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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추세경 Oct 29. 2020

스마트폰의 노예? 별로야 별로

핸드폰 없이 살아본 적이 언제였지?


포노 사피엔스란 스마트폰 없이는 살기 어려운 인간을 말한다. 2015년 영국의 '이노코미스트'라는 주간지에서 처음 쓴 표현인데 2019년에는 우리나라의 어떤 공학 교수가 같은 이름으로 책을 출간하기도 했다. 책을 사러 갔던 서점에서 알게 되었고 굳이 사전을 찾아보지 않아도 떤 의미인지 짐할 수 있었다. 나 역시 스마트폰 없이는 일상이 어, 그런 사람이기 때문이다.


출퇴근하는 지하철을 타면 포노 사피엔스 시대를 실감할 수 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스마트폰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유튜브나 영화를 보는 사람, 게임을 하거나 웹서핑을 하는 사람 등 각자의 취향대로 그것을 즐기고 있지만 지하철의 그 많은 사람 중에도 스마트폰을 보지 않는 사람은 10명에 1명도 안 되는 것 같다. 언젠가 한 동생이 '스티브 잡스가 세상을 바꿨다'라고 표현했는데 과장된 말이 아니었다. 스마트폰은 모든 사람의 매분 매초를 바꿔놓았고 이제는 스마폰 없이는 살기 어운 시대가 되었다. 모두가 스마트폰에 의존하는 시대, '포노 사피엔스'의 세상이 열렸다.




사람들은 스마트폰으로 뭘 할까. 내 경우를 말하자면 카카오톡 전화, 유튜브와 브런치, 종 웹서핑 등을 한다. 전화와 카톡으로는 사람들과 소통을 하고 유튜브를 통해서는 재미있고 자극적인 영상을 즐긴다. 브런치로는 자기 계발을 하고 웹서핑으로는 뉴스를 보거나 맛집을 검색한다. 크게 네 가지 활동이라고 할 수 있는데 소통과 놀이, 자기 계발과 정보 검색이다.


인간은 늘 외롭고 늘 심심하다. 그래서 폰 놓지 못하는 게 아닌가 싶다. 그리고 앞서 말한 것처럼 스마트 폰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생각보다도 훨씬 많다. 재미도 있고 기능도 좋으니 폰을 놓지 못하는 것이다. 주로 어떤 목적으로 사용하는지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살면서 필요한 많은 것들을 해결할 수 있다. 예전 같았으면 TV와 전화기 그리고 컴퓨터가 하던 역할을 이제는 스마트 폰 하나 해결해준다. 그러니 폰에 자꾸 손이 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배터리가 5%로 내려가찾아오는 불안이 사실은 이상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 TV 하나에도 중독되는 게 사람인데 이렇게 모든 걸 해주는 기계를 어떻게 놓을 수가 있겠는가.

 



하지만 스마트폰의 노예가 되기싫다. 그래서 애써 멀리하려고 노력하는데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다. 일부로 주머니에 넣는가 하면 집에 있을 때는 최대한 몸과 떨어트려 놓는다. 하지만 어느샌가 손은 폰을 찾아 잠금화면을 풀고 있다. 카톡이 온 게 없는대도 수시로 카톡창을 확인하고 검색할 게 없는데도 자꾸 다음(Daum) 메인에 들어간다. 알림 온 게 없어도 자꾸 폰을 들여다본다. 알람 설정을 '소리'나 '진동'으로 해놓은 걸 알면서도 자꾸 그런 식이다. 소리나 진동이 없다는 것은 그 자체로 새로 확인할 것이 없다는 것인데 그래도 다시 폰을 열어 오지 않은 알림을 확인한다. 알림이 없어 알람이 없는 것인데 알람이 없는 게 정말 알림이 없는 것인지 증명하고 싶은 것이다. 폰을 껐다 켰다, 화면을 올렸다 내렸다, 어플을 켰다 껐다, 그리고 다시 만지작만지작, 이런 걸 계속 반복한다. 카톡을 열어 메시지가 없음을 확인해도 아까 읽었던 대화를 다시 읽는다. 그러다 다시 폰을 끄고 그러다 다시 폰을 켠다. 재미도 없고 눈도 아픈데 폰에서 손을 뗄 수 없다. 이미 그의 노예인 것이다.


그게 왜 그렇게 스트레스냐고, 문명의 변화를 거부하는 거냐고 라고 물으신다면 그건 아니라고 하고 싶다. 원자 폭탄을 터트려 모두가 평등한 세상으로 돌아가고, 도끼로 사냥하던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가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2020년에 적응을 해야 한다고, 가끔이지만 때로는 얼리 어답터도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래도 되도록이면 스마트 폰에 빠져 그것만 쳐다보는 사람은 되기 싫다는 것이다. 내가 필요하고, 내가 원할 때만 스마트 폰을 만질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스마트 폰이 나를 소비하는 게 아니라 내가 스마트 폰을 이용하는 사람, 울리지 않는 알림에 의연할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말이다.




스마트폰은 욕구 해소를 위한 맥도널드라고 생각한다. 마음의 허기를 달래주는 버거킹이고 감정을 해소시켜주는 롯데리아다. 허기를 빠르게 해결해주는 패스트푸드처럼 스마트폰은 우리의 외롭고 허기진 마음을 빠르게 채워준다. 유튜브의 알고리즘은 우리의 심심함을 '알아서' 위로하고 카카오톡이나 인스타그램은 외로움을 해소해주는 창구가 된다. 그래서 자꾸 알림을 기다리고 그래서 계속 폰을 만지는 것이다. 스마트덕분에 적적할 틈이 없.


하지만 햄버거가 우리의 건강책임지지 못하는 것처럼 스마트 폰으로 채우는 마음의 허기도 마찬가지다. 빨라서 좋고 맛도 좋지만 그것만 먹다 보면 마음이 오히려 망가질 수 있다. SNS로 주고받는 일 대 다수의 소통보다는 누군가와 하는 개인적인 연락이 낫다고 생각한다. 문자로 주고받는 대화보다는 전화가 낫고, 더 좋게는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하는 게 최고라고 생각한다. 얼굴을 마주하고 목소리를 들을 때 가장 깊은 소통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그렇게 해야 가장 덜 외로워지는 게 아닐까 싶다.


아무리 SNS에 자기 이야기를 올려도 불특정 다수가 해주는 공감은 왠지 모르게 부족하다. 인스타그램으로 아무리 하트를 받아도 소수의 지인이 진심으로 기뻐해 주는 것보다는 못하다는 말이다. 감정이 차오르고 그걸 누군가에게 알리고 싶으면 카카오톡 채팅방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기댈 수 있는 누군가에게 이야기하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SNS에 털어놓는 감정은 벽에 던지는 계란처럼 그대로 날아가 터질 뿐 누군가에게 닿을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렇게 공감 없이 사라지는 감정은 우리를 점점 더 외롭고 점점 더 고독하게 만든다. 잠깐은 위로받는 것 같아도 결국은 여전히 외롭고 그래서 자꾸 폰의 알림만 기다리게 된다.


스마트폰에서 얻는 재미도 마찬가지다. 자극적인 유튜브나 기사, 짧고 웃긴 짤방도 좋지만 누군가의 정수가 담긴 책이나 혼신의 힘으로 만든 영화를 보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물론 스마트폰으로도 양질의 콘텐츠를 수 없이 찾을 수 있고 이제는 영화  폰으로 즐길 수 있지만 내가 걱정하는 부분은 단지 쉽고 빠르다는 이유로, 간편하고 자극적이라는 이유로 무분별하게 소비되는 콘텐츠가 스마트폰의 성장과 함께 엄청나게 늘었다는 점이다. 그런 콘텐츠에 기대다 보면 좀 더 진국인, 좀 더 영양가 있는 재미들을 놓칠 수 있다. 제목만 자극적이고 시각적으로만 눈을 끄는 콘텐츠들이 사회 문제로 요즘 뉴스가 되는 걸 보면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이 크게 틀린 말은 아니지 싶다. 유명인의 사생활, 그것도 허위 정보로 만들어진 유튜브가 우리에게 과연 좋을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비록 재미는 있을 지라도 단지 잠깐의 흥분됨, 그냥 잠시의 자극이 아닐까 싶다.




나는 한 달에 두세 번은 햄버거를 먹고 특별히 어떤 활동을 하지 않을 때는 10분에 한 번은 스마트폰을 본다. 햄버거처럼 가성비 좋은 음식은 없다고 생각하고 유튜브처럼 재미있는 콘텐츠도 드물다고 느낀다. 결국에는 나도 한 손에는 버거킹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스마트폰을 즐기는 포노 사피엔스라는 말이다. 하지만 그래도 조금은 더 건강한, 조금은 더 주인이 되는 포노 사피엔스가 되고 싶다. 되도록이면 외롭지 않고, 보다 건강하게 문명에 적응하고 싶다. 폰이 주는 유혹에 매일같이 맞서고 그와의 줄다리기에서 지지 않을 생각이다. 소비되지 않고 소비할 수 있도록, 노예가 아닌 주인이 될 수 있도록, 그렇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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