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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과 산, 등산이라는 메타포

by 추세경

21년 2월에 발행했던 <눈과 산, 등산이라는 메타포 1,2>를 퇴고하여 재 발행하는 글입니다.



얼마 전에 충주 여행을 다녀왔다. 충주에 살고 있는 친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녀석은 원래 경기도에 본가가 있는데 회사일로 충주에서 살게 되었다. 고등학교 때 만났으니 햇수로 16년이 넘은 친구다. 어떻게 사는지 한 번쯤 보고 싶어 다른 친구 두 명을 꼬셨다. 충주에 다녀오기로 여행 계획을 잡은 것이다. 금요일 밤에 출발해 일요일에 돌아오는 일정이었다. 특히 토요일에는 '월악산'을 등산하기로 했다.


친구 차를 타고 서울에서 충주로 향했다. 퇴근 후의 금요일 밤이었고 그 이유 하나만으로도 세상이 아름다워 보였다. 가고 있는데 충주에서 전화가 왔다. 저녁으로 뭐가 먹고 싶냐는 것이었다. 친구는 송어회와 소고기 중에 하나를 고르라고 했다. 잠시 고민한 끝에 송어회를 먹기로 했다. 현지에서 유명한 음식을 먹는 게 나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회를 떠 오겠다는 친구의 목소리는 예식장에서 하객을 반기는 새신랑의 목소리처럼 들떠있었다.


친구 집에 도착해 술자리를 시작했다. 친구에게 요새는 무슨 생각을 하며 살고 있는지를 물었다. 여자 친구와의 관계는 좋은지 나쁜지, 회사 생활은 어떤지를 물었다. 친구는 최근에 여자친구와 헤어졌다고 했다. 쉽지 않은 이별이었다고, 타지에서 혼자 사는 만큼 이별의 감정을 정리하는 게 힘들었다고 했다. 그렇다고 진지한 얘기만 한 건 아니었다. 불알친구들인 만큼 농담도 많이 하고 장난도 많이 쳤다. 조금 취해서는 술 게임을 하기도 했다. 음악의 전주만을 듣고 노래의 이름과 가수를 맞추는 게임이었다. 기대했던 송어회는 별미였고, 그렇게 밤이 깊어 갔다. 하지만 다음날 있을 산행을 위해 자리를 일찍 마쳤다. 1,000m가 넘는 산을 오르려면 컨디션 조절이 필요했다.


친한 친구들과는 대화를 하지 않아도 편하다고들 한다. 대화의 공백을 허용한다는 말인데 거실 소파에 나란히 앉아 말없이 TV를 보는 장면을 떠올리면 무슨 의미인지 이해할 수 있다. 보통 친한 게 아니라 '진짜' 친하면 그렇다고들 한다. 하지만 가까운 사이일수록 더 많은 대화가 필요하다. 세상에 '말하지 않아도 아는 사이'라는 건 없기 때문이다. 친할수록 쉽게 서운해지는 게 인간관계고 상대를 모두 안다는 착각은 관계에 악영향을 미친다. 사소한 일이라도 소통하고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 잘 준비를 마치고 넷이 원룸 방에 누워 실없는 수다를 떠는 그 시간이 좋았다. 어두운 방에서 작은 농담 하나로 모두가 희죽대는 그 시간이 좋았다. 그러다 지쳐 잠에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 등산 준비를 시작했다. 겨울 산행이라 물을 끓여 보온병에 담았고 등산화를 신고 아이젠을 챙겼다. 따뜻하게 옷을 입고 집을 나왔다. 월악산은 달이 봉우리(영봉)에 걸린다 하여 '월악'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다섯 손가락 안에 들만큼 험한 산이지만 산행 시간이 짧고 경관이 아름다워 많은 탐방객이 찾는다. 월악산 국립공원은 충주시와 제천시에 모두 걸쳐있는데 엄밀히는 면적의 대부분이 제천에 있어 충주에서 출발한 우리는 차를 타고 30분 정도를 이동해야 했다. 편의점에 들러 삼각김밥과 소시지로 아침을 때웠고 물과 초코바, 컵라면을 샀다. 편의점 주인의 추천에 따라 출발 지점을 '덕주사'로 정했다.


편의점 앞에서 월악산 봉우리를 보니 갑자기 기운이 빠졌다. '여행까지 와서 왜 힘들게 산을 타지'라는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구름이 걸쳐 있는 산의 정상은 아득히 멀어 보였고 그걸 보니 학교 체력장에서 오래 달리기를 하기 전과 같은 기분, 힘들 것을 뻔히 알면서도 해야만 하는 그런 두려움과 망설임, 그 두 가지가 섞인 기분이 들었다. 원래 계획은 9시에 등반 시작이었지만 이래저래 시간이 지나 이미 10시가 넘어 있었다. 정상을 찍고 내려오면 17시는 될 것 같았고 그렇게 집에 가면 지쳐서 잠만 잘 것 같았다.


"등산하지 말까...?"


라고 친구들에게 말했다. 하지만 동조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서울에서부터 아이젠과 보온병을 챙겨 온 여행이었고 편의점에서는 정상에서 먹겠다고 육개장 컵라면도 사놓은 상태였다. 아무도 대답이 없어,


'가야지 뭐...'


라는 마음으로 등산을 시작했다.


산의 초입은 완만했다. 크다는 산은 보통 그런 것 같은데 그건 월악산도 마찬가지였다. 덕주사에서 마애불로 이어지는 코스는 완만했고 높지 않은 경사에 발걸음이 경쾌했다. 출발 전의 망설임과는 다르게 막상 산을 오르니 자연이 주는 기운에 힘이 났다. 걸으면서도 계속 수다를 떨었고 산에 오기를 잘했다는 감탄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사십 분이 지났을까 오십 분이 지났을까, 경사가 가팔라지기 시작했다. 디뎌야 할 바위는 높아졌고 계단의 경사도 날카롭게 기울었다. 세상의 계단이라는 계단은 모두 가져다 놓은 것 같았다. 나무 계단, 철 계단, 돌계단이 번갈아가면서 나타났다. 신이 나서 떠들던 우리는 말 수가 적어졌다. 허리는 굽었고 호흡도 거칠어졌다. 그중에 친구 한 명이 유독 힘들어했다. 원래는 운동을 좋아하는 친구인데 수험생활을 오래 해서 체력이 많이 빠졌다고 했다. 시험이 끝나고 운동을 하려고 했지만 코로나 때문에 집에만 있었다고 했다. 10분을 오르다 숨을 고르고, 10분을 오르다 숨을 고르기를 반복했다. 안 되겠다 싶으면 중간에 내려가야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적당한 곳이 있으면 컵라면이나 먹고 내려오자,라는 얘기를 하기도 했다. 기온은 영하였고 끝없이 이어지는 계단에 숨이 찼다.


여행까지 와서 왜 사서 고생을 하냐,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냥 편하게 맛집이나 가고 커피 향 짙은 카페에서 경치 구경이나 했으면 편했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등산은 건강한 활동이고 성취감도 느낄 수 있는 일이지만 욕심이 좀 과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워낙 힘든 산을 골랐고 계절도 마침 겨울이라 주말에 동네 뒷산에 놀러 가듯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게다가 혼자 하는 산행도 아니었고 넷이서 함께 하는 산행이었다. 나의 컨디션뿐 아니라 모두의 컨디션을 고려해야 했다. 뭐든지 욕심이 과하면 모자란 것보다도 못한 일이었다.


점차 두 명, 두 명으로 간격이 벌어졌다. 친구들과의 간격을 신경 쓰기는 했지만 완전히 동일한 속도로 이동할 수는 없었다. 걷다가 멈추면 추위에 한기가 돌았다. 천천히 걷더라도 '쉬지 않고' 올라가야 했다. 그런 와중에도 친구들보다 체력이 좋다는 사실에 뿌듯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남보다 내가 낫다는 실감은 사람을 참 쉽게 우쭐하게 만든다. 하지만 책임감이 들기도 했다. 등산을 하자고 했던 것은 나였고 넷이 함께 하지 못하면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제 겨우 산의 초입인데 즐기려고 온 산행이 고난이 되지는 않을까 걱정됐다. 힘들어하는 친구의 표정을 보면 안쓰러운 마음도 들었다.


어느새 경사의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마지막 계단을 오르니 잠시 쉬어갈 수 있는 공간이 나왔다. 발밑으로 충주호의 정경이 보이는 곳이었다. '야호'를 외치고 싶은 풍경이었다. 마냥 차갑기만 하던 공기도 시원하게 느껴졌다. 그게 좋아 두 팔을 벌려 심호흡을 하기도 했다. 뒤에 오던 친구 두 명도 조만간 도착했다. 가장 힘들어하던 녀석도 이빨을 반짝이며 활짝 웃었다. 하지만 그때였다. 이게 무슨 일일까.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어려서는 눈만 오면 밖에 나가 뛰어놀았다. 하얗게 눈이 내리면 그게 조금 차가워도 만지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뽀득뽀득한 눈의 촉감이 좋았고 예쁘게 쌓인 눈을 흩트려 나의 흔적을 남기는 것도 좋았다. 눈싸움도 하고, 눈사람도 만들고, 친구의 목뒤에 한 움큼 눈을 넣고 키득거리기도 했다. 그렇게 한바탕 뛰어놀고 집에 와서 뜨거운 물에 샤워를 하면 그 만한 행복이 없었다. 젖은 옷의 촉감은 싫었지만 그걸 빨래하는 건 엄마의 몫이었고, 어려서는 그런 엄마의 수고로움을 알지 못했다.


눈이 내려서 걱정도 됐지만 오히려 눈이 주는 흥분감에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펑펑 쏟아지는 눈이 아니라 작고 예쁘고 떨어지는 눈이었다. 추운 날씨에 길은 미끄러웠지만 그래도 눈이 내려서 좋았다. 일렁이는 바다에 햇살이 반짝이듯 산을 뒤덮은 눈 위로 빛의 물결이 일렁였다. 늙은 농부의 팔뚝처럼 검고 앙상한 나무 위로 새하얀 눈의 꽃이 피었다. 다행히 아까와 같은 경사길은 나오지 않았고 완만한 오르막이 이어졌다. 가지가지 쌓인 새하얀 눈꽃이 길을 안내했다. 다시 대화에는 활기가 돌았다. 코 끝을 시린 겨울 공기가 정신을 맑게 했다. 미끄러운 길에 한 친구의 아이젠이 부서지기도 했지만 그럴수록 서로를 더 격려하고 그만큼 더 산행에 몰입했다.


어느새 정상에 올랐다. 월악산 영봉이었다. 비석 옆에서 사진을 찍고 가져간 육개장 컵라면에 뜨거운 물을 부었다. 겨울 산 정상에서 먹는 컵라면은 역시 최고야,라는 추억이 남았으면 좋았겠지만 기대했던 만큼 맛있지는 않았다. 보온병의 물이 식어 라면이 제대로 안 익었기 때문이다. 설익은 라면은 뜩뜩했고 국물도 별로 따뜻하지 않았다. 계획대로만 되는 건 잘 없나 보다,라고 생각하고 말았다.


하산할 때는 더 이상 눈이 내리지 않았다. 오후에 기온이 오르니 내린 눈 마저 녹기 시작했다. 설경이 절정이었던 구름다리에도 더 이상 눈이 보이지 않았다. 오를 때와는 전혀 다른 풍경이었다. 눈 때문에 산을 신나게 올랐는데 내려올 때는 빈 가지만 가득했다. 우리를 정상으로 이끈 아름다운 풍경은 사라지고 없었다. 홀린 듯 올랐는데 홀리고 나니 그게 사라졌다. 눈이 우리를 정상에 데려다준 기분이었다.


오버하는 거라는 걸 알고 있다. 아침에 눈이 왔고, 두 시간 후에 눈이 그쳤고, 오후에 눈이 녹았던 것뿐이다. 하지만 인생에는 때때로 그런 낭만이 필요하다. 여자친구와의 만남을 우연이 아니라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손에 잡힌 봄날의 벚꽃을 우연이 아니라 행운이라고 생각하고, 여행 날의 좋은 날씨를 우연이 아니라 축복이라고 생각하는, 그런 낭만적인 믿음이 필요하다. 그런 낭만으로 세상을 바꾸지는 못할지라도 적어도 한 사람의 영혼이 따뜻해질 수는 있다. 눈의 요정 덕분에 산행을 잘 마쳤다고 믿고 싶은 것이다.


산을 내려와서 식당에 갔다. 기름 냄새 풍기는 등유 난로 위에는 우엉차가 담긴 주전자가 올려져 있었다. 따뜻한 차로 몸을 녹이며 묵직해진 다리 근육을 느꼈다. 더덕구이와 버섯전골로 저녁을 먹고 집에 돌아와 따뜻한 물로 샤워를 했다. 산행의 여운과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고 잠에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 간단히 요기를 하고 서울로 올라왔다. 그렇게 여행이 끝났다.


여행하는 내내 우리가 하나였다고는 말하고 싶지 않다. 내가 느낀 모든 것을 친구들도 똑같이 느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길고 힘들었던 경사 구간을 오를 때 그들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자기만의 상념과 각자만의 고민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건 함께하는 '순간'도 있었다는 것이다. 설산의 아름다움을 '함께' 느꼈고 경사 구간의 어려움을 '같이' 공감했다. 그거면 충분했다.


앞으로도 친구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 때때로 만나 서로의 삶을 이야기하고 웃고 떠들 수 있는 그런 사이가 되고 싶다. 충주 여행, 월악산 산행, 짧지만 좋았던 추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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