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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추세경 Sep 26. 2021

운명이라는 병명

"사람이 자기 운명을 앞서려고 해서는 안 된다"


89년을 살아오신 할머니는 자식들이 모두 성하고(건강하고) 이렇게 추석날 함께 모일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고 하셨다. 과한 욕심을 부리면 안 된다고, 사람은 자기 운명을 이기려고 하면 안 된다는 말씀이었다.


운명이란 모든 것을 지배하는 초인간적인 힘, 앞으로의 생사나 존망에 관한 처지를 뜻한다. 인생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 이미 정해져 있다고, 사람마다 각자 주어진 삶이 있다는 이야기다. 


운명이라는 말은 매력적이다. 현실이 버거운 사람들은 미래 궁금하기 때문이다. 사는 게 힘들 때 우리는 운명을 생각한다. 이건 내 잘못이 아니라고, 노력해도 어쩔 수 없는 운명이 있다고 여긴다. 그리고 때로는 그 운명을 사랑하고 노력한다. 그래야 조금 덜 슬프기 때문이다.


한 번은 엄마가 사주를 보신 적이 있다. 평소에 엄마는 그런 걸 멀리하시는 분 하루하루 성실하면 된다고 말하시는 분이지만 같은 회사 직원이 그런 공부를 하셨다기에 한번 보셨던 것 같다. 자세히는 물어보지 않았지만 아마 그랬던 것 같다.


그분은 엄마에게 아들은 '간이 약하다'라고 하셨다. 그 얘기를 듣고 엄마는 나에게 술을 조심하라고, 무리하며 생활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 말씀에는 나도 동의했다. 나는 술을 한잔만 먹어도 얼굴이 빨개지는 체질이었기 때문이다. 술을 아예 못 는 건 아니지만 주량이 약했다. 억지를 부리면 소주 한 병 이상도 마실 수 있지만 이내 구토가 나오거나 잠에 들곤 한다. 간이 좋아야 주량이 세다고 알고 있으니 간이 약하다는 그분의 말씀은 내 체질과 맞아 보였다. 생년월일만 가지고 그런 걸 맞추니 그저 신기할 뿐이었다. 그래서 나에게는 하나의 믿음이 생겼다. 나는 간이 약하다고, 그게 내 운명이라고 말이다.


7월 이후로 컨디션이 별로였다. 쉽게 피곤해졌고 자꾸 몸에 알레르기가 생겼다. 병원에서 처방받은 피부 연고를 발랐지만 자꾸 다른 부위에도 병변이 올라왔다. 피부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몸 전체의 면역이 약해진 것 같았다. 회사에서 회식을 무리하게 한 이후에 시작된 것 같았고 결국 이번에도 간이 말썽이구나 싶었다. 맞다... 나는 간이 약했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 친구는 그런 내 상태를 알고 한의원에 가서 체질 검사를 받아보자고 했다. 선배가 자주 다니는 괜찮다는 곳이었다. 혈압을 쟀고 맥파 검사를 받았다. 맥파 검사란 손가락에 집게를 대고 맥박과 심박, 스트레스 지수 등을 확인하는 검사였다. 검사 결과표를 손에 들고 내 맥박을 짚어본 한의사 나에게 궁금한 게 있냐고 물었다. 반짝이는 롤렉스 시계에 금반지를 끼신 분이었다. 넓고 동그란 얼굴에 목소리가 힘차 환자들이 신뢰것 같은 인상이었다. 특히 어른들에게 인기가 을 것 같았다.


선생님에게 나의 체질과 간 건강이 피부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물었다. 피부자꾸 가려운 게 체질 때문이냐, 체질적으로 간이 약한 거냐, 간이 약해서 피부아픈 거냐고 물었다. 근데 선생님의 대답은 외였다. 나의 체질은 태음인이고, 태음인은 간이 건강한 체질이라고 했다. 맥을 짚었을 때도 간은 건강하다고 했다. 다만 태음인은 장과 폐가 약하니 운동을 꼭 해야 한다고, 유산소 운동으로 땀을 흘려야 건강하게 살 수 있다고 했다. 우스개 소리로 태음인은 군인이나 운동선수 아니면 막일을 해야 한다고 했다. 그만큼 몸을 많이 움직여야 건강할 수 있는 말이었다.


생각해보니 거리 두기 4단계 이후로는 유산소 운동을 다. 일주일에 한두 번 하는 축구가 유산소 운동의 전부였는데 거리 두기 때문에 그걸 못하고 있었다. 시기가 겹쳐 회사에서는 스트레스가 많았고 주식시황도 좋지 않았다. 약속이 겹쳐 술자리도 잦았다. 운동은 전혀 안 하는데 스트레스는 늘었고 몸에 안 맞는 술도 자꾸 마셨다. 그러니 몸이 쳐질 수밖에 없었다.


선생님은 말했다. 체질적으로 폐와 장이 안 좋으면 알레르기가 생길 수 있다고, 그게 피부나 비염으로 올 수 있다고 하셨다. 간이 안 좋아서라기 보다는 폐와 장 쪽의 문제로 보인다고, 그러니 운동을 많이 하라고, 그러면 나아질 거라고 하셨다.


사실 머리가 크고 나서는 의사의 말을 전부 믿지는 않는다. 전혀 신뢰를 안 한다는 말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주는 모든 이야기를 믿지는 않는다. 환자를 위하지 않는 의사도 있고 그게 어떤 분야든 사물이나 현상을 100% 알고 있는 기술이나 학문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잠깐의 대면 진료로 나의 상태를 온전히 파악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혹시 정밀 검사를 하더라도 '알 수 없는 것은 알 수 없다'라고 생각한다. 조금 죄송하지만 나의 맥을 짚어 주신 선생님의 말씀을 진리처럼 생각하지는 않는다. 혹시 틀렸을 수 있음을 염두에 두고 다.


그럼에도 그분의 말을 신뢰하는 이유는 나의 간 건강에 대해서 이야기해준 최초의 전문가이기 때문이다. 간이 안 좋을 거라는 나의 믿음은 그저 술을 약하다는 생각과 명리학을 공부했다는 어떤 분의 말씀 한번 때문이었다. 전문가의 말도 제대로  믿으면서 단순한 몇 가지 사실간이 약하다는 명제를 진리처럼 여기고 살았다. 몇 분의 대화로 그 믿음은 깨졌고 불현듯 건강검진에서 간수치 결과가 좋았던 게 떠올랐다. 랬음에도 나에게는 간이 약하다는 인식이 뿌리 깊게 박혀 있었다. 약한 간 나에게 운명과 같았기 때문이다.


때때로 사람은 잘 못된 믿음으로 평생을 살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언젠가 엄마가 나에게 태어난 시각을 잘못 알려줬다고 말해준 게 떠올랐다. 사주 얘기를 하고 몇 년이 지난 뒤였으니 엄마도 잘못된 시간으로 사주를 보셨을 것이다.


인간은 제한된 정보 속에 각자만의 믿음을 가지고 살아간다. 나이가 들수록 고집이 세지는 이유는 러 가지 경험자기가 믿는 대로해석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믿음은 인생의 어느 순간 잘못된 선택의 단초가 되기도 한다. 이번 계기가 아니었으면 나는 간이 안 좋음을 운명으로 믿고 몸이 안 좋을 때마다 매번 간을 탓하며 살았을 것이다. '간 때문이야'를 외치며 우루사와 밀크시슬을 먹으며 지냈을 것이다.


할머니의 말씀처럼 인간은 운명 앞에서 작은 존재일지도 모른다. 운명을 앞서려고 해서는 안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운명을 받아들이기에 앞서 엄마의 말씀처럼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보아야 한다. 주어진 일들에 최선을 하며 때때로 찾아오는 선택의 순간 조금 더 후회 없는 선택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후에 다가오는 삶은 새로이 받아들이면 된다. 운명이라 믿고 하루하루 성실하게 살아가면 된다.


게을리하던 유산소 운동을 다시 열심히 해야겠다. 축구를 하니 됐지 뭐,라고만 생각하지 말고 축구를 하지 못할 때도 조금 더 뛰고 한번 더 걷기 위해 노력해야겠다. 그렇게 폐와 장을 건강히 해서 면역을 높여야겠다. 알레르기의 운명을 거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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