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 인상을 말하는 건데, 어리고 젊을 때의 얼굴이야
유전에 의해 만들어지지만, 사십 년을 살고 오십 년을 살면 살아온 흔적이 얼굴에 드러난다.
조금은 극단적인 비유로 50년을 햄버거만 먹은사람의 몸과 평생을 균형 잡힌 식단으로 살아온 사람의 몸은 다를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세월이 지나면 가지고 살았던 개인의 성격이 얼굴에 드러나고, 그때의 얼굴, 거기서 오는 분위기는 숨길 수 없어 인상으로 자신을 말하게된다.
“너는 몇 년 차냐”
처음 만난 고객사 사장의 첫마디였다. 영업 사원을 따라간 고객 사무실에서 그에게 명함을 건네고 들은 말이다. 초면에 반말을 하며 웃는데 담배 쩐내가 날 것 같은 보랏빛 입술은 왼쪽만 들려 누런 이빨이 보였다. 비대칭이 특기인지 눈도 왼쪽만 감겨 오른쪽 눈의 동공이 유독 잘 보였고, 침까지 흘렸으면 더 잘 어울릴듯한 표정이었다.
이어서 하는 얘기가, 우리 회사 상무랑 친한데 지금은 중국 주재원으로 나가 있어 자주는 못 봐도 일 년에 한두 번, 한국에 올 때마다 꼭 같이 만나 식사자리를 한다고 했다. 너와 나의 관계는 말하지 않아도 이미 정해져 있는 상하관계, 강자와 약자의 관계다 라는 걸 말하고 싶은 것 같았다.
그렇게 시작한 미팅을 마치고 같이 추어탕을 먹었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는데 약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사실 방문 전에 선배에게
“개진상이야”
라는 말을 들었고, 첫인사에 반말을 하길래 ‘진상이 맞는구나’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밥을 같이 먹으니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았다. 식사 자리에서의 매너나 대화 내용은 나쁘지 않았고 사무실에서 한 얘기는 업무 차원의 이야기라 '일할 때는 그럴 수도 있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적으로는 나쁘지는 않구나 라는 마음에 오히려 내가 선입견을 가지고 대한 게 아닌가싶었다.
“생각보다 괜찮은 데요?”
식사를 마치고 그와 헤어진 뒤 선배에게 말했다.
선배는
“오늘은 세경이 네가 처음 와서 엄청 젠틀했어”
라고 했다.
그리고 몇 분 뒤 선배의 핸드폰이 울렸다. 선배는 운전 중이었고 자동차와 핸드폰이 연결돼 있어 통화 내용을 들을 수 있었다. 방금 헤어진 대표였다.
“야이 개새끼야, 가격 얘기한 게 얼만데 계산서가 이래? 정신 안 차릴래?”
선배는
“제가 착각했나 보네요, 사무실 들어가면 정정하겠습니다”
라고 했다.
대표의 첫인상을 잘못 본 게 아니었다. 통화가 끝나고 선배는 나에게 가격이 틀린 게 아니라고 알려줬다. 합의된 가격이 맞는데 다음에 가격을 싸게 받기 위해 일부로 저러는 거라고, 괜히 그러는 거라고 했다. 그리고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거지 뭐” 하며 웃었다.
친절하고 착한 선배다. 사실 영업하는 데는 마냥 좋은 성향이 아니지만 어찌 됐든 선배는 그런 쪽에 가까운 사람이었다.그런 욕지거리에 대꾸 한마디 안 하고 되려 죄송하다고 하는 걸 보니 마음이 안 좋았다.오는 길에요새 업무 때문에 짜증이 늘었다고, 에너지가 많이 소진됐다고 말한 게 떠올랐다.
단지 물리적으로 바쁜 문제, 업무의 절대량이 문제가 아니었다. 하루에 한 번 정도는 그 사람이랑 통화를 해야 하며, 주말에도, 밤 11시에도 전화가 온다고 했다. 일상화된 갑질을 당하고 있었다.
사무실에 들어온 선배는 대표의 말마따나 영업 팀장에게 가격을 내려야 한다고 보고했다. 하지만 팀장은 선배에게
“네가 OO 아들이야!?”
라며,왜 가격을 깎아야 하냐고 소리쳤다.
선배는 고객에게도 쌍욕을 먹고, 왜 다시 회사에서도 혼나야 할까. 이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
회사 생활이 힘든 건 스트레스 때문이다. 회사 생활, 조직에서 생활을 한다는 것은, 9시에서 6시까지 주어진 일을 성실히 처리하는 게 다가 아니다. 둘레길을 걷는 것처럼 자기만의 템포로 묵묵히 걷기만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회사가 굴러가기 위한 조직 안의 마찰과, 인간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견뎌야 한다. 때로는 성취감이없고 의미를 찾을 수 없는 일도해야 한다.
‘도대체 이 걸 왜 해야 하는지 모르겠어’ 하는 때도 있는 것이다.
품질 팀에서 일하는 동기는 그런 일을 하다가 머리에 원형 탈모가 생겼다. 고객사가 가격을 깎기 위해 품질 문제를 만들어 컴플레인을 한 것이다. 동기는 해당 제품의 결점을 찾고 원인을 분석했지만 아무 문제도 찾지 못했다. 알고 보니 가격 조정을 원하는 고객과 그게 싫은 영업팀의 줄다리기에 끼인 것이다.
스트레스가 컸는지 녀석의 머리에는 50원짜리만한 탈모가 10개나 생겼다. 그걸 처음 발견한 건 엄마였고 녀석은 혼자 서울 살이하는 딸이었다. 딸내미 머리의 구멍을 보고 그녀의 엄마는 울었고, 옆에 있던 이모도, 그녀도, 모두 울었다. 치료는 시작했지만 언제 나을지는 모른다는 게 병원의 소견이다.
회사 생활을 버텨내기 위해선 자기만의 스트레스 대처법이 필요하다. 스트레스를 건강하게 해소하는 방법도 있지만 굳이 안 받아도 되는 스트레스는 피하는 게 좋다. 잘못한 게 없어도 개새끼라고 욕을 먹고, 의미 없는 일로 머리에 구멍이 생기는 일은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노력한 만큼의 보상까지는 아니라도 최소한의 성취감을 느끼고 나름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일을 하고 싶다. 회사를 위한 것도 아니고 나를 위한 것도 아닌, 다른 누군가의 이익에 끼어 소모되는 일은 피하고 싶다.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고 하라면 하라는 대로 하는 게 조직이 원하는 자세일 수 있어도 아무리 생각해도가치를 찾을 수 없는 일에 마모당하고 싶지는 않다.
한 번 사는 인생이고 하루를 살아가는 에너지도 한정되어 있다. 되도록이면 보다 의미 있고, 보다 성취감 있는 일들에 에너지를 쏟고 싶다. 나의 회피가 누군가에게 피해가 되지 않는한피할 수 있는 스트레스는 피하는 것. 더 긴 회사생활을 위한 하나의 작은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