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벌이가 내 철학

by 추세경

회사 생활한 지 벌써 5년이 되었다. 입사한 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진급을 앞두고 있다. 아직 결정된 건 아니지만 자꾸 기대가 된다. 봄꽃을 맞이하는 기분처럼 나에게도 좋은 일이 생기기를 바란다.


솔직히 진급하고 싶은 건 월급 인상 때문이다. '대리'라는 직급에 대한 욕심이 아니라 월급이 오르기를 기대한다는 것이다. 진급 자체가 반갑지는 않다. 직급이 올라가면 일을 더 잘해야 하고 나에 대한 평가도 까다로워진다. 기대하는 시선이 달라진다. 하지만 진급을 하지 않으면 월급이 별로 오르지 않는다. 매년 연봉이 오른다고 하지만 미미한 수준이다. 직급이 올라야 월급이 뛰고 그래서 진급을 기대하는 것이다.


어느새 대학에 다녔던 시간보다 회사에서 보낸 시간이 더 많다. 출퇴근을 포함하면 하루에 12시간, 일주일에 5일을 회사에서 보낸다. 그렇게 5년이 지났다. 회사가 좋든 싫든, 일이 재미있든 재미없든, 직장인이라는 정체성이 나의 젊은 날을 대표하고 있다. 따라서 회사를 다니는 철학이 필요하다. 왜 회사에 다녀야 하는지, 회사는 나에게 어떤 존재인지, 어떤 마음으로 회사에 다녀야 하는지 나름의 생각이 있어야 한다.


흔히들 직장생활은 잘해야 한다고 말한다. 근면 성실하게 정년까지 다니고 할 수 있으면 임원까지 달아야 한다고 한다. 요새는 시대 분위기가 달라져서 이직을 통해 경력을 쌓아가는 사람도 많지만 여전히 한 직장에서 근속하는 것을 최고로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사실 한 사람이 일생동안 자신의 생계를 온전히 스스로 해결하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어른들은 경험으로 그걸 알고 있고 그래서 자식들에게 안정적인 직장을 권한다. 평범하게 사는 게 좋다고, 번듯한 직장에 들어갔으면 거기서 잘 버티라고 한다. 평범한 삶이 좋다는 말은 평범하게 살기도 어렵다는 말이다.


밥벌이가 내 철학이다. 나 역시 먹고살기 위해 회사를 다닌다. 매달 받는 월급으로 끼니를 해결하고 일상에 필요한 여러 문제를 해결한다. 월세를 내고, 친분을 쌓고, 취미활동을 한다. 무얼 하든 돈이 필요하다. 월급으로 나의 일상을 꾸려갈 수 있는 자산을 만드는 것. 그게 내가 회사를 다니는 이유다. 월급이 없이도 생계를 해결할 수 있었다면 회사를 다니지 않았을 것이다. 일을 하기 싫다는 게 아니라 꼭 회사원일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사실 회사 안에서의 성취는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동기들보다 잘 나가거나 선배들보다 뛰어나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왕 회사에 다니는 거 그런 인정을 받으면 좋지만 굳이 그러려고 애쓰지 않는다. 회사에서 인정을 받으려면 많은 시간과 정성을 쏟아야 한다. 하지만 내가 회사에 투자할 수 있는 시간은 하루에 8시간이고 그 시간은 주어진 업무만 하기에도 바쁘다. 업무에 전문성을 기르고 상위 몇 프로(%)의 인재가 되려면 더 많이 노력해야 하지만 그러고 싶은 마음은 없다. 지금도 퇴근 시간이 되면 일을 내일로 미룬다. 야근을 한다고 더 많은 월급을 받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생각이 짧네, 그런 마음으로 회사 생활하면 안 돼, 이왕 다니는 거 더 열심히 해야지,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나 같은 생각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그렇게 사는 건 최선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나도 알고 있다. 그들의 의견에 공감하는 부분도 있다. 어차피 10년, 20년 회사에 다닐 거면 이 안에서 성공하는 게 더 나을 수도 있다. 더 빠른 진급을 위해 노력하거나, 더 많은 성과를 내기 위해 노력하거나, 더 높은 위치에 가려고 노력하는 게 더 좋을 수 있다.


하지만 회사 생활에 충성을 다하는 게 정말 최선일까. 지금 다니는 회사가 기준이면 그렇게 노력해도 월급은 별로 달라질 게 없다. 성과를 잘 받든 못 받든 진급만 누락하지 않으면 월급 인상에 별로 차이가 없다. 좋은 고과를 받으나 낮은 고과를 받으나 거기서 거기다. 진급을 누락하면 차이가 크지만 '최선을 다한다는 것'과 '진급을 누락하지 않을 정도로 일을 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이야기다. 개인의 성과를 특별히 인정해주지도 않는다. 일 년에 몇 명씩 우수 사원을 뽑아 상여금을 주긴 하지만 평생 한번 받을까 말까 한 수준이다.


그렇다면 임원을 달면 어떨까. 임원이라는 명예도 있고 아래 직원들이 그에 맞는 예우도 해줄 것이다. 일반 사원보다 연봉은 두배 이상이다. 억대 연봉은 기본이고 위로 갈수록 연봉 인상은 더 크다. 그렇게 되면 지인들에게 자랑할 거리가 생긴다. 친구들에게 으스댈 수도 있고 친척들의 인정도 받을 수 있다. 누구보다 부모님이 좋아하실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려면 일도 열심히 해야 하고 윗사람들의 눈치도 봐야 한다. 가기 싫은 회식도 가야 하고 싫어하는 사람들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실력은 기본이고 운도 따라야 한다. 줄도 잘 서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한 단계 한 단계 전진해도 결국 최고 경영층은 바뀌지 않는다. 회사의 주인은 따로 있다.


내가 노력하기 싫은 건 단순히 대충 살고 싶어서가 아니다. 일을 마치면 조금 쉬고, 여유 있는 저녁시간을 보내고 싶어서가 아니다. 사실 지금도 내 일상에 쉬는 시간은 별로 없다. 아침에 일어나면 주식 방송을 듣고 출근길에는 책을 읽는다. 회사 점심시간엔 운동을 하고 퇴근길엔 한번 더 경제 방송을 듣는다. 집에 오면 글을 쓰거나 필사를 한다. 주말에도 대개 시간이 나면 공부를 한다. 글작가가 되기 위한 공부다. 나름대로 바쁘게 살고 있다. 회사가 아닌 다른 부분에 내 시간과 열정을 투자하고 있다.


회사를 다니지 않아도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역량을 쌓는 중이다. 재테크를 통해 자산을 늘리고 글작가가 업이 될 수 있도록 실력을 기른다. 내가 더 가치 있다고 믿고 내가 더 행복할 수 있는 부분에 시간을 할애한다. 100세 시대를 예상하는 지금 겨우 20~30년 다닐 회사에 인생 전부를 걸 수는 없다.


그렇다고 회사 생활을 대충 한다는 말도 아니다. 주어진 시간에는 최선을 다한다. 나 때문에 함께 일하는 사람이 곤란하면 안 되고 내가 담당하는 업무에 차질이 생기면 안 된다. 나랑 같이 일하는 상사나 나를 따르는 부사수가 나와 함께 일하는 걸 즐거워할 수 있어야 한다. 상사에게 지시받은 걸 무시한다든지 후배에게 일을 떠넘긴다든지 하는 일은 (되도록) 하지 않는다. 적어도 회사에서 보내는 시간에는 일을 잘하기 위해 노력한다. 부족한 것도 있고 때로는 나태할 때도 있지만 일을 못한다고 욕먹거나 일을 대충 한다고 힐난받을 행동은 하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서는 창조하는 일을 주업으로 삼고 싶다. 회사에 속해 재화를 만들고 나름의 가치를 창출하는 것도 좋지만 그보다는 나만의 의미를 만들어 세상에 전하는 일을 하고 싶다. 때문에 생계를 이어갈 수 있는 수준 이상의 열정은 회사에 쏟지 않는다. 월급을 받기에 부끄럽지 않을 정도만 일하고 있다.


사실 직장인으로서의 정체성과와 나의 또 다른 일상을 완전히 구분하는 건 불가능하다. 업무 시간에 여유가 생기면 글감 생각도 하고 일과 중에 주식이 폭락하면 자꾸 신경이 쓰여 일이 손에 안 잡힐 때도 있다. 그리고 그건 반대도 마찬가지다. 급하게 해결할 일이 생기면 퇴근을 미루고 야근을 한다. 처리하기 어려운 일이 생기면 집에 와서도 일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기계가 아닌 이상 두 가지 모습을 사과 쪼개듯 나누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칼자루는 내가 쥐고 있어야 한다. 회사를 다니는 나만의 철학이 있어야 한다. 내가 왜 회사를 다니고 있는지, 나는 나의 에너지를 어떻게 분배해야 하는지, 때때로 찾아오는 선택의 순간 조금 더 합리적인 선택을 할 수 있는 나만의 기준은 무엇인지 주도적으로 생각하고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그저 회사 상사의 눈치만 봐서도 안되고 연봉과 직급만으로 나를 판단하는 사회의 잣대에 주눅 들 필요도 없다. 회사에서의 성공이 최선의 삶을 보장한다면 그렇게 하면 된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그렇게 살지 않아도 괜찮다.


회사는 나에게 생계의 수단이다. 먹고사는 일은 귀중하고 정규직으로 회사를 다니고 있는 지금의 상황에 감사하다. 하지만 조금 더 욕심내고 싶다. 먹고사는 것 이상의 행복을 느끼며 살고 싶다. 나를 나답게 하는 일을 하며 소중한 사람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다. 회사 일로 공부를 미루거나 회식이 잡혀 지인들과의 소중한 시간을 방해받는 일은 되도록 피하고 싶다. 그런 회사 생활을 할 것이다. 그게 내 철학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오징어 게임엔 규칙이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