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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추세경 Sep 07. 2020

달을 사랑한 운명에 대하여

지나간 시간 이야기

산다는 것은 과거의 나와 이별하는 것이다.


우리는 과거의 시간과 이별하고 있다. '살아있는 가장 젊은 날은 오늘이다'라는 말처럼 어제의 나와 이별한 오늘이고 오늘의 나와 이별할 내일이다. 그렇게 하루하루, 더 작게는 매분 매초, 우리는 과거의 나와 이별다. 좋아하던 노래를 듣고 과거를 떠올리는 것도 어쩌면 지나간 시간에 대한 그리움 때문인지도 모른다. 힘들었던 시절의 노래와 행복했던 시절의 노래, 그런 게 아닌 소소했던 일상의 노래도 찬가지다. 디오에 흐르는 익숙한 멜로디에 눈시울이 붉어지면  시간이 그리워서 그런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지 날은 그리움으로 남아 추억이 되고 추억이 된 거의  마음 한편 어딘가에 아 있다.


현대 물리학에서는 시간을 상대적이라고 본다. 그리고 그것이 흐르는 방향이 여러 개라는 이론도 있다. 하지만 현실을 사는 우리에게 시간은 어찌할 수 없는 흐름이다. 해가 지면 달이 뜨고 달이 지면 해가 뜬다. 그리고 다시 해가 지면, 다시 달은 뜬다. 그것은 되돌릴 수 없고 그렇게 시간은 흘러간다. 러니  우리의 가장 젊은 날일 수밖에 없다. 지나간 시간과 돌아갈 수 없는 과거, 거기에 남은 나,  '과거의 나에 대한 그리움', 그것의 다른 지도 모르겠다.




2주 전 토요일이었다. 광복절을 기점으로 코로나 확진자가 급증하고 있었다. 예정된 축구 시합 일정이 줄줄이 취소됐다. '어쩔 수 없지~', 하고 있었는데 같이 축구하는 동료들에게 연락이 왔다. 시합은 못해도 몇 명이라도 연습을 하자는 것이다. 답하던 마음에 뭐라도 해야겠지 싶었고 별 고민 없이 알겠다 다. 그렇게 목동에 위치한 공원에 다섯 명이 모였다. 장마가 지나간 높은 하늘은 가을이 오기만을 기다리는 것 같았 밑의 잔디는 푸르렀. 답답하던 마음이 조금 누그러졌다.


그런 감상도 잠시, 이내 훈련 용 콘을 깔아 놓고 연습을 했다. 놀자고 만났지만 노는 게 아니었다. 놀이보다는 훈련에 가까운 연습이었다. 콘 사이를 지나며 순발력을 기르는 훈련부터 1대 1 드리블로 수비를 제치는 훈련지, 땀이 쪽 빠질 만큼  숨을 헐떡거기도 했다. 그렇게 힘들게 2시간을 보냈으니


'다시는 이런 거 안 해!'


라고 할 만도 했지만 그런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정말 행복했다. 단지 오랜만에 축구를 했다는 기쁨 이상의 무엇이 있었고 알 수 없는 흥분감은 종일 마음을 들뜨게 했다. 집에 와서 글을 쓰는데도 계속 축구 생각이 머리를 맴돌았다. 잘 보지도 않던 유튜브로 축구 영상을 찾아보기도 했고 좋아하는 선수인 리오넬 메시의 경기 영상을 다시 보기도 했다. 잘 때가 돼서야


 그렇게 좋았을까


라며, 하루 종일 흥분 상태였다는 걸 깨달았다.




순간이 영원할 거라는 착각을 했던 적이 많다. 정말 좋고, 정말 행복하면 그런 순간이 영원할 것 같다고 생각하곤 했다. 이 친구들과는 평생 지금처럼 좋을 거야, 이 모임은 평생 이렇게 흥할 거야 라는 식이었다. 어떤 모임이 흥하면 한동안은 카카오톡 채팅방이 활기를 띤다. 카톡이 하루에 수천 개씩 쌓이고, 쌓여있는 대화는 읽기만 해도 웃음이 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환경이 바뀌면 언제 그랬냐는 듯 조용해다. 예전에는 가 한마디만 해도 부리나케 답장들이 왔는데 지금은 읽었다는 숫자만 사라지고 답장하는 사람은 없다. 그의 말은 사라지는 연기처럼 흐릿하게 남 있 누군가 애써 답장을 하지만 그런 대화는 묘하게 빠져 맥락 없이 끝이 난다. 그런  몇 번 반복되면 일주일이 지나도 이주일이 지나도 더 이상의 대화는 없다. 채팅방은 핸드폰 화면 밑으로 밀려나고 동력을 잃은 모임은 서서히, 그런 식으로 천천히, 지나간 과거가 된다.


그렇다고 그들과의 관계가 끝, 이제는 끝, 이라는 말은 아니다. 관계가 이어지더라도 한창 즐거웠던 순간, 채팅방을 불나게 했던 그때의 기쁨 계속될 수 없는 말이다. 한마디로


'그때의 즐거움은 끝났다'라는 것이다.


평생 가는 친구와 평생 가는 모임도 많겠지만 관계의 모양과 거기서 오는 감은 시간이 흐르면 변하기 마련이다. 더 깊어지거나 더 편해지는 관계가 될 수도 있고 의무감으로 이어는 관계가 될 수도 있지만, 중요한 건 좋든 나쁘든 관계는 변한다는 것이다. 멈춰 보이는 시계의 시침이 움직이는 것처럼 영원할 것 같았던 관계 시간이 지나면 있다.




축구 연습을 하고 하루 종일 흥분했던 이유는 잠깐이지만 23살의 나를 만났기 때문이다. 매일 축구만 했던 23살의 나. 단지 놀고 싶어서 그랬던  아니고 축구협회에 등록된 정식 선수가 1년 동안 축구 학원을 다녔다. 학교 강의를 오전에 몰아넣고 오후에는 축구만 했다. 운동장 7바퀴를 전력으로 뛰다가 구토를 한적도 있지만 그래도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미래에 대한 걱정을 미루고 좋아하는 것을 잘하기 위해  시간이었 때문다. 그때 몸에 흐르던 땀방울과 잔디의 촉감, 그 위에 바라보는 밤하늘, 힘들었지만 행복했고 살있음을 느낄 수 있었. 축구는 나에게 꿈이자 목표였고 친구이자 연인이었다. 그렇게 매일 공만 찼고 축구 생각만 했다. 축구가 주는 행복이 영원할 거라는 생각도 했다. 만으로도 행복했다.


하지만 학생 신분이 끝나고 회사 생활을 시작하면서 축구와는 멀어졌다. 그렇다고 아예 축구를 안 다는 말은 아니지만 옛날처럼 맨날 축구만 하며 살 수는 없었다. 돈도 벌어야 했고 인간 관계도 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축구가 인생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낮아졌다. 지금은 일주일에 한 번 스트레스를 푸는 정도랄까, 그마저도 코로나 이후로는 못하고 있고, 맨날 만나던 친구를 가끔 한번 보는 것처럼 축구와 나의 관계는 그렇게 달라졌다.


훈련을 한 토요일 오전, 몸도 마음도 흥분했던 이유는 몸에 새겨진 그때의 감각들 당시의 나를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토요일 오전에 했던 연습은 23살에 죽기 살기로 했던 훈련과 똑같았고 근육이 기억하는 그때의 감각들은 그 시절 나를 데려갔다. 달빛 비치는 잔디를 뛰어다니던 감상과 살아있다는 실감, 몇 년  몸에 돌아온 감각들, 그게 나를 흥분시켰다.



살면서 가끔은 그렇게 보낸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도 했다. 그 시간에 공부를 하고 대외활동을 했으면 지금보다 높은 월급을 받고 (남들이 보기에) 더 그럴듯한 일을 하고 있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축구를 조금 덜고 다른 일을 했으면 현실적인 사정이 지금보다 나았지 않았을까,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결국에, 비록 불가능한 일인 걸 알아도, 의 나로 돌아갈 기회가 있다면 그때도 같은 시간을 보내지 않을까 싶다. 후회가 없지는 않아도 선택은 바뀌지 않는다는 말이다. 발목을 다친 후에는 '그만해도 되겠다'라며 포기했그래도 1년간 흘린 땀방울은 긴 인생을 살아갈 자양분이 되었다.


덤으로 배운 게 있다면, 아무리 좋아하는 일도  업으로 삼으면 마냥 즐겁지만은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때로는 그게 정말 괴로운 일이 될 수 있음도 배웠. 하지만 사회생활을 하다 보니 나라는 사람은 그래도 동기부여가 안되고 애정이 안 가는 일보다는 스로 즐거워서 하는 일에 훨씬 더 정을 느끼고 보람도 느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도 깨달을 수 있었다. 어쩌면 지금 고 있는 글쓰기도 많은 부분이 그때의 경험에 빚을 지고 있다. 과장하자면 그때 축구를 배우지 않았으면 '추세경', 글 쓰는 내가 없었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시간은 흐르고 영원한 건 없다. 카카오톡 채팅방이 소멸해가는 것처럼, 축구와의 거리가 멀어지는 것처럼, 그때만의 행복이 있고 그때만의 열정이 있다. 따라서 흐르는 시간 속에 되돌릴 수 없는 것 아쉬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때로는 그게 슬프고 가끔은 그게 그리워도, 보다 중요한 건 지나가버린 과거가 아니라 오늘을 사는 지금, 가장 젊은 날인 오늘이다.


현재의 시간영원할 수 없기에 소중하고 그러기에 귀중하다.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야 시간이 지나서도 회가 없다. 영원한 것은 없으니 이 순간에 최선을 다하자는 말이다. 어차피 지나갈 감정이고 어차피 달라질 관계다, 라며 지금의 시간을 허투루 보내는 게 아니라 오늘의 행복은 지금, 여기에서, 너랑만 느낄 수 있는 감정이니 그것을 더 소중히 하고 싶다는 말이다.


철학자 니체는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자고 이야기했다. '아모르 파티(Amor fati)*'라는 인데 삶의 필연성을 긍정하고 주어진 운명을 사랑하자는 말이다. 늘 하루 마주하는 일들에 최선을 다하고 거기서 오는 감정은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드는 것. 그렇게 지나간 일들은 추억으로 마음에 담아내는 것. 루하루 더해진 추억으로   깊고, 보다 더 풍요로운 존재가 되는 것. 그게 내가 살아가 방법이고 주어진 운명을 사랑하는 방법이다.








*아모르 파티 :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47XXXXXd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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