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왔다.
이번 여름은 별로 덥지 않았다. 어느 해보다도 장마가 길었기 때문이다. 역대 가장 오래도록 비가 내렸고 길었던 만큼이나 많은 비가 내렸다. 그래도 시간은 가는지 입추를 보내고 말복을 지나 어느새 9월이 왔다. 장마가 지나면 무더위가 올 줄 알았지만 벌써 새벽에는 선선한 공기가 코 끝을 반긴다. 가을 추(秋)로 시작하는 이름처럼 태어난 것도 10월 7일인 나는 가을을 좋아한다. 나의 계절이 왔다.
어느덧 글을 쓰기 시작한 지 1년이 되었다. 작년 10월부터 글쓰기를 시작했으니 개월 수로 따지면 12개월째 글을 쓰고 있다. 처음에는 혼자서 쓰기 시작했지만 2월부터는 브런치를 통해 1~2주에 한 번씩 글을 게시하고 있다. 글을 쓰다 보니 감사한 일이 많이 생겼다. 내 마음을 돌아볼 수 있었고 그 안에 있던 스스로의 상처를 어루만질 수 있었다. 그런 나의 이야기에 위로를 받았다는 분들도 있었고 덕분에 '나를 위한 글이 당신에게도 위로가 되길', 이라고 적은 작가 소개란의 다짐과 같은 1년을 보낼 수 있었다. 열심히 쓴 스스로에게도, 정성껏 읽어준 독자분들에게도,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이다.
글쓰기를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쓰고 싶었던 주제는 나를 사랑하기 위해 노력했던 시간에 대해서다. 20대 초반에 '나는 자존감이 낮구나'라고 생각한 이후로 그런 마음을 바꾸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왔기 때문이다. 마음을 위로해주는 에세이와 심리 관련 자기 개발서도 많이 읽었고, 매일 밤 잠에 들기 전에는 '나는 나 스스로 소중하다, 추세경으로 태어나서 감사하다'라는 문구를 일기장에 적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 '이제는 자존감이 높아졌다'라고 느낀 건 20대 후반이니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노력했던 방법이 틀렸을 수도 있고 마음이 변한다는 게 원래 그렇게 어려운 것일 수도 있지만 결과적으로 나는 변할 수 있었고 그런 과정에서 느낀 것들을 글로 남기고 싶었다.
2018년에는 자존감 열풍이 불었다. 그래서 시중에도 자존감을 주제로 한 책이 많이 나왔다. 심리학자나 정신과 의사들이 출간한 책도 있었고 에세이 작가들의 책도 더러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저자가 자존감을 높이려고 노력했던 경험에 대한 책은 별로 없는 것 같다. 그리고 조금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설사 그런 책이 많다 하더라도 당장에 내가 쓸 수 있는 소재는 그것밖에 없었다. 치킨 시장이 아무리 치열하다 하더라도 내가 가진 재료는 닭과 기름 그리고 튀김가루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왕 글을 쓰기로 한 이상 내가 쓸 수 있는 글을 쓰자고, 아름다운 시도, 매력적인 소설도 아니지만 내가 가장 잘 쓸 수 있는 이야기, 당장이라도 쓸 수 있는 글을 먼저 쓰는 게 맞겠지 싶었다.
따라서 2021년 출간을 목표로 하는 나의 책 <왜 나는 나를 사랑하는가>는 자존감을 높이기 위한 노력과 거기서 얻은 여러 가지 감상들에 대한 에세이다. 그리고 그렇게 달라진 마음으로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내용도 담으려고 한다. 책은 크게 네 부분으로 나뉜다. 첫 번째는 감사일기에 대해서다. 감사일기 덕분에 나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너를 먼저 사랑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나의 모습을 인정하는 내용에 대해서다.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나의 단점도 조금만 달리 보면 장점이 될 수 있다는 것, 비록 어렵더라도 그게 나의 일부임을 인정해야 마음이 편해진다는 것, 그런 마음의 변화에 대해서 쓰고 싶다. 세 번째는 기준의 이동에 대해서다. 예전에는 남의 시선으로 나를 평가했다면 이제는 스스로 정한 기준에 따라 나를 판단한다. 비록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받지 못하더라도 나만의 기준을 가지고 거기에 맞게 살아가는 게 나를 사랑하는 방법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는 연대에 대해서다. 스스로를 사랑한다는 것은 나를 둘러싼 환경, 그중에서도 나와 관계하는 가장 가까운 지인들을 사랑하는 것이었다. 그들과 함께 연대하는 삶이 내 인생을 사랑하는 방법이다_라는 내용을 책에 싣고 싶다.
이번 책은 늦가을의 낙엽 같은 책이 되었으면 좋겠다. 바스락 밟히는 낙엽처럼 그렇게 마음에 편한 울림을 주는 책이 되면 좋겠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언어 표현의 우수성은 진부하지 않으면서 명확한 데에 있다'라고 했다. 내가 쓰는 글도 그러기를 바란다. 일상을 이야기 하지만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글은 아니기를 바란다. 쉽고 편하게 읽히지만 마음을 울릴 수 있는 글이기를 바란다. 하여 울림 없는 구호가 아니라 진심으로 느낀 바를 표현하는 책이 되기를, 떨어진 낙엽처럼 편안하게 다가오는 책이 되기를, 그렇게 따뜻하고 담백한 그런 책이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