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2
지난 화 마지막:
"……네."
샤워를 마치고 나오니 그녀는 이미 침대 한쪽에 누워 있었다. 이불을 턱까지 끌어올린 채, 창문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반대쪽 끝자락에 누웠다.
침대가 넓다고 했지만, 그래도 가까웠다.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은 거리.
"……불 끌까요?"
"네."
리모컨을 눌러 조명을 껐다. 방 안이 어두워졌다. 창문 너머로 항구의 불빛이 희미하게 스며들었다.
한참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자요?"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아뇨. 아직요."
"저도요."
"……."
"이상하네요. 새벽부터 일어나서 피곤한데 잠이 안 와요."
나도 그랬다. 술을 마셔서 피곤한데, 어지러운 머리가 이상하게 맑아졌다.
천장을 바라봤다. 물빛 같은 그림자가 천천히 일렁이고 있었다.
"그쪽 씨."
"네."
"그래도 그쪽은 분명하게 있는 사람이에요."
"……네?"
"아까요. 눈앞에 있는데 없는 것 같다고 했잖아요. 그쪽 씨는 분명히 있는 사람이에요."
나는 고개를 돌렸다. 어둠 속에서 그녀의 옆모습이 희미하게 보였다. 그녀도 고개를 돌려 나를 봤다.
눈이 마주쳤다.
가까웠다.
숨소리가 들릴 만큼.
"……그런가요."
내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네. 이렇게 잘 보이는 걸요."
그녀가 숨을 삼키며 말했다. 어둠 속에서도 그녀의 까만 눈동자가 흔들리는 게 느껴졌다.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았다.
취기 때문일까. 아니면 다른 뭔가 때문일까.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
"……."
그러다 우리는 동시에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걸 감지한 듯, 황급히 천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흠흠…… 잘 까요?"
그녀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네, 네. 자죠. 내일 일찍 일어나야 하니까요."
"……잘 자요."
"잘 자요."
방금 전 분위기 때문이었는지 눈을 감아도 옆에 누워 있는 그녀가 눈앞에서 선명했다.
새까만 검은색에 똑떨어지는 긴 머리. 하얀 피부색… 큰 눈이지만 어딘가 날카로워 보이는 눈매.
술에 취해 올라온 빨간 홍조까지.
나와 다르게 늘 당돌해 보이는 그녀가 아른거리고 심장이 계속해서 빠르게 뛴다.
전에 같이 잤을 때는 느껴지지 않았던 것들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한참을 뒤척이다 겨우 잠에 들었다.
다음 날 아침.
눈을 떴을 때, 그녀는 이미 일어나 창가에 서 있었다.
"일어났어요?"
"……네."
"아침 먹으러 가요. 검색해 보니까 호텔 조식 맛있대요."
그녀가 평소처럼 웃었다. 어젯밤 일은 없었다는 듯이.
"후…… 아침부터 밥이 들어가나요."
"물론이죠. 먹으려고 여행 오지, 그럼."
그녀가 내 손을 잡고 끌어준 탓에
술을 꽤나 먹고도 가볍게 일어날 수 있었다.
창문 너머로 아침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고 바다가 반짝이고 있었다.
밤과는 다른 색.
호텔 조식을 간단히 먹고 우리는 시모노세키로 향했다. 모지코에서 배로 5분. 간몬해협을 건너면 바로였다.
배 위에서 그녀가 바람을 맞으며 말했다. 가을바람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흩날렸다. 햇살이 바다 위에서 부서지고 있었다.
"와…… 바다 진짜 좋다. 근데 이렇게 가까운 거였어요?"
"뭐, 저는 사실상 둘이 하나라 봐요."
"하나요?"
"모지코랑 시모노세키. 해저 터널로 가면 걸어서도 가는데요 뭐."
"오! 해저 터널도 있어요!?"
"기대는 하지 마요. 그냥 꽉 막힌 길인데요 뭐. 물속이 보인다거나 그런 게 아니라."
배가 시모노세키 항구에 닿았다. 내리자마자 다른 공기가 느껴졌다. 모지코보다 조금 더 투박하고, 복잡했다. 항구 특유의 짠내와 생선 비린내가 섞인 바람.
우리는 천천히 걸었다. 항구를 따라, 오래된 건물들 사이를 지나.
그녀가 사람들이 줄 서 있는 식당을 보며 말했다.
"여기는 뭐 파는데 이렇게 사람이 많아요? 먹어봐요 이따가."
"뭔 줄 알고 드시려고요. 복어예요, 복어."
"아…… 저는 패스."
가라토 시장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일요일이면 북적이는 곳이지만 오늘은 평일이라 한산했다. 우리는 시장 구경을 대충 마치고 해안가를 따라 걸었다.
햇살이 따가웠다. 바다는 짙은 파란색으로 출렁이고 있었다. 멀리 관문대교가 보였다. 모지코와 시모노세키를 잇는 다리.
그때였다.
"하루키?"
뒤에서 누군가 불렀다. 일본어였다.
멈칫했다. 심장이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야, 하루키! 하루키잖아!"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나는 천천히 뒤를 돌아봤다. 나와 같은 또래로 보이는 남자. 낯이 익었다. 고등학교 때…… 같은 반이었던 놈. 타케시.
"뭐야, 진짜 하루키네. 야, 오랜만이다."
그녀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쪽 씨 아는 사람이에요? 하루키?"
나는 타케시를 보며 차갑게 말했다.
"사람 잘못 보셨어요."
"뭐? 야, 무슨 소리야. 나야, 타케시. 같이 수업도 들었는데 말이야. 뭐야, 나 모른 척해?"
타케시가 씩 웃으며 다가왔다. 그 웃음이 거슬렸다. 예전에도 저런 식으로 웃었다. 기분 나쁘게.
나는 다시 한번 말했다.
"모르는 분인데요. 사람이 많으니까 헷갈리신 것 같네요."
"옛날에도 그 재수 없는 낯짝을 하고는 늘 무시하더니 똑같네."
타케시는 그녀를 보고는 씩 웃더니 혼잣말을 하고는 지나갔다. 역겨웠다.
당황한 표정의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루키? 그쪽 씨 일본 이름? 아는 사람인 거예요?"
"아뇨. 사람 많으니까 헷갈리셨나 봐요. 그냥 가죠."
나는 빠르게 걸었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역시 다시 오는 게 아니었다.
한참을 걷다 보니 해안가 끝쪽에 다다랐다. 그녀가 멀리 보이는 빨간 건물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뭐예요? 절인가? 가볼래요?"
붉은색이 눈에 들어왔다. 아카마 신궁. 바다를 마주 보고 서 있는 빨간 신사문이 멀리서도 선명하게 보였다.
"절은 아니고 신사예요. 아카마 신궁이라고. 뭐, 가죠."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아니, 어디든 좋았다. 아까 그 자리에서만 벗어날 수 있다면.
우리는 신궁 쪽으로 걸었다. 가까이 갈수록 사람들이 많아졌다. 평일인데 왜 이렇게 사람이 많은 거야. 붉은 신사문 앞에서 사진을 찍는 관광객들, 계단을 오르내리는 가족들.
신궁 안으로 들어섰다.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붉은 기둥들 사이로 파란 바다가 펼쳐지는 풍경. 그녀가 감탄하며 주위를 둘러봤다.
"우와…… 여기 예쁘다. 바다도 보이고."
"……네."
"그쪽 씨, 여기 와본 적 있어요?"
"……옛날에요."
그때였다.
"어머, 하루키?"
또 누군가 불렀다. 이번엔 여자 목소리였다.
나는 멈췄다. 또야. 또.
"하루키 맞지? 나야, 유미. 고등학교 때 같은 반이었잖아. 기억나?"
뒤를 돌아봤다. 조금은 성숙해 보이는 여자. 낯이 익었다. 유미…… 반장이었던가.
"와, 진짜 오랜만이다. 여기 웬일이야? 여행이야?"
유미는 반갑다는 듯 다가왔다. 타케시와는 달리, 아주 조금은 내게 친절을 베풀었던 사람이었다.
"……응. 오랜만."
더는 피할 수 없었다.
그녀가 나를 바라봤고 눈이 마주쳤다. 그 눈빛에 물음표가 가득했다.
유미가 그녀를 보며 물었다. 일본어로.
"여자친구야? 우와, 예쁘다. 한국 사람이야?"
"……응…… 응? 아니, 여자친구는 아니고 친구. 그냥 여행 온 거야."
"어머, 남녀가 같이? 좋은 친구인가 보네."
유미가 그녀를 보며 어딘가 모르게 음흉한 표정으로 웃었다. 그러더니 서툰 한국어 발음으로 말했다.
writer: 추설
Instagram id: sc28zs
https://www.instagram.com/sc28zs/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2174445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