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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전 Feb 13. 2020

500만 평의 땅을 기증한  그녀의 마지막 부탁

-피터 레빗 작가의 삶 다룬 < 베아트릭스 포터의 정원>

숲 속을 네 발로 깡충깡충 뛰어다니는 천방지축 토끼를 상상해서는 안 된다. 밤색 재킷에 나비넥타이를 매고 파이프까지 문 의젓한 아빠 토끼, 긴치마에 흰색 앞치마를 두르고 요리에 여념이 없는 엄마 토끼, 플롭 시와 코튼 테일, 몹시, 그리고 피터까지 전나무 아래 살아가는 4남매 토끼는 사람들과 똑같은 삶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토끼 가족이다. 블랙베리를 따오라는 엄마의 심부름에 덤불숲으로 간 4마리 토끼, 그중 유독 말썽꾸러기인 피터는 엄마가 절대 가지 말라고 한 정원사 맥그레거가 있는 정원으로 들어가는데, 피터는 과연 정원사 맥그레거의 눈을 피해 무사히 블랙베리를 따올 수 있을까?


100년 전 세상에 처음 등장한 이 매력적인 토끼들은 순식간에 전 세계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들을 주인공으로 한 < 피터 래빗 >은 전 세계 30여 개국에서 출판돼 1억 5천 만부 이상이 판매됐고 TV 애니메이션으로도 만들어졌다. 몇 년 전에는 디즈니사에서 애니메이션 영화로 제작하기도 했다.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캐릭터인 <피터 래빗> 그런데 이 책의 작가가 피터 래빗보다 더 대단한 인물이라는 것을 이 책을 보기 전까지는 알지 못했다.    

베아트릭스 포터의 정원/마르타 맥도웰

20세기 최고의 아동문학으로 꼽히는 <피터 래빗>을 탄생시킨 작가 ‘베아트릭스 포터’는 유명한 ‘동화작가’만이 아니라 ‘정원사’이자 ‘농부’이자 ‘환경운동가’였다. 더구나 세계적인 민간 환경 운동단체 < 내셔널 트러스트 >의 창시 멤버 중의 한 명이기도 하며 자신이 평생을 바쳐 가꾼 정원 5백만 평을 죽기 전에 < 내셔널 트러스트 >에 기증해 그 정원이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다.    


100년 전 영국 맨체스터 섬유산업을 기반으로 부를 축적한 대부호의 외동딸로 태어난 베아트릭스 포터, 베아트릭스 포터는 왜 자신에게 보장된 화려한 영국 사교계의 생활을 버리고 시골로 들어가 밀짚모자에 나막신을 신은 채 정원 가위를 손에 들고 나무 돌보는 일에 전 생애를 바쳤을까?


1866년 영국 런던의 부유한 저택에서 태어난 베아트릭스 포터는 어린 시절 류머티스성 열로 자주 기절할 정도로 몸이 약했다. 포터 아버지는 이런 포터를 위해 일 년에 몇 개월은 도시를 떠나 공기 좋은 스코틀랜드 달기스 지방에서 생활했다. 대도시 런던보다 아직 개발의 손길이 닿지 않은 이 시골 마을을 더 좋아했던 포터는 이 곳에서 작은 곤충과 풀, 꽃과 나무를 자세히 관찰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림에도 남다른 소질이 있었던 포터는 자신이 관찰한 것을 그림으로 남기는 것을 좋아했다.  


나는 하던 일을 멈추고 뒤뜰에 나가 구정물 양동이를 공들여 그렸다. 그런 다음 한바탕 웃고 나면 기운을 찾을 수 있었다.


식물에 대한 관심은 20대에 접어들면서 좀 더 깊이 있는 관찰과 조사로 이어졌다. 여행을 다닐 때마다 새로운 식물에 대한 기록을 꼼꼼히 남겼다. 그중에서도 유독 균류에 관심이 많았던 포터는 버섯과 지의류를 현미경으로 관찰하며 자세히 그림을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균류에 관한 논문까지 쓴다. 여성 식물학자가 되고 싶었지만 당시 런던의 유명한 식물학회인 '린네학회'에서는 여성을 받아주지 않아 포터는 식물학자의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베아트릭스 포터가 그린 버섯그림

우리네 인생 자체가 예측불허이듯 포터가 세계적인 동화작가가 되는 계기도 우연히 찾아온다. 30대가 훌쩍 넘어설 때까지 결혼을 하지 않았던 포터는 어린 시절 자신의 가정교사였던 애니 카터의 아들들을 매우 좋아했다. 이 아이들에게 자주 자신이 그린 그림과 지어낸 이야기를 편지로 보내곤 했는데, 어느 날 자신이 애완동물로 키우는 토끼를 모델로 한 토끼 사총사 이야기를 그림으로 그려 편지로 보낸다.


이 편지에 < 피터 래빗 >의 4마리 토끼, 플롭시와 몹시, 코튼 테일, 그리고 피터가 최초로 등장한다. 이 편지를 본 애니가 포터에게 이 이야기를 각색해 책으로 출판하라고 추천한다. 베아트릭스 포터는 이 이야기를 듣고 실제 책을 출간하기 위해 출판사를 알아보지만 무명의 여성작가가 그린 토끼 그림을 책으로 출판하겠다는 출판사는 한 곳도 없었다.

할 수 없이 포터는 1906년 12월 16일, 자비를 들여 250부의 책을 흑백으로 인쇄한다. 그러나 인생의 아이러니는 여기부터, 책은 출판되자마자 완판 되고 급히 더 찍은 200부까지 완판 된다. 그러자 뒤늦게 한 출판사에서 출판을 제의한다. 세계적인 캐릭터의 탄생은 이런 우여곡절을 거쳐 1902년 컬러판 < 피터 레빗 이야기 >로 출간된다. 그리고 베아트릭스 포터의 이름은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된다.    


동화작가로서의 성공과 함께 장밋빛 인생이 펼쳐지는 듯했다. 포터는 책을 출간한 출판사의 프로젝트 담당자 노먼과 사랑에 빠지면서 약혼을 한다. 당시 베아트릭스 포터의 나이 39세, 그런데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노먼은 약혼한 지 한 달 만에 급성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약혼자가 죽은 후에도 약혼반지를 빼지 않고 끼고 다닐 정도로 실의에 빠져있던 포터는 자신의 전 재산을 모아 북 웨일스 힐 톱에 농장을 마련하고 이사를 한다.

베아트리체 포터가 가꾼 힐톱농장

베아트릭스 포터는 이 곳에서 정원 꾸미는 일을 하며 비로소 슬픔에서 조금씩 벗어나기 시작한다. 이웃들로부터 모종을 선물 받아 심기도 하고 인근 묘목장에 가서 나무들을 선별해 와 정원에 심었다. 정원 일을 하며 베아트릭스 포터는 서서히 치유되어 갔다.    


   난 정원 일에 흠뻑 빠졌어요, 사과나무에 액체비료를 주고 있답니다. 손잡이가 긴 국자로 비료를 주는 건 정말 재밌어요.    


<피터 래빗> 이후 그의 이름은 계속 알려져 피터 래빗 후속 편을 비롯해 여러 편의 동화도 계속 써나간다. 포터가 가꾼 정원은 그에게 더 많은 영감을 주었고 포터 동화의 주인공들은 정원 속에서 탄생한다. 자연을 배경으로 살아가는 토끼와 돼지와 쥐 같은 동물들이 포터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고 정원에서 관찰한 채소 하나, 꽃 하나, 다양한 나무들은 전부 그녀의 동화 속 생생한 배경으로 되살아났다.    

   

애완용토끼를 안고 있는 포터

이즈음 그녀가 좋아한 것은 보다 프로다운 정원사이자 농부인 자신의 모습이었다. 가을농사가 끝나면 포터는 농산물 축제를 다니고 숫양의 품종개량을 위해 새로운 양을 들이기도 했다. 자신이 하는 일에 빠져 결혼이 늦었던 포터는 47세가 되어서야 6살 연하의 남편을 만나 결혼을 한다. 결혼 후 부부는 함께 정원 가꾸는 일에 더 전념한다.

그러나 전 유럽을 집어삼킨 2차 세계 대전의 먹구름은 포터가 살고 있는 지역에까지 마수를 뻗친다. 자신의 사유지에 늘어선 잘 키운 낙엽송들을 줄줄이 갱도 버팀목으로 공출당하는 상황까지 벌어진다. 내가 이런 상황에

놓였다면 어떤 행동을 취했을까? 자신의 가치관이 분명하고 뚜렷한 사람들은 위기의 상황에서 진정한 빛을 발한다. 포터의 행동 또한 얼마나 울림이 큰 지...


포터는 주머니에 도토리를 가득 넣어 다니면서 낙엽송이 베어진 땅에 도토리를 심었다. 포터는 다음 세대를 위해 자연을 보존하는 것이 자신의 세대가 할 일이라는 생각이 분명했다. 그야말로 유럽의 < 나무를 심는 사람 >이었던 셈이다.   

 

어쨌든 남은 우리는 하던 일을 계속하고 양과 토끼, 양배추를 키워야죠, 이 레이크 디스트릭스 지역은 정말 아름답지 않나요? 히틀러는 절대 이 언덕을 망가뜨릴 수 없을 거예요, 바위나 고사리, 호수, 그리고 폭포는 우리들보다 더 오래갈 테고요.     

전쟁의 공포가 끝난 뒤에는 개발의 마수가 점점 포터가 사는 동네 근처에까지 미치는 걸 목격한 포터는 자신의 그림과 책을 판 돈을 모아 마을 주변의 땅을 계속 사들인다. 이렇게 사들인 땅이 무려 5백만 평, 베아트릭스 포터는 죽기 전 한 마디의 유언과 함께 이 땅을 전부 세계적인 민간 환경 보호단체 < 내셔널 트러스트>에 기증한다.    

자연을 자연 그대로 지켜주세요.   


그녀의 유언은 내셔널 트러스트에 의해 지금까지 잘 지켜지고 있다. 윈더미어에 있는 그녀의 정원은 베아트릭스 포터에게 영감을 주던 당시의 모습 그대로 풀과 꽃, 나무들을 보존하며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고, 영국의 유명한 관광지로 자리 잡았다.     

< 베아트릭스 포터의 정원 >을 펴낸 원예학자 마르타 맥도웰도 우연히 여행 중 이 정원에 들렀다가 베아트릭스 포터의 이야기를 알고 매력에 빠져 연구하다가 이 책을 펴내기에 이른다. 원예학자가 집필한 책답게 이 책에는 꽃과 식물에 대한 전문적인 정보도 많다. 포터의 정원을 사계절 동안 관찰하며 정원의 식물과 포터 책에 등장한 식물의 그림과 연관성도 짚고 있어 꽃과 식물에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는 색다른 재미를 줄 듯싶다. 포터가 직접 그린 100여 장의 정원 그림도 함께 실려 있어 책 읽는 즐거움에 보는 즐거움까지 더해준다.     


몇 년 전 나도 영국의 헌책방을 돌다 < 피터 래빗 > 그림책 한 권을 사 온 적이 있다. 펼쳐볼 때마다 내 시선은 귀엽고 발랄한 주인공 토끼들의 행동에 머물러 있었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나니 토끼들이 살고 있는 배경이 되는 정원과, 꽃, 나무에 새삼 눈길이 간다. 피터 래빗 가족이 사는 전나무가 있는 숲 속 정원, 그곳에 피어있는 꽃 하나, 채소 하나가 대충 그려진 그림이 아니라 베아트릭스 포터가 정성으로 가꾸던 정원에 있던 식물들이란 생각을 하니 한번 더 보게  된다.

   

영국 헌책방에서 산 베이트릭스 포타의 책

도토리와 바위, 폭포가 인간보다 훨씬 오래 있을 거라고 믿었던 베아트릭스 포터, 그녀는 이렇게 빠른 속도로 빙하가 녹고, 북극곰이 살 곳을 잃고, 온난화가 닥쳐올 것을 예상했을까? 그녀가 염려했던 것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자연이 심각한 경고음을 보내는 요즘, ‘자연은 우리 세대 것이 아니라 미래로부터 빌려온 것’이라는 사실을 백 년 전 이미 느끼고 행동했던 환경운동가 베아트릭스 포터, 5백만 평의 땅을 기증한 그녀의 마지막 부탁이 던지는 묵직한 메시지는 정확히 지금 이 세대 우리들을 겨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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