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에서 힌트를 얻었다. 행동하기로. 바람을 타기로.
-가와카미 미에코-
비영리법인도 결국 비즈니스라는 것을 깨닫고, 우리가 만들 비영리법인의 사업계획을 구체적으로 짜 봤다. 상상의 나래를 마음껏 펼쳤더니 의외로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보였다. 레스토랑으로부터 수수료를 받을 수도 있었고 기부자에게 팁을 받을 수도 있었다. 비영리법인이 성장하게 된다면, 그 방대한 레스토랑 네트워크를 활용해 케이터링 플랫폼으로 아예 비즈니스를 구축할 방법도 있었다.
시장의 니즈도 컸다. 우리처럼 로컬 레스토랑에 기부금을 전달하고 그 레스토랑이 음식을 만들어 병원이나 노인에게 전달하는 모델은 사실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거의 모든 단체가 그 모든 것을 수작업으로 진행하고 있었고, 우리가 개발한 자동화 기술이 전체 산업에 큰 반향을 일으킬 수 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굶주림의 문제 역시 COVID-19만의 일시적인 문제가 아니라, 사실 인류 역사와 함께 지금까지도 계속된 문제였다. 그 문제의 1%만 해결한다고 해도 $2.2B (약 2조 6천억 원)이 필요한 엄청난 스케일의 '시장'이었다.
요약하자면;
1) 풀어야 할 문제의 스케일이 크고,
2) 자동화 기술을 이용해서 빠르게 성장할 수 있는,
꽤 그럴듯한, 유니콘스러운 중장기적 모델이 나왔다
성공한 비즈니스맨을 꿈꾸던 나의 구미에 맞았다.
가와카미 미에코는 일본의 소설가이다. 남동생 학비를 대기 위해 호스티스로 일했고 가수로도 활동하는 등 특이한 이력을 지녔다. <젖과 알>이라는 (입에 착착 감기는 제목의) 책으로 일본 최고 권위의 아쿠타가와상을 받았다. 일본 페미니즘을 대표하는 소설가이기도 하다.
여성의 삶은 이민자의 삶과 닮은 면이 있다고 생각해 본다. 성별 혹은 인종이라는, 내가 선택하지 않은 나의 한 작은 부분을 통해 사람들에 의해 멋대로 판단되고 그것을 극복해야 할 일이 종종 생기기 때문이다. 안타까운 일이다. 서로 다른 신체나 피부색이라는 것은 한 영혼을 담은 '용기'에 불과한 것. 그것만으로 누군가를 판단하는 것은, 컵의 생김새만으로 안에 담긴 물의 맛을 판단하려는 것과 같으리라. 그 안의 물이 단맛인지 짠맛인지 마셔보기도 전에. 이렇게 생각해보면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다.
페미니즘은 그런 어리석은 남의 시선을 부정하고 진정 평등한 인권을 추구한다는 측면에서 이민자의 억울함과 맞닿아 있다. 더 나아가, 어떤 한 단면만을 보고 나의 전체를 가늠하는 그 모든 어리석은 시선들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억울함을 투영한다.
(Source: Entertainment)
나는 내가 무엇이 될 수 있는가가 아니라,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밖에 관심이 없다.
그런 의미에서 가와카미 미에코의 이 한 마디에 페미니즘의 향이 난다. '무엇이 된다는 것' 자체가 남의 시선을 중심으로 사회가 정해 놓은 다른 사람과의 약속에 국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의사가 된다는 것도, 변호사가 된다는 것도, 프로덕트 매니저가 된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사회가 정한 타이틀로 남이 나를 그렇게 정의할 뿐, 그것이 나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그런 사회가 정한 타이틀과 시선은 나의 통제 하에 있는 것들이 아니다.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무엇이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그 질문부터가 틀렸다.
질문이 틀렸으니 답을 찾기가 어렵고, 답을 찾았다고 생각해도 어느 순간 오답이 된다. 나의 통제 하에 있지 않고 언제든지 바뀔 수 있는, 나를 바라보는 남의 시선을 정의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커서 뭐가 될래'라는 질문을 들으며 자라왔기 때문에, 그 질문으로부터 벗어나기가 쉬운 일은 아니다. 여전히 남이 멋대로 어떤 단면만을 통해 나를 판단하도록 허락하고, 그 남의 판단에 따라 만족해하기도 실망하기도 한다. 그렇게 다시 남의 시선에 맞추기 위해 노력하고 실망하는 쳇바퀴에 서서히 갇히게 된다. 어차피 패배로 끝날 것이 분명한 루저의 쳇바퀴이다. 해답의 열쇠를 남이 쥐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입에 착착 감기는 제목의 소설로 엄청난 상을 받은 동갑내기 페미니즘 소설가의 이 한 마디에는 꽤 울림이 있다. '무엇이 된다'는 것 자체가 남이 정한 무엇인가에 의해 투영된 내 모습일 뿐인 것.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그런 어리 석은 것이 아니라 좀 더 본질적인 것이어야 한다. 내가 통제할 수 있고, 나만의 진정한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예를 들어 나의 행동 같은 것.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은, 남이 나를 무엇이라고 부를 것인가가 아니라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뿐이다.
나를 가장 가깝게 정의할 수 있는 것은, 남이 정한 그 무엇이 아니라 내가 한 그 행동뿐이다.
망망대해에 요트를 띄웠다고 해보자. 목적지는 보물섬. 어느 쪽으로 가야 한다고 대략 짐작은 하지만, 바람과 해류는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그럴 때 선택은 둘 중 하나이다. 바람과 해류를 거스르고 보물섬을 향해 직진으로 나아가거나, 아니면 일단 부는 바람에 몸을 맡기고 또 다른 바람과 해류 사이를 갈아타며 조금씩 보물섬 방향으로 다가가거나.
전자는 직진이지만 에너지가 많이 들 것이고, 원하지 않는 바람은 모두 '방해 요소'가 될 것이다.
후자는 시간이 좀 들지만, 원하지 않는 바람도 다 '이런저런 다양한 구경'도 하라고 불어준 선물이 될 것이다.
망망대해에 떠 있는 요트와 인생이란 것은 너무도 진부한 비유이지만, 그만큼 비슷한 면이 많기 때문에 클리셰가 되었을 것이다. 인생의 항해가 원하는 대로 직진만 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모두가 잘 알듯이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런저런 바람과 해류에 부딪히는 일이 훨씬 많다. 이때 이것을 방해 요소라고 생각할지 아니면 다양한 구경을 위한 선물이라고 생각할지는 각자의 선택이다. 그리고 그 선택에 따라 노를 젓거나 돛을 펴거나 행동하면 될 뿐. 어쩔 때는 바람에 몸을 맡기기도 하고 어쩔 때는 바람과 해류를 거슬러 열심히 노를 저어야 할 수도 있지만, 분명한 것은 나 말고 바뀔 건 없다는 것이다.
보물섬은 어차피 가본 적도 없고, 바람은 어쨌든 자기 마음대로 분다.
탓해봐야 소용없다.
'성공한 비즈니스맨'이라는 것은 내가 되고 싶었던 그 무엇이다. 내 인생 항해의 보물섬이다. 그리고 그 '무엇이 되고 싶다'고만 생각해왔기 때문에 비영리법인 설립을 앞에 두고 망설였다. '꼭 거기에 가야 한다'고만 생각해왔기 때문에 그 방향이 아닌 모든 것들은 방해 요소로 여겨왔다. 어차피 자기 멋대로 부는 바람을 무조건 거스르려고만 했기 때문에 주변을 보지 못했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남의 시선을 통해 나의 모습을 그리기만 해왔기 때문에, 눈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훌륭한 일들에 대해 눈감고 있었다.
아니 애초에 왜 보물섬에 가려고 했던 걸까.
실체가 있는 건지조차 알 수가 없다.
그냥 바람과 해류를 잘 읽는 항해 자체가 목표가 될 수는 없을까.
'고개를 들어' 바람을 느껴봤다. 시선으로 그 방향을 좇아보니 끝에는 비영리법인 설립이라는 돌고래 무리가 보였다. 일단 와서 같이 놀자,라고 손짓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시장도 크고,
자동화라는 우리만의 무기도 분명했다.
주변에서 너도나도 할 것 없이 도움의 손길을 내어주고 있고,
많은 사람들이 우리로 인해 따뜻한 식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바람이었다.
맙소사. 도대체 뭘, 왜 망설였단 말인가.
바람을 타자. 그것이 내가 할 일이다,
...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