이다.) 쓰기에 자신감이 너무 없었다. 아미르는 싫어하긴 해도 뭘 쓰라고 하면 쓰는데, 민우는 본인 기준에 조금이라도 어려우면 싫다고 징징거리기만 한다.
" '________에서 책을 읽어요.' 여기에는 뭘 써야 돼?"
"도서관?"
"그렇지, 잘했어! '도. 서. 관' 써 보자."
"아 싫어요 싫어. 나 못 써."
이런 민우를 설득하고 달래다가 민우가 써야 되는 글자를 보여주고 똑같이 쓰라고 해서야 간신히 글자를 쓰기 일쑤였다. 어떻게 해야 되나 초반에는 고민이 많았다. 그런데 다행히 이건 곧 방법을 찾았다.
수업을 시작하고 3주 정도 지났으려나. 어느 날 민우가 나한테 담임선생님하고 받아쓰기한 것을 자랑했다. 받아쓰기 100점을 받은 것이다. 물론 선생님이 문제를 아주아주 쉬운 단어들로만 내셨기에 가능했지만 말이다.
"선생님, 나 받아쓰기했어. 근데 다 맞았어요!"
"이야, 정말이네? 너무 잘했다. 민우 받아쓰기 잘하는구나! 선생님하고도 같이 해 볼까? 10개 중에 8개 맞히면 선생님이 다음 시간에 초콜릿 선물 줄게."
"와, 네~. 나 초콜릿 좋아하는데. 근데 쉬운 거."
"그래. 1번. 학교!"
"아이, 나 학교 몰라요."
"그래? 그럼... 아버지."
"나 아버지 알아! 아. 버. 지... 선생님 이거 맞아? 맞아요?"
"맞아. 잘 썼어! 다음 2번은... 책."
"책 쉽지~"
"3번. 연필."
"아 연필 어려워어... 연필 아니야 선생님 나 연필 못 써요. 왜 어려운 거야?"
"그럼 '가방'하자."
"오케이. 가방."
결국 민우는 10개 중에 8개를 맞혔다. 2개는 아주 사소한 실수여서 맞는 걸로 해줄까 고민하다가 정확하게 하는 게 교육적으로 더 좋을 것 같아 이것만큼은 나름 냉정하게 평가했다. 맞는 걸로 인정 안 해 줘서 기죽어할까 봐 걱정했는데, 민우는 그저 자기가 8개나 맞혔고 초콜릿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방방 뛰기만 했다. 받아쓰기인지 자기가 아는 단어 쓰기인지 모를 활동이었지만, 이런 활동은 자신감이 부족해 쓰기를 극도로 싫어하는 민우에게 도움이 되었다. 아미르가 학원 때문에 일찍 하교하면 민우와 이런 자주 받아쓰기를 했었고, 민우는 점차 보지 않고도 쓸 수 있는 단어가 많아졌다. 쓰기 활동을 싫어하는 건 여전하지만, 그래도 조금씩 나아지고는 있다.
민우는 이렇게 방법을 찾았는데, 의욕 없는 아미르는 어떻게 해야 할까. 아직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아미르가 한국어 수업을 정말로 싫어하는 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언젠가 아미르의 누나 5학년 샨드라가 개인 사정으로 수업을 3번이나 빠지는 바람에 같이 공부하는 4학년 수민이와 진도가 너무 차이가 많이 나 버린 적이 있었다. 그래서 주말에 한 번 샨드라만 온라인으로 50분이라도 수업하기로 했다. 원칙적으로는 온라인 수업은 안 되는데, 샨드라의 진도도 그렇고 마침 학생들 일정으로 수업을 예정보다 일찍 끝낼 때가 몇 번 있었으니 그렇게 빠진 시간을 샨드라 시간에 쓰기로 한 것이다. 샨드라는 동생 아미르와 달리 공부를 정말 좋아하는데, 한국어 수업을 특히 좋아한다. 한국어 수업에 들어오는 샨드라의 표정은 항상 밝고, 나 또한 산드라를 가르칠 때마다 의욕이 솟는다. 산드라와 온라인 수업을 하는데, 동생 아미르가 누나 옆에 찰싹 붙어 있었다.
"샨드라, 안녕! 오랜만이야."
"안녕하세요, 선생님!"
"안녕하세요 히히히"
"엇, 아미르야? 아미르 안녕? 누나 공부하는 거 보고 싶어?"
"네."
"그래? 그럼 아미르도 같이 공부할래?"
"싫어요. 키킥"
이렇게 말했으면서 아미르는 수업을 하는 내내 누나 옆에서 웃으며 한국어 수업을 구경했다. 자기 수업할 때는 민우와 장난칠 때 빼고 내내 뚱한 표정을 짓고, 대답도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간신히 대답하면서, 누나가 공부하는 건 재미있어 보이나 보다. 그래도 자기 수업이 아니라고는 해도, 싫어하는 한국어 수업을 하는 50분을 내내 옆에서 듣다니... 생각해 보면 아미르는 항상 일찍 교실에 오고, 문제를 냈을 때 옆에서 민우가 자기보다 문제를 더 많이 맞히면 질투한다. 내가 뭔가 조금 더 자극을 주면 더 적극적으로 공부하지 않을까 싶다. 그 방법이 뭔지는 아직도 못 찾았지만 말이다.
이렇게 초등학교 저학년 수업(특히 남학생)은 고학년이나 중학생 이상 수업보다 더 어렵다. 아이들을 통솔하는 것도 어렵고, 아미르같이 한국어가 많이 익숙하지 않은 학생들과는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지 못하니 속마음도 파악하기 어렵다. 저학년 수업을 하면 할수록 초등학교 교사들이 존경스러워진다.
*표지 이미지 출처 : pixabay
오랜만에 글을 쓰네요. 지난 9월~11월까지는 대학교 한국어센터 강의 + 초등학교 강의 + 저녁 온라인 한국어 강의를 한 데다가 주 1회 박사과정 수업까지 들어서 너무너무 바빠서 브런치에 글을 올리고 싶어도 올릴 수가 없었습니다^^; 12월에 강의도 줄고 대학원도 종강하고 나서야 좀 시간이 나더라고요. 제가 일 욕심이 좀 있어서 1월이 되면 또 바빠질 예정이라 앞으로도 브런치에 글 올릴 시간은 별로 없겠지만... 그래도 시간 나는 대로 저와 다문화가정 아이들의 이야기를 틈틈이 써 보려고 합니다!
오늘이 딱 크리스마스네요. 독자님들 모두 메리크리스마스! 그리고 미리 새해 인사 드립니다. 새해 복 많이 많이, 올해보다 더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