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3
지난 화 마지막:
"어머, 하루키?"
또 누군가 불렀다. 이번엔 여자 목소리였다.
나는 멈췄다. 또야. 또.
"하루키 맞지? 나야, 유미. 고등학교 때 같은 반이었잖아. 기억나?"
뒤를 돌아봤다. 조금은 성숙해 보이는 여자. 낯이 익었다.
"와, 진짜 오랜만이다. 여기 웬일이야? 여행이야?"
유미는 반갑다는 듯 다가왔다. 타케시와는 달리, 내게 친절을 베풀었던 사람이었다.
"……응. 오랜만."
더는 피할 수 없었다.
그녀가 나를 바라봤고 눈이 마주쳤다. 그 눈빛에 물음표가 가득했다.
유미가 그녀를 보며 물었다. 일본어로.
"여자친구야? 우와, 예쁘다. 한국 사람이야?"
"……응…… 응? 아니, 여자친구는 아니고 친구. 그냥 여행 온 거야."
"어머, 남녀가 같이? 좋은 친구인가 보네."
유미가 그녀를 보며 어딘가 모르게 음흉한 표정으로 웃었다. 그러더니 서툰 한국어 발음으로 말했다.
"안녕하세요!"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아, 네! 하지메..? 하지메마시떼?"
유미가 웃었다.
"한국어 조금? 작은? 조금 할 수 있어요. 하루키가 열심히 알려줬었거든요."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나를 봤다. 나는 시선을 피해 애써 모른 척했다.
유미와 그녀는 그새 대화를 나눴다. 유미의 서툰 한국어와 그녀의 말이 뒤섞였다. 어느새 둘은 핸드폰을 꺼내 SNS를 교환하고 있었다.
불편했다. 그녀와 잊고 싶은 과거의 조각이 연결되고 있었다.
유미가 나를 보며 일본어로 말했다.
"와, 진짜 예쁘다. 성격도 좋아보이고 하루키 복 받았네!"
"……그냥 친구라니까."
"알았어, 알았어."
유미가 다시 나를 봤다.
"그래도 잘 지내는 것 같아서 다행이다. 그때 갑자기 없어져서 걱정했거든. 어쨌든 반갑다. 나중에 연락해!"
유미는 손을 흔들며 신사 바깥으로 나갔다.
약간에 침묵이 흘렀고 우리는 신궁 안을 천천히 걸었다. 나는 이 분위기를 바꾸고 싶어서 말했다.
"하여간 여자들이란 신기하네요. 처음 본 사람이랑 SNS 교환이라니."
"저도 외국인 친구가 생긴 거네요?"
그녀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아, 그러고 보니까 그쪽 씨도 알려주시죠?"
"……저는 그런 거 안 해서."
"에이, 진짜요? 요즘 세상에?"
"……네."
그녀가 고개를 갸웃했지만 더 캐묻지는 않았다.
잠시 걷다가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하루키."
"……."
"그게 그쪽 씨 일본 이름인 거 맞네요. 설마…… 사실은 일본인!? 하긴 이건 너무 억지인가? 유학파겠네요. 일본어를 어쩐지 거의 현지인처럼 잘하시더라니."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가볍게. 캐묻지 않으려는 듯.
"언제 오셨었어요? 고등학교 때? 사진작가니까 음…… 예술학교 이런 건가? 근데 10대 때도 유학을 오나..?"
"……."
"아……! 불편하면 대답 안 해도 돼요. 그냥 궁금해서. 다만 내가 어제 내기에서 이긴 것만 알아둬요!"
"……."
"아, 근데 아까 그분. 유미 씨? 전 여자친구예요?"
"……아뇨. 유학 생활할 때 반에 반장이었어요."
"아, 그렇구나. 친해 보여서. 그쪽 성격에 한국어까지 알려줬다니까"
"……그냥 아는 사이예요."
신궁 안에서 바다 쪽을 바라봤다. 수평선 위로 구름이 흘러가고 있었다. 햇살이 눈부셨지만 내 눈에는 그 빛이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나중에 말해줄게요."
겨우 그렇게 말했다.
"지금은…… 좀."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기다릴게요! 하지만 정말 말하기가 부끄럽거나 그런 거라면 말 안 해도 괜찮아요!"
그녀가 내 옆에 섰다. 나란히 바다를 바라봤다.
"저는 그냥 '그쪽 씨'라고 계속 부를게요. 그게 편하거죠?"
"……."
"정말이에요! 이름 말하기 싫으면 안 말해도 돼요. 저는 상관없어요. 그보다 신궁 안에서도 바다가 보인다니 낭만적이네요!"
바람이 불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나는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 고맙다는 말도, 미안하다는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그녀가 웃었다. 조용히.
"아, 소원 빌고 가요! 드라마 보면 그런 거 많이 하던데!"
"아…… 참배 말하는 거죠? 그러죠 뭐."
그녀가 앞장서서 본전 쪽으로 걸어갔다. 나는 뒤따라갔다.
새전함 앞에 섰다. 그녀가 지갑에서 동전을 꺼내며 말했다.
"5엔 있어요? 고엔, 고엔. 인연이랑 발음 같다면서요? SNS에서 봤어요."
"네. 같은 발음이에요."
나는 주머니를 뒤적여 5엔짜리를 꺼냈다. 그녀도 하나 들고 있었다.
"자, 같이 던져요."
찰랑.
동전이 새전함에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두 번 절하고, 두 번 박수 치고, 한 번 절하고. 익숙한 동작이었다. 오랜만이었지만 몸이 기억하고 있었다.
눈을 감았다.
뭘 빌어야 하지.
그러다 문득 옆에 서 있는 그녀가 느껴졌다.
소원을 빌고는 눈을 떴다. 그녀는 아직 눈을 감고 있었다. 진지한 표정이었다. 뭘 그렇게 열심히 비는 걸까.
잠시 후 그녀가 눈을 떴다.
"다 빌었어요?"
"……네."
"뭐 빌었어요?"
"……비밀이에요."
"에이, 뭐야."
그녀가 볼을 부풀렸다.
"그쪽 씨는요? 뭐 빌었어요?"
"저도 비밀이에요."
"……."
그녀가 잠시 나를 보더니 피식 웃었다.
"좋아요. 그럼 나중에 말해줘요. 둘 다."
"……나중에요?"
"네. 언젠가. 이 여행 끝나고, 아니면 더 나중에. 그때 서로 뭐 빌었는지 얘기하는 거예요. 더욱 좋은 친구가 되면 말이죠."
"……."
"약속이에요."
그녀가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어이없었지만, 거절할 수 없었다.
나도 새끼손가락을 내밀어 걸었다.
"……약속이요."
그녀가 환하게 웃었다.
"좋아요. 그럼 그때까지 비밀."
참배를 마치고 돌아서는데, 그녀가 옆에 있는 오미쿠지 함을 발견했다.
"오! 저거 운세 뽑는 거죠? 해봐요 해봐요!"
“아.. 오미쿠지..굳이요?"
"오미쿠지라고 하나요? 아무튼 여기까지 왔는데! 해봐야죠!"
그녀는 벌써 100엔을 넣고 함에서 나무 막대를 꺼내고 있었다. 나도 어쩔 수 없이 따라했다.
그녀가 번호를 확인하고 해당하는 종이를 꺼냈다. 펼치자마자 일본어로 써져있는 오미쿠지를 보고는 당황했다.
"어라 이거 한자 뭐라고 읽어야 하는 거죠..? 大(대)까지는 읽을 수 있는데.."
writer: 추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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