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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추세경 Dec 07. 2021

겨울의 노래를 들어라

노래는 시간을 담는다. 나윤권과 별의 <안부>, KCM의 <흑백 편지>를 들으면 독서실과 PC방이 있던 공릉동의 시장 골목이 생각난다. 브라운 아이즈의 <벌써 일 년>에는 야자를 마치고 집에 가던 고등학교 하굣길이 담겨있다. 학교가 끝나고 지나던 어두운 지하차도는 주황빛의 LED 등으로 빛났고 손에 쥔 MP3 에는 노래 제목이 깜빡이곤 했다.


음악을 듣지 않는 날은 없다. 집에서는 스피커로, 밖에서는 이어폰으로 듣는다. 장소와 시간이 어떻든 매일 음악을 듣는다. 어떤 유투버는 대중문화 중 가장 많이 소비되는 게 음악이라고 했다. 콘텐츠 시장 중 음악 시장이 가장 크다고, 사람들은 음악을 가장 좋아한다고 했다. 통계나 숫자로 증명할 수 있는 주장인지는 모르겠지만 고개를 끄덕일 만한 이야기였다. 나 역시 가장 꾸준히, 가장 많이 즐기는 게 음악이기 때문이다.


음악을 잘 아냐,라고 하면 그건 아니다. 확고한 음악 취향이 있거나 특정 가수의 앨범을 애타게 기다리는 건 아니다. 남들은 모르는 나만의 아티스트가 있는 것도 아니고 즐겨 듣던 노래의 제목이 잘 생각나지 않을 때도 있다. 음잘알(음악을 잘 아는 사람)은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음악을 좋아한다. 출근길엔 힙합을 들으며 힘을 내고 글을 쓸 때는 주로 재즈나 피아노를 듣는다. 연애에 실패했을 때는 이별 노래를 들으며 눈물 콧물을 흘렸고 군대에서 행군이 끝없이 계속될 때는 다이내믹 듀오의 <고백(go back)>을 마음속으로 반복해서 불렀다. 음악은 삶의 위로고 둘도 없는 친구다. 음악이 없는 인생은 상상하기 어렵다.


근데 요새는 노래를 들어도 크게 감흥이 없다. 매일매일 좋은 노래가 나오고 천재 같은 아티스트도 매년 등장하지만 기억에 남는 노래는 별로 없다. 여운이 덜 하다고 해야 할까, 귀로만 즐겁다고 해야 할까, 마음 깊이 남는 노래는 별로 없다. 요새 노래는 별로야, 옛날 노래가 좋았지, 라는 말을 하는 게 아니다. 예전 노래의 감성이 훨씬 더 좋았지, 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게 아니다. 다만 요새 접하게 되는 노래는 그다지 기억에 남지 않는다는 걸 이야기하는 것이다. 예전만큼 음악을 몰입해서 듣기가 어렵다.


문제는 노래를 듣는 내 마음에 있다. 노래를 듣는 내 마음이 달라졌다. 사춘기 때는 노래를 들을 때 감정이입이 많이 됐다. 세상의 모든 사랑 노래가 내 이야기 같을 때도 있었다. 에픽하이의 <Love Love Love>, 하림의 <출국>, 서영은의 <너에게로 또다시>, 김광진의 <편지> 등 좋아했던 노래도 많다. 당시에는 멜로디와 가사가 마음속 끝까지 들어왔다. 마음 한편에 들어와 어떤 흔적을 남겼다. 하나의 감상으로, 또는 추억으로, 아니면 어떤 감각으로 남았다. MC the Max의 노래를 들으면 지하철 4호선이 생각나고 2NE1의 노래를 들으면 대학교 축제가 생각난다. 그때는 노래를 온몸으로 들었고 모든 세포가 노래에 반응하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노래를 들어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다. 물론 그중에는 마음 한편을 건드리는 노래도 있지만 예전만큼 그러지는 않는다.


어느새 서른두 살이다. 아직 한창 젊은 나이지만 그렇다고 마냥 어린 나이도 아니다. 조금씩 어른이 되어가고 있다. 아직 몸도 마음도 충분히 젊지만 그래도 시간은 계속 흐르고 있다. 나를 둘러싼 환경도 변하고 있다. 인생의 우선순위도 달라지고 있다. 부모님은 하루하루 노년을 향해 가고 계신다. 나만의 가정을 꾸리기 위해서는 현실적으로 갖춰야 할 요건들이 눈앞에 쌓여있다. 꿈만 좇으며 살기엔 하루에 10시간은 회사 일을 해야 하고 이제는 운동도 그저 재미로만 하는 게 아니라 조금 더 건강하게 살기 위해 하고 있다. 어릴 때처럼 마냥 하고 싶은 것만 할 수 있는 시간이 점차 줄고 있다.


생각해보면 어렸을 때는 모든 게 낯설고 설렜다. 남녀간의 사랑은 항상 설레는 주제였고 이성과의 섹스 늘 짜릿한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나는 커서 뭐가 될지가 막연히 궁금했고 그런 불안 속에 하루하루를 보내기도 했다. 수할 때는 매일 똑같은 해장국만 먹으며 인생 외로움을 배고 봄기운 가득한 대학 축제에서는 이런 게 청춘이라는 걸 느끼기도 했다. 성에 대한 호기심미래에 대한 불안, 겨울바람 같은 외로움가슴 뛰는 열락, 이 모든 게 이제는 한 번쯤 겪어본 그다지 낯설지 않은 감정이 되었다. 어쩌면 노래가 마음에 와닿지 않는 건 시간에 따라 내가 변하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많은 것들에 이미 익숙해져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기분이 조금 가라앉 다. 코로나 때문에 온 세상이 우울하니 나 역시 조금 쳐지는 건가? 아니면 자꾸 주식 방송만 들어서 마음 가난해지고 있는 걸까? 그렇다고 막 우울하거나, 불행하거나, 그런 건 아니다. 모자랄 것 없는 일상이고 부족할 것 없는 생활이다. 행복하고 감사한 일은 어제도 오늘도 많았다. 데도 자꾸 뭔가 충만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왜 그럴까. 아직은 잘 모르겠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 지금의 나를 조금 더 입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어느덧 겨울이다. 차가워진 공기에 머리가 띵하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점에 올해를 추억할 수 있는 노래가 나에게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시간이 지나 올해를 떠올릴 수 있는 노래가 내 마음에 있을까, 싶었다. 근데 잘 떠오르지 않는다. 혹시 그런 노래가 없다면, 조금 슬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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