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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원 Jan 27. 2024

이민, 실패 후 성공


아빠가 어렸을 적 살던 집 근처에 목장이 들어섰다. 한국이 가난했던 시절, 낙농업 부흥의 첫걸음으로 뉴질랜드 정부로부터 도움을 받아 '한뉴목장'이 설립된 것이다. 어린 날의 아빠는 목장을 바라보면서 해외 생활을 꿈꿨다. 그것이 훗날 우리 가족을 해외생활로 이끈 운명의 시초였다.


엄마 아빠가 연애를 하던 시절부터 아빠는 이민에 대한 의사를 밝혔다. 결혼을 하고 나서 엄마는 나를 출산했고, 후에는 자녀를 두 명 더 출산했다. 엄마 아빠는 우리 셋을 키우면서 이민을 가기에 적절한 타이밍을 항상 염두에 두었지만 자주 현실의 벽에 부딪히곤 했다.


때문에 우리 가족은 내가 성인이 되고 나서야 드디어 이민을 가게 되었다. 내가 미국에서 대학교 유학생활을 막 시작하던 때에, 한국에서 몇 년간의 기러기 생활을 해야만 했던 아빠를 제외한 우리 가족은 뉴질랜드로 터를 옮기게 된 것이다. 그렇게 해서 나와 우리 가족은 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각자 다른 나라에서 타지생활이 하게 되었다.


아빠를 대신해서 동생들을 데리고 먼저 뉴질랜드로 건너간 우리 엄마는 영주권을 얻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당시 뉴질랜드 정부에서 요구하던 영어 아이엘츠 점수는 4점이었는데, 우리 엄마는 이를 충족하기 위해서 영어공부를 시작했다. 타고난 순발력과 노력의 결과로 엄마는 5.5점까지 점수를 올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치명적인 불상사가 발생해 버렸다. 뉴질랜드 정부가 영주권 취득을 위한 영어시험 점수 커트라인을 6.5점으로 훌쩍 올렸는데, 6.5점은 엄마에게는 기적이 일어나야만 받을 수 있는 점수였던 것이다. 그렇게 다소 허무한 이유로 인해서 뉴질랜드 정착의 꿈은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우리 가족의 첫 이민의 끝은 쓴맛이었다.



동네 주변에도 산과 바다가 펼쳐진 곳, 뉴질랜드



뉴질랜드 영주권 취득을 포기하고 난 후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궁리를 하던 중, 여동생이 엄마에게 뜻밖의 의사를 전달했다.


"엄마, 나 캐나다에 있는 대학원 가고 싶어."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편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부모님 삶의 0순위는 언제나 자식 교육 뒷바라지였다. 때문에 우리 가족은 캐나다 대학원 등록금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등록금을 절감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결론은 바로 캐나다 영주권을 취득하는 것이었다. 이미 한번 이민을 실패해 본 상태에서 또다시 다른 나라로 이민을 도전해 보는 것이 내가 생각해도 가혹하게 느껴지지만, 엄마와 아빠는 그것이 가족을 위해서 옳은 선택이라는 것에 대한 의심이 없었다.


그렇게 엄마와 아빠는 60을 바라보는 나이에 남동생을 데리고 태평양 너머 캐나다로 다시 한번 더 이민을 갔다. 우리 가족의 마지막, 늦깎이 이민 도전이었다.




캐나다 동부 특정 주들은 인구 감소와 노동 인력 부족을 보완하기 위해서 Atlantic Immigration Program, 줄여서 AIP라고 부르는 이민 프로그램을 시행하고 있다. 해당 이민 프로그램은 당시 우리 가족의 상황에 가장 적절했다. 엄마가 지인을 통해서 그 지역 내 인수할만한 비즈니스를 몇 군데 알게 되었는데, 비즈니스를 운영한다는 명분으로 영주권을 취득해 보기로 결정한 것이다. AIP 하에 영주권을 신청하는 이민자들은 영주권을 취득할 때까지 특정 지역에 한하여 무기한으로 거주를 하게 되는데, 우리 가족을 포함한 이들이 살게 되는 곳은 소위 캐나다의 '깡촌'이다.


그렇게 해서 우리 가족은 뉴브런즈윅 주에 위치한 세인트 스티븐(St Stephen)이라는 작은 시골 마을로 이주를 했다. 엄마와 아빠는 피자 가게가 딸린 작고 허름한 편의점 가게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많은 이민자들의 현실이 그렇듯, 두 분도 이민 초창기 2-3년 동안은 정말로 힘들게 살아가셨다. 당시 엄마는 매일 새벽 6시부터 밤 10시까지 일을 했었기에 가게에서 거의 살다시피 했다. 아빠는 옆에서 주문받은 피자를 하나부터 열까지 직접 만들어 구워내고, 각종 편의점 물건들을 실어 나르면서 엄마를 도와주었다. 전화로 소식을 간간이 전해 들을 때마다 엄마가 늦은 나이에 너무 무리를 하는 것 같아서 마음이 한동안 정말 무거웠다.



110년 된 엄마 아빠의 가게



그러던 어느 날, 캐나다 이민국으로부터 소식이 한 통 전해졌다.


Congratulations! You are now a permanent resident of Canada!
축하합니다! 이제 귀하는 캐나다 영주권자가 되셨습니다!

훗날 엄마가 말했다. 엄마가 평생 보았던 아빠의 모습 중 그날, 가장 행복한 얼굴을 보았다고. 그 정도로 우리 가족에게 캐나다 영주권 취득의 의미는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할 것이다. '잠재 영주권자'라는 애매한 신분에 종지부를 찍고, 공식적으로 캐나다에서의 새로운 챕터를 열 수 있게 된 순간이었다. 공교롭게도 그날은 엄마 아빠의 결혼 30주년 기념일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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