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고래와 헤엄치는 느낌으로
미래를 그려보면 막막해질 때가 있다. 그러나 실제로 미래가 어두워서라기 보다는, 보이지 않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어차피 미래는 아무도 모른다. 보이지 않는 걸 보려고 해 봤자,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만 부각될 뿐이다.
성공한 사업가가 되어 재단도 운영하는 멋진 삶의 항해를 그려왔지만, 목적지는 아직 가본 적도 없는 아틀란티스와도 같은 곳. 지금 부는 바람이 그곳을 향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바람이 향한 곳을 눈으로 좇으면 대신 비영리법인이 코 앞에 있었다. 마치 반짝이는 햇살 아래 헤엄치고 있는 아름다운 돌고래 무리처럼. 일단 와서 같이 헤엄쳐요,라고 손짓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 바람을 타고 가버리면 돌고래 무리와 함께 또 어디로 향하게 될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성공한 사업가의 삶이란 아틀란티스도 어차피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한 건 매 한 가지. 앞을 내다보려니 알 수 없는 것 투성이다. 그에 반해 당장 지금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이 하나 있었으니.
주변에서 너도나도 할 것 없이 도움의 손길을 내어주고 있고, 많은 사람들이 우리로 인해 따뜻한 식사를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
맙소사 대체 뭘, 왜 망설였단 말인가.
당장 바람을 타자. 그것이 내가 할 일이다,
...라고 생각했다.
한 비영리법인 대표님에게 연락했다. 출산이나 남편의 유학 등으로 인해 경력이 단절된 여성 인재들에게 도움을 주는 Simple Steps라는 비영리법인을 실리콘밸리에서 설립해 운영하고 계신 분이었다. 수년 전 우연한 기회에 알게 되어 식사 한 번 같이 했을 뿐이었지만, 실리콘밸리에서 비영리법인을 운영한다는 사실과 더불어 특유의 차분하고 사려 깊은 말투가 인상 깊었던 분이었다.
이미 하이테크의 메카인 실리콘밸리에서 비영리법인을 운영하시면서 많은 통찰력을 쌓아오셨음이 분명할 터. 또 하나의 NPO를 설립하겠다는 나의 생각에 대해 조언을 얻고 싶었다.
그리고 어김없이 검증이 시작됐다. 무림 고수가 상대방을 앞에 두고 기의 싸움을 펼치듯. 와, 너무 잘하실 것 같아요, 아니에요 부족하지만 열심히 해야죠,라고 인사는 주고받았지만 칼챙챙 본격적인 합을 겨루기 전의 긴장감이 이어졌다. '응원의 목소리'라는 칼집과 '겸손의 다짐'이라는 칼집에 각자의 칼을 숨겨둔 채 대치했다.
근데... 풀타임으로 하실 건가요?
마침내 대표님이 칼집의 칼을 살짝 드러냈다. 단순한 질문이었지만 많은 의도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순간적으로 직감할 수 있었다. 이 일에 대해 내가 얼마나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는지 떠 보는 동시에, 대충 하다가 말 생각이면 그만두는 게 좋다는 경고의 의미도 내포되어 있었다. 동시에 진지하게 풀타임으로 계속 진행할 생각이다 하더라도, 비영리법인을 운영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그 고난의 삶을 이야기해주기 위한 포석이 깔려 있었다.
예전 AJ와의 대화가 생각났다. 인도에 학교나 한 번 세워볼까,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전화했다가, "기쁨의 크기보다 슬픔의 크기가 크므로 멈추려면 아예 시작하지 않는 편이 낫다"는 말에 크게 부끄러워했던 기억. 부끄러움의 크기가 컸던 만큼, 그것이 준 교훈도 가볍지 않았으리라.
대표님의 질문에 대한 답으로 아예 AJ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부끄러웠던 기억에 대해 솔직히 나눴고, 지속 가능성이 가진 무게감에 대해 공감했다. 예전에 사업을 하면서 힘들었던 기억에 대해 이야기하고, 너무 감정에 몰입해 서둘러 화제를 전환하기를 반복했다. 사업 방향에 대해 이야기하고 비즈니스 모델에 대해서도 의견을 나눴다. 계속해서 이어진 겨루기에 칼끝이 서서히 무뎌지며 사라져 갔고, 긴장됐던 '칼챙챙'은 어느덧 '쎄쎄쎄'로 변해갔다. 그렇게 약 한 시간의 통화를 마치고 다음 날 카톡으로 연락이 왔다.
이런 grant (보조금) 기회가 더 늘어날 거예요.
보내준 링크는 Zuora.org라는 곳에서 진행하는 COVID-19 관련 Grant (비영리법인 보조금 지원 프로그램)에 대한 소개자료였다. 승인을 꼭 받아야 했던 건 아니지만, 비영리법인계의 선배로부터 인증을 받았다는 느낌이 왔다.
이 모든 것의 시작에는 자괴감이 있었고, 그 자괴감을 깨운 건 지독한 숙취로 누워있던 한 주말이었다. 그리고 그 지독한 숙취의 원인이 된 술자리에는 아는 동생 둘이 있었다. 각각 아마존과 구글에 다니는 인재이긴 하지만, 일로 연결된 적은 한 번도 없고 오로지 술로만 알던 친구들이었다. 가끔 사업이나 진로에 대한 고민을 나누기 위해 만나기도 했지만, 술잔 몇 잔 기울이다 보면 진로는 무슨. 진로는 마시는 거야! 이딴 식으로 연신 브라보를 외치며 낄낄대던 사이이다. 정신을 차려보면 노래방에서 어깨동무하고 있던 기억만 (간신히) 나기도 한다. 이민자로서 타지에 정착하는 데에 있어 둘도 없이 소중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도 있다. 가족들과도 친해서 서로의 가족들을 불러 종종 저녁을 함께 했다—물론 집에서도 노래방 정신은 종종 이어졌다.
캠페인 자동화 아이디어가 떠오른 날 이 친구들에게 가장 먼저 의견을 물었고, 여차저차 하다 보니 캠페인의 처음부터 같이 진행하게 됐다. 어떻게 보면 술만 먹고 놀기만 하던 친구들과 처음으로 일다운 일을 같이 해본 셈인데, 반전 매력이 뿜뿜 넘쳤다. 아니 원래 인재인 걸, 나만 너무 술친구라고만 생각한 것에 가까울 테다. 그렇게 일은 빠른 속도로 진행됐고, 그 중심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이 친구들의 역할이 굉장히 컸다. 비영리법인을 세울까 고민을 할 때도, 만약 하게 된다면 이 친구들과 함께해야겠다는 생각을 계속 해왔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제 마음을 먹은 만큼, 공식적으로 오퍼를 내야 할 때가 됐다. 그리고 무슨, 프러포즈보다도 더 긴장됐다. 아마 올 초 사업을 위해 독립한다고 여러 명에게 공동창업 오퍼를 냈다가 모조리 퇴짜를 맞은 기억 때문이리라. 4개월 동안 약 5명쯤 된다. 이쯤 되면 막판에는 그냥 막 들이댔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가장 마지막 퇴짜는 스탠퍼드에 다니는 한 중국 여학생이었다. 팔로 알토의 한 바에 앉아 사업을 같이 하자고 제안했는데, "No"라는 대답과 가벼운 포옹을 뒤로한 채 그대로 먼저 일어나 나가버렸다. 그때 나를 걱정하던 바텐더의 눈빛이 기억난다. 아마 헤어짐을 통보받은 남친이거나 아니면 (나이 차이가 나니) 돈 떼인 삼촌쯤으로 보였으려나. 어느 쪽이든 좋은 기억일 리가 없다.
그런 기억들을 짐처럼 짊어지고 이 친구들 둘과 만났다. 단단히 마음을 먹고 그동안 준비해왔던 사업계획서를 펼쳐 놓고 열심히 설명했다. 왜 이 사업이 의미가 있고, 스스로 고민을 많이 했으며, 왜 그 둘이 같이 하면 좋을지 침을 튀겨가며 설명했다. 약 한 시간의 미팅이 끝나고, 일주일 정도 생각하는 시간을 갖기로 한 뒤 헤어졌다. 가슴이 쿵쾅거렸다. 만에 하나라도 이 친구들이 "No"라고 해 버리면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봤지만, 도저히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긴장되고 정말 긴 일주일이 시작됐다.
궁금하지만 물어보지는 못하고 조바심에 안절부절못하던 중 어느 하루, 이 친구들과 셋이 있는 채팅 창에 느닷없이 문자가 떴다. 아직 일주일이 되기 전이었다.
이 친구들과의 공통분모의 한 친구가 페이스북에 올린 글이었다. 그것을 복사해 우리 셋이 있는 채팅창에 붙인 것이다. 그리고 채팅이 이어졌다.
동생 A: 저는 육불합의 3번 너무 결격 사유...
동생 B: ㅠㅠ
아, 같이 못하겠다는 암시인가. 왜 일주일이 되기도 전에... 좀 더 생각해보지. 아니 이 공통분모 친구는 왜 이런 이야기를 페북에 올려가지고...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동생 A: 플랫폼 경과가 궁금하고 남은 캠페인에 대해 오늘 밤 11시에 벙개 미팅 가능하신지?
일단 너무 콜! 이라고는 했지만 사실은 만나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그렇게 고민을 거듭했는데 또 거절당할 마음의 준비가 전혀 안 되어 있었다. 잠시나마 뿌듯하고 활기찼던 지난 약 한 달의 시간이 꿈이 되어 남고, 다시 그 전의 자괴감과 우울증으로 점철된 깊은 바다에 빠져들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갑자기 배가 아프다고 할까, 애를 재워야 한다고 핑계를 댈까 고민하는 사이 밤 11시가 됐다.
2차 캠페인에 대한 이야기를 가볍게 하고 동생 A가 말문을 열었다.
동생 A: 형님, 같이 하자는 제안 생각해봤는데요...
나: 어, 그래. (그 얘길 지금 갑자기 왜 해! 하지 마!)
동생 A: 형님도 아시다시피, 제가 예전에 한 선배 믿고 스타텁 하다가 크게 상처 받은 적이 있잖아요.
나: ...그, 그렇지. (몰라! 그런 기억에 이걸 대입하지 마!)
동생 A: 그 기억이 너무 커서 아직도 많이 남아 있는 것 같아요...
나: ... 그래, 나도 많이 말아먹어봐서 대충은 알 것 같아. 정말 힘들지 그런 기억...
동생 A: ...
나: 동생 B는 어때. 혹시 너도 생각해봤어?
동생 B: 네, 저도 생각을 해 봤는데요. 이번 캠페인이 거의 마지막인 것 같아요.
이때 동생 A가 마치 깜짝 놀랐다는 듯이 끼어들었다. 자기는 이미 최후통첩으로 나의 말문을 막아버렸으면서.
동생 A: 응? 그게 무슨 뜻이야?
동생 B: 이번 캠페인을 끝으로 그만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저도 여러모로 일이 있어서...
심장이 가슴 밖으로 튀어나올 듯이 뛰기 시작했다. 아, 또 이렇게 퇴짜인가. 도대체 난 왜 이렇게 밖에 안 되는 건가. 숨이 계속 짧아져서 억지로라도 연신 심호흡을 길게 해야 했다.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도저히 생각이 안 났다. 아무 생각도 안 났다. 침묵이 잠시 이어졌다.
나: 그렇구나... 후... 너무 아쉽지만, 음, 근데...
동생 A: 참 힘든 일인 거 같아요. 사람의 관계라는 게. 그런 상처가 생길까 봐 도저히 다시는 누군가와 뭔가를 같이 할 수 있다는 생각이 안 들어요.
누군지는 모르지만 그 실망을 안겨줬다는 선배가 원망스러웠다.
동생 A: 근데 형이랑, 형 가족이랑 우리랑은 그런 대충의 관계가 이미 아니므로 해당이 안 되는 걸로.
나: ...응?
동생 A: 특별한 관계니까 당연히 같이 해야죠. 뭘 걱정해!
나: ...응?
동생 B: 저도 이번 2차 캠페인은 여기까지만 하고, 진짜는 비영리법인 세워서 해야죠!
나: ...응응? 여러 일이 있다면서?
동생 B: 그러니까 비영리법인도 운영하고 그런 일! 뭘 걱정해!! ㅋㅋ 가시죠, 형님!
와 씨바. 나도 모르게 욕이 나왔다. 그러나 얼굴은 크리스마스 선물을 품에 안은 어린이의 그것보다도 밝은 미소가 가득했었으리라. 이 친구들이 미리 짜 놓고 장난을 친 거였다. 애초부터 같이 할 생각이었는데, 내가 너무 진지하게 피칭을 하니 장난기가 발동한 것이다.
동생 B: 아, 전 형님이 그렇게 열정적으로 피칭하실 때부터, 저희한테 이렇게까지 하실 필요 없는데,라고 생각했어요. 정말 의미 있는 임팩트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아요.
동생 A: 이미 이렇게까지 속도가 붙었는데 여기서 멈출 순 없잖아요. 가야죠!!
동생 A가 기차 통 삶아 먹은 목소리로 연신 가즈아를 외쳐댔다.
미래를 그려보면 막막해질 때가 있다. 그러나 실제로 미래가 어두워서라기 보다는, 보이지 않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어차피 미래는 아무도 모른다. 보이지 않는 걸 보려고 해 봤자,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만 부각될 뿐이다.
그에 반해, 한 발을 먼저 내딛으면 내디뎠다는 사실이 부각된다.
그 한 발 한 발에 집중하다 보면, 그 한 발 한 발이 모여 미래를 그려주겠지. 그렇게 비영리법인의 길을 향해 조심스럽게 내디딘 한 발은 기억 속에 강렬하게 자리 잡게 되었다.
뒷얘기 1) Aricles of Incorporation을 캘리포니아 주정부에 보낸 뒤 얼마 안 있어 수상한 소포가 하나 배달되어 왔다. 뜯어보니 Meal Forward라고 적힌 유리잔과 의사봉이었다. 순간적으로 주정부에서 이런 것도 보내주나,라고 생각했지만 금세 이 친구들의 장난 섞인 선물임을 눈치챘다. 정말 센스 넘친다. 그렇게 이 사진은 Board of Director 회의록 맨 위에 떡하니 박혀 있게 됐다.
뒷얘기 2) 법인 등록을 Meal Forward Foundation, Inc.라고 했는데, 나중에 전문가에게 들어보니 법인 이름에 "Foundation"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면, 이쪽 industry에서는 보통 다른 비영리법인에게 자금을 대주는 비영리법인이라고 이해한다는 피드백을 들었다. 우린 물론 남 줄 자금은 한 푼도 없고 비즈니스 모델도 달랐기 때문에, 설립하자마자 이름을 Meal Forward, Inc.로 바꿔야 하는 촌극이 발생했다.
전문가: 어머, 이미 알고 계신 줄 알았어요. 그럼 왜 '파운데이션'이라고 하셨어요?
나: 멋있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