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지코에서 가을을

ep.11

by 추설

지난 화 마지막:

"여기예요. 다들 후쿠오카로 돌아갈 시간이라 관광객도 거의 없고, 조용해서… 얘기하기 좋아요."

그녀는 문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내 쪽을 봤다.

"그쪽 씨."

"네."

"오늘… 좀 재밌었어요."

나는 잠깐 멈칫했다.

"…네? 아… 네. 뭐, 그렇죠."

그녀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그쪽한테… 말해주고 싶었어요. 그냥요."

나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반응했다.

"그런가요."

묘하게 편한 침묵이 잠시 흘렀다.

나는 문 손잡이를 잡고 살짝 밀었다.

철컥—


ep.11

문을 살짝 밀자 따뜻한 공기와 오래된 목재 냄새, 굽는 향이 한꺼번에 퍼져 나왔다.

"아 맛있는 냄새.. 일본 이자카야는 뭐가 맛있어요?"

"밥 먹은 지 얼마나 지났다고… 들어가죠. 메뉴 보고 골라보죠"

그녀는 정말 기쁜 사람이 된 얼굴로 안으로 들어갔다. 그 표정이 낯설 만큼 환해서, 잠깐 말문이 막혔다.

"뭐해요, 얼른 들어와요."

그녀가 내 손목을 가볍게 잡아끌었다.


이자카야 안은 생각보다 좁았다. 카운터 너머로 주인 할아버지가 묵묵히 꼬치를 굽고 있었고, 벽에 붙은 메뉴판은 손글씨로 빼곡했다. 기름 냄새와 숯불 연기가 뒤섞인 공기. 낡은 나무 의자, 천장에 매달린 노란 조명. 모든 것이 오래된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녀가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우와…… 진짜 현지인만 오는 데 같아요. 메뉴판 하나도 모르겠는데요?"

"제가 시킬게요. 뭐 못 먹는 거 있어요?"

"없어요. 아, 근데 생선 내장 같은 건 좀……."

"알았어요."

나는 카운터 쪽을 향해 주문했다. 야키토리 몇 가지, 다시마기타마고, 그리고 생맥주 두 잔. 할아버지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진짜 유창하다…… 부러워요. 저도 배울걸."

"뭘요. 그냥 주문 정도는 누구나 해요."

맥주가 나왔다. 거품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유리잔에 맺힌 물방울이 조명 아래서 희미하게 반짝였다.

"자, 첫날 기념으로."

그녀가 잔을 들었다. 나도 따라 들었다.

짠—

한 모금 마시자 차가운 게 목을 타고 내려갔다. 그녀는 벌써 반 잔을 비우고 있었다.

"역시 여행엔 술이지."

"그쪽은 진짜 술 좋아하네요."

"좋아하는 게 아니라 필요한 거예요. 스트레스가 술로 풀리는 체질이라서."

"건강엔 안 좋을 텐데요."

"알아요. 근데 뭐 어때요. 내일 죽을 것도 아닌데."

꼬치가 나왔다. 닭껍질, 닭다리, 파닭. 노릇하게 구워진 표면에서 기름이 반들거렸다.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하나를 집었다.

"맛있다……."

"다행이네요."

"그쪽도 먹어요. 왜 또 멍하니 있어요."

나는 조용히 꼬치를 집었다. 익숙한 맛이었다. 옛날에는 이런 걸 자주 먹었었다. 이 동네는 아니었지만, 어디에나 있을 법한 그런 가게.

문득 그때의 장면이 떠올랐다. 같은 노란 조명, 같은 숯불 냄새. 하지만 그건 이미 색이 바랜 기억이었다. 뭐, 그땐 술은 먹을 수 없었지만.

"그쪽 씨, 무슨 생각해요?"

"네?"

"아까부터 자꾸 멍 때리길래."

"그냥…… 옛날 생각이요."

"어떤 옛날?"

나는 맥주를 한 모금 마시며 대답했다.

"그냥…… 그런 거요. 별거 아니에요."

그녀는 더 캐묻지 않았다. 대신 다시 꼬치를 집으며 말했다.

"그쪽 씨, 말 안 하고 싶은 거 많죠? 괜찮아요. 나중에 말해줘도 되고, 안 해줘도 되고."

"……."


"대신요."

그녀가 나를 똑바로 바라봤다.

"너무 혼자 끙끙대진 마요. 친구잖아요, 우리."

그 말에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그냥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녀는 만족한 듯 다시 술을 마셨다.

술자리는 길지 않았다. 역시 관광객이 빠진 시간대라 그런지, 모지코의 가게들은 일찍 문을 닫기 시작했다. 우리는 적당히 취한 채로 가게를 나섰다.

"바로 호텔 가요?"

"아뇨. 조금 걷죠. 여기까지 왔는데 야경이나 보면서."

그녀가 내심 기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밤의 모지코는 낮과는 다른 색을 품고 있었다. 붉은 벽돌 건물들 사이로 가로등 불빛이 흩어지고, 항구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에는 바다 냄새가 섞여 있었다. 멀리 간몬해협 너머로 시모노세키의 불빛이 점점이 떠 있었다. 물 위로 일렁이는 빛들. 검은 바다와 노란 불빛. 경계가 흐릿하게 번지는 밤.

우리는 항구를 따라 천천히 걸었다. 술기운 때문인지, 발걸음이 느릿해졌다.

그녀가 문득 말했다.

"그쪽 씨."

"네."

"그쪽은 저한테 진짜 궁금한 게 없어요?"

"네?"

"아니, 저는 이것저것 물어봤잖아요. 일본어는 어디서 배웠냐, 여기 자주 오냐, 이런 거. 근데 그쪽은 저한테 아무것도 안 물어보잖아요."

나는 잠시 생각했다.

"……물어보기 전에 다 말해주셨잖아요."

"에이, 그런 게 어디 있어요."

그녀가 볼을 부풀리며 말했다.

"오늘 어땠어요, 이런 것도 안 물어보고. 뭐, 연애는 해봤는지 이런 거 안 궁금해요?"

"……궁금하긴 한데."

"그럼 물어봐요."

"……오늘 어땠어요?"

"뭐야, 앞에 거가 궁금한 거예요? 정말 시킨 대로 하네."

그녀가 웃었다. 술기운 때문인지, 평소보다 밝은 웃음이었다.

"좋았어요. 오랜만에 이렇게…… 아무 생각 없이 돌아다닌 거."

"다행이네요."

"그쪽 씨는요?"

"……나쁘지 않았어요."

"뭐야, 그것만?"

"좋았어요."

내가 짧게 덧붙이자, 그녀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바람이 불었다. 그녀가 팔짱을 낀 채 어깨를 움츠렸다.

"근데 그쪽 씨."

"네."

"그쪽은 전에 누구 만났어요?"

"……."

"아..!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요. 그냥 궁금해서."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있긴 했어요. 오래전에."

"어떤 사람이었어요?"

"그냥…… 그런 사람이요."

"에이, 또 그러네."

그녀가 투덜거렸다. 나는 작게 웃으며 되물었다.

"그러는 그쪽은요? 전에 누구 만났어요?"

"저요? 드디어 궁금해진 거예요?"

그녀가 잠시 하늘을 올려다봤다. 가로등 불빛이 그녀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비슷했어요. 그쪽이랑."

"저랑요?"

"네. 사진작가는 아니고…… 디자이너였는데. 분위기가 좀 비슷했어요. 지금은 꽤 업계에서 유명해졌더라고요. 유명해지고 나서 헤어진 건 아니고요."

"……."

"뭐, 처음부터 저한테 별로 관심이 없었던 것 같지만."

그녀가 쓴웃음을 지었다.

"나쁜 사람은 아니었어요. 착하고, 괜찮았는데. 근데 항상…… 어딘가 다른 데 있는 느낌? 눈앞에 있는데 없는 것 같은."

"……."

"가끔 혼잣말하더라고요. 뭔지도 모르겠는 걸 그립다고."

바람이 불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그래서 헤어졌어요. 제가. 이 사람은 나를 안 보고 있구나 싶어서."

나는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 그냥 묵묵히 걸었다.

"왜 이런 얘기까지 하냐면요."

그녀가 나를 힐끗 봤다.

"그쪽도 좀 그런 것 같아서요. 눈앞에 있는데 없는 것 같은."

"……."

"아, 기분 나쁘게 들었으면 미안해요. 그냥 느낌이 그렇다고요."

"……아뇨. 기분 나쁘지 않아요. 얘기해 줘서 고마워요."

"뭘요, 그쪽이 들어줘서 고마운 거죠."

나는 바다를 바라봤다. 물 위로 불빛이 일렁이고 있었다.

"……더 좋은 사람 만나면 되죠."

"네?"

"전 남자친구 말이에요. 아쉬워할 필요 없어요."

그녀가 멈칫했다. 그러더니 피식 웃었다.

"뭐야, 위로해 주는 거예요?"

"그냥…… 그렇다고요."

"고마워요. 좀 어색하네요, 막상 이런 얘기하고 나니까."

"……."

"다시 걸을까요."

그녀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나도 따라갔다.

항구를 따라 걷다 보니 호텔 불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역에서 10분 거리, 간몬해협이 내려다보이는 호텔이었다. 로비에 들어서자 은은한 조명과 깔끔한 인테리어가 눈에 들어왔다. 이탈리아 건축가가 설계했다는 건물답게, 어딘가 유럽풍의 느낌이 섞여 있었다.

방에 들어서자 그녀가 창가로 다가갔다.

"우와…… 바다 보여요. 야경 진짜 예쁘다."

창문 너머로 간몬해협의 불빛이 일렁이고 있었다. 검은 바다 위로 시모노세키의 불빛이 점점이 흩어져 있었고, 그 빛들이 물결에 부서져 흔들렸다.

"오션뷰로 잡았어요. 어차피 여기까지 온 거."

"그쪽 씨, 의외로 센스 있네요?"

나는 대답 대신 짐을 내려놓았다. 그녀가 방 안을 둘러보다가 멈칫했다.

"근데…… 침대가 하나네요."

"……."

"더블룸이에요?"

나는 그제야 방을 다시 둘러봤다. 분명 트윈룸으로 예약했는데. 넓은 더블 침대 하나가 방 중앙에 놓여 있었다.

"……죄송해요. 제가 잘못 예약한 것 같아요. 프런트에 얘기해서 바꿔……."

"됐어요."

그녀가 손을 저었다.

"이 시간에 뭘 바꿔요. 귀찮게. 침대 넓으니까 그냥 자요."

"……괜찮아요?"

"괜찮다니까요. 성인이잖아요, 우리."

그녀가 괜히 커튼을 만지작거리며 창밖을 바라봤다. 귀 끝이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나도 어디를 봐야 할지 몰라 가방을 뒤적거렸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저 샤워 먼저 해도 돼요?"

"네. 하세요."

그녀가 옷을 챙겨 욕실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 물 흐르는 소리.

나는 창가에 서서 바다를 바라봤다. 술기운이 아직 남아 있었다. 머리가 살짝 어지러웠다.

이게 뭐 하는 거지.

잠시 후 그녀가 나왔다. 젖은 머리카락, 호텔 가운.

"다 했어요. 그쪽도 하세요."

"……네."

샤워를 마치고 나오니 그녀는 이미 침대 한쪽에 누워 있었다. 이불을 턱까지 끌어올린 채, 창문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반대쪽 끝자락에 누웠다.

침대가 넓다고 했지만, 그래도 가까웠다.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은 거리.

"……불 끌까요?"

"네."

리모컨을 눌러 조명을 껐다. 방 안이 어두워졌다. 창문 너머로 항구의 불빛이 희미하게 스며들었다.

한참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자요?"


writer: 추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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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jpg 작품과 세계관을 공유하는 이야기『세상에 없던 색』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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