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로 그의 소식을 듣고도 나는 마트에 들러 적당한 크기의 토마토와 알이 굵고 달콤한 향이 나는 딸기를 구매했다. 내일 아침 가족들이 먹을 생과일주스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저녁에는 무엇을 먹을까, 고민하다가 시골에서 가져와 냉동실에 얼려두었던 곰탕을 꺼내 놓았다.
그리고 그를 생각하자 잠시 멍해졌다. 그의 생각은 일상 중간중간 균열된 틈을 따라 문득문득 떠올랐다가 일상에 밀려나곤 했다. 그러다 새벽녘 눈이 뜨자, 그의 죽음은 여전히 믿어지지 않았지만 생생한 현실감으로 다가왔다. 지난 12월, 그와 주고받았던 카톡을 열어 보았다.
어제 집사람이랑 공원 한 바퀴 돌았는데 하늘 보니 정말 예뻤어요.
그냥 살아있음을 감사히...
2019.12.16
그러니까 12월 16일 주고받은 이 카톡이 그와 주고받은 마지막 카톡인 셈이다. 이제 그는 카톡을 주고받을 수 없는 세상으로 떠났다는 소식이 내게 도착한 것이다.
12월 16일 카톡에 '오늘이 생일'인 친구로 그의 이름이 떠서 내가 먼저 연락을 했다. 항암 치료가 끝나가는지 묻는 나의 안부에 그는 11차 항암 치료를 막 끝냈다고 했다. 완전히 끝난 것이냐고 묻자 '재발'이라 끝을 알 수 없는 치료를 계속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한 달 반 만에 전화를 했더니 그의 아내가 전화를 받았다. 치료 중이시라 전화를 대신 받으신 걸로 생각하고 살갑게 인사를 하는데 울음 섞인 목소리로, 난데없이 부고를 전했다.
며칠 전 그믐에 남편은 하늘나라로 갔다고,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 연락을 한다고 했는데, 연락이 닿지 않았었냐고, 남편이 나와 은옥 작가 이야기를 자주 해 마치 늘 보던 사람 같다고, 젊은 날 부산에서의 기억을 좋게 간직하고 있어 나와 은옥 작가 이야기를 자주 했었다고...
그는 내가 사회로 막 첫 발을 디딘 방송국의 피디였다. 사회 초년생이자 프리랜서 작가인 우리에게 방송국은 정글처럼 무자비하고 무시무시한 곳이었다. 지금이야 '프리랜서'라는 단어가 나름 '일'과 '자유'의 균형을 원하는 능력 있는 사람들이 택할 수도 있는 직업이라는 인식이 있지만 그때만 해도 '정직원'이 최고의 가치이던 시절이라 실력을 증명할 수 없는 프리랜서들은 언제든지 사자 우리 같은 세상에 먹잇감으로 내던져져도 이상하지 않던 그런 시절이었다.
정확한 '방송작가'의 개념도 잘 없던 때라 '스크립터'로도 불리던 시절, 그는 우리들을 직원 울타리 밖의 '프리랜서' 취급하지 않고 누이처럼 대해 주던 인간적인 피디였다. 그래서 은옥 작가와 나는 그를 인간적으로 잘 따랐다. 그는 우리뿐만 아니라 프리랜서 작가들에게 다 인기가 있었다.
그와 팀이 돼서 휴먼다큐를 할 때였다. 당시 휴먼다큐 주인공들은 대부분 한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사람을 주인공으로 택해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신문이나 잡지에 뭔가 한 분야의 성과를 이룬 기사가 나면 연락을 해 방송을 하자 섭외를 하고 촬영을 하곤 했다. 그런데 그는 그런 영웅주의적인 인물이 싫다고 했다. 일상을 열심히 살아가는 평범한 주인공을 잡아 프로그램을 하자고 했다. 출입처가 있는 기자도 아닌 우리가 평범한데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을 어떻게 찾을 것인가? 지금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우여곡절 끝에 아이템을 잡았다.
시골에서 아이 셋을 데리고 상경해 노점상을 하며 아이들을 키우는 억척 어머니가 그 주의 주인공이었다. 드디어 첫 촬영 날, 길가 노점에서 장사를 하는 아줌마를 촬영하고 있는데 중학생인 딸이 하교를 하고 와서는 엄청나게 화를 내며 촬영을 거부했다. 엄마가 노점상을 하는 모습을 방송하면 부끄러워서 학교를 다니지 않겠다는 얘기였다. 촬영을 중단하고 우왕좌왕하고 있는데 그가 아이랑 둘이 이야기를 해 보겠다고 했다. 만만찮은 시련을 겪고 자란 자신의 어린 시절을 이야기하며 설득해 보겠다는 것이다. 스텝들은 밖에서 기도하는 심정으로 기다렸다.
30분쯤 이야기를 하고 나온 그의 입에서 나온 말, 촬영을 접겠다는 것이다. 스텝들이 난리가 났다. 이 촬영을 접으면 방송 펑크가 날 수도 있는 일정이었다. 방송 펑크까진 아니어도 최소한 며칠 밤샘은 예약을 해야 하는 일정이었다. "큰 딸만 방송에서 빼고 동생 둘 만 데리고 찍자, 큰 딸 얼굴 안 나오게 뒷모습만 찍자" 의견이 분분하데 그가 말했다.
방송이 뭐가 그렇게 대단하다고 사춘기 아이한테 상처 주면서까지 해야 되노? 돌아가서 다른 아이템 찾자.
결국 방송을 접고 돌아오는데 다른 스텝들이 말했다.
선배니까 이런 선택을 한다.
다양한 말들이 생략돼 있는 말이었다. " 고생은 고스란히 우리 스텝에게 돌아오는 이런 바보 같은 선택을, 방송을 펑크낼지도 모르는 위험부담이 있는 선택을, 그러나 방송보다 아이의 마음을 먼저 생각하는 인간적인 선택을' 하는 선배라는 말이었다.
어쨌든 그는 그런 선택을 했고 방송은 펑크 나지 않았다. 그 후 작가 생활을 계속하면서 그와 같은 비슷한 순간에 출연자보다 방송국의 입장을 앞세워 교묘하게 촬영을 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나는 이때 일이 떠오르곤 했다.
그 후 그는 어떤 갈림길에 섰을 때 항상 이런 선택, "바보 같은, 본인이 수고스러운 , 그리고 인간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이었다. 그와 함께 한 아이템들은 '시각장애인과 함께 사는 7살 소녀, 원폭피해 운동에 나선 2세'이런 아이템들이었다.
그런 선택을 하는 그가 늘 좋았던 것은 아니다. 갑갑할 때도 많았다. 그가 어느 정도 책임 있는 중간 간부 자리에 앉아 있을 때 내가 만든 방송가운데 편성의 어려움을 겪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그 프로그램을 위해 힘을 좀 써 달라는 부탁을 한 적이 있다. 그는 딱 '정도(正道)'를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힘을 써 줬지만 그것은 내게 별 도움이 안돼 몹시 서운했던 기억이 있다. 그는 항상 그렇게 정도 (正道)만을 걷는 사람이었다.
큰 방송국의 특성상, 지역국으로 발령을 받기도 하고, 여러 프로그램을 옮겨 다니기도 하면서 그는 항상 그렇게 '정도'로만 행동한다는 소문이 들려왔다.'정도'는 때로 그에게 불이익을 감수하는 일이 되기도 했지만 그는 태생적으로 그렇게 행동했다.
그가 퇴직을 앞두고 있을 무렵, 한 후배가 올린 글을 인터넷에서 봤다.
어마어마하게 큰 공장, 그만큼 어마어마하게 선배도 많지만 '존경하는'이라는 수식어를 붙일 수 있는 선배는 참 드물다. 그리고 오늘 그 귀한 단어를 당연하게 붙일 수 있는 선배님과 점심을 했다. 몇 달 후 퇴직을 앞두고 후배들에게 밥을 사주신 것. 정년퇴임식 때 뵙고 축하드린 후 소회를 쓸까 했는데 당신은 0점짜리 피디였다며 퇴임식도 안 오실 거란다. 하하.. 본인 성격답다 싶으면서도 섭섭함. 10년 넘은 방송국 생활에서 첫 자발적 정년 퇴임식 참석이 될 뻔했는데.
- 후배 피디의 글
서울과 부산으로 생활하는 곳이 나눠지면서 한동안 소원했는데 2년 전쯤 연락이 왔다. 중국에 있다 마침 한국에 들어온 은옥 작가와 나와 그가 오랜만에 만났다.
퇴직하고 생명공학 공부를 하고 싶어 수능 공부를 해서 수능을 쳤는데 전체 3등급 정도가 나와 가고 싶은 대학에서 떨어졌다고, 우리는 그 나이에 그 정도 성적을 받은 것만 해도 대단하다고 소소하지만 즐거운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야기 끝에 그가 항암 진단을 받아 치료 중이라는 이야기를 했다. 우리 둘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요즘 암환자는 주변에 워낙 많으니 잘 극복하시리라 생각하고 헤어졌다.
그때부터 연락하기는 더 쉽지 않았다. 안부 인사를 묻기가 어려워서였다."안녕하세요?"라거나 "좀 나아지셨어요?"라고 묻기가 쉽지 않았다. 어쩌다 연락을 할 때마다 그의 항암 횟수가 5차, 7차... 이렇게 높아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가끔 주고받는 카톡은 항상 '감사'의 인사로 마무리됐다.
"이 또한 지나가리니, 그리고 훗날 웃을 날이 오리니 감사!!!"
2019.4.3
"여튼 살아있다는데 감사하기로..."
-2019.9.11
그의 수많은 '감사'는 왜 그에게 진정한 '감사'로 돌아오지 않았을까? '죽음의 순서'는 대체 어떻게 매겨지는 것인지, 아직 살아있는 자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미스터리지만, 어쨌든 삶은 살아있는 자들의 몫이다.죽음은 '망각'이 아니라 '편재'의 '기억'이라고 하는데, 나와 은옥 작가는 만날 때마다 그에 관한 파편적 기억을 꿰맞춰가며 그를 떠올릴 것이다. 우리의 푸르렀던 청춘의 시간과 함께.
우리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이 그를 오랫동안 기억해 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