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도하지 않은 선물인 셈 친다
듣고 싶은 말을 들으려는 욕구보다,
듣기 싫은 말을 피하려는 욕구가 더 강하다.
그리고 그 욕구는 생각보다 꽤 쓸만하다.
큰 결심을 하고 일을 벌였다. 친한 동생 두 명과 뜻을 합해 Meal Forward Foundation, Inc.라는 NPO(비영리법인)를 세웠다. 많은 사람들이 축하해줬다. 페이스북과 링크드인 등 SNS에 포스팅을 올렸는데 백 명이 넘는 사람들이 리액션을 해줬다. 백 명이 넘는다는 것은 나의 SNS에서는 사건이다. 문자도 많이 받았다.
축하의 메시지를 과분하게 많이 받았지만, 모든 축하의 메시지가 같은 느낌인 것은 아니었다. 모든 메시지가 힘이 되고 기분이 좋아져야 하는데, 그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중에는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기분이 상하는 말이 한 마디 있었다.
축하해요. 너무 잘 어울려요.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많이 들었던 말 중에 하나이기도 하다.
어울린다니, 언뜻 이해가 가는 말은 아니었다. 뭐가 어울린다는 거지? 불과 두 달 전만 해도 비영리법인의 '비읍'도 내 인생 사전에 없었는데? 내 사전에 '비읍'이라면 빌리언 달러의 '비읍' 밖에 없는데!!
이런저런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게 되는 한 마디였다. 생각하면 할수록, 마치 아래와 같은 숨겨진 의미가 담긴 것 같았다.
그래, 사업은 무슨 사업이야. 비영리법인이나 잘해. 사업은 정글이라고. 비즈니스는 우리 같은 기업가에게나 가능한 일이야. 미안하지만 당신은 역부족이야.
그러니까 비영리법인 하면서 착하게 살아.
비영리법인을 운영하게 됨으로써 치열한 자본주의 경쟁사회에서 한 발 뒤로 물러서게 된 느낌. 선택적 낙오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하는 한 마디였다. 비영리법인도 비즈니스라는 사실을 잘 알게 되었지만, 그것이 위로가 되지는 않았다. 고민을 많이 하고 자기 자신과도 많은 대화를 나눈 끝에 생각을 고쳐 내린 결정이긴 했지만, 지난 20년 간 이어진 꿈을 향한 마음의 관성만은 아직 어쩌지 못한 것 같았다. 그렇게 실제로는 아무도 의도하지 않은 스티그마를 스스로 만들어냈다. 정말 잘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전해줬을 그 친절한 한 마디를, 몇 번이고 곱씹으면서 점점 마음속의 괴물로 만들어갔다.
안다. 알고는 있다.
결국엔 내가 비영리법인에 대해 가져왔던 잘못된 편견과 무지가 만나 태어난 괴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아무튼 생각만 하면 기분이 안 좋아졌다. 그렇게 괴물은 나의 24시간을 빠르게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한 마디가 되었고, 밤에도 그 한 마디와 투닥거리다 잠들었다. 축하의 메시지라도 받게 되면 "저한텐 어울리진 않지만"이라고 미리 방어막을 치기도 했다. 그러나 그러면 곧, "아니에요, 너무 잘 어울려요"라는 대답이 돌아와 그것도 곧 포기했다. 참 바보 같은 전략이었다.
그렇게, 내가 만들어낸 '자본주의 경쟁사회로부터의 낙오자'라는 낙인에 스스로, 나 혼자, 찍혀버렸다.
나를 괴롭히던 이 한 마디는 사실, 브런치를 써야겠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비영리법인을 운영한다는 것이 얼마나 치열한 고민과 전략이 있고 테크놀로지와 드라마가 가득한 일인지 기록해 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을 돕겠다'는 결정이 마냥 순진무구한 생각만은 아니라는 점을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름답게 포장할 생각도 없었다. 아예 처음부터, 이 모든 건 거룩함 같은 건 1도 없이 결국 나 좋으려고 하는 것을 인정하는데에서 시작했고, win-win이 비전이다는 점을 속옷을 벗어젖히듯 까발렸다.
한 발 더 나아가, 앞으로 진행될 일들도 가급적이면 더 치열하고 드라마틱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까지 했다. 아니, 실제로 그런 일들이 더 많이 일어나길 바라고 있는 것 같다. 진심으로. 가능하면 가혹하게 이야기가 진행되고 그것을 견뎌내고 또 성장하는 거다. 훗, 거봐라 나도 기업가처럼 이런 어려운 일을 헤쳐나가고 있다고 큰소리치는 거다. 내가 그런 것에 집착하는지 아무도 모르겠지만.
그렇게 마음속에서 시작된 (실은 아무도 찍지 않은) 낙인에 대한 화와 약간의 짜증은 나의 더 적극적인 행동의 연료가 되었다. 이왕이면 좀 더 과감한 쪽으로 도전하게 되었고, 망설이는 시간이 줄었다. 자본주의 경쟁사회에서 탈락한 한 기업가 워너비가 될까 노심초사했다. 남의 시선은 신경 쓰지 않겠다고 수도 없이 다짐하며 살았지만 어쩔 수 없나 보다. 그냥 싫었다. 그렇게 보이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덕분에 일은 진행이 빨리 진행됐다. 우리를 적극적으로 알리기 시작했고 San Francisco의 시정부 인사와도 미팅을 가졌다. 실리콘밸리 지역의 한인교포 비영리법인 모임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했고, '인더스트리'(영리법인, 즉 자본주의 경쟁사회)에서 왔다고 나를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도 생겼다. 이 일을 함께할 자원봉사자들을 모으기 위해 예전 팀 동료, 예전 회사 동료, 지인 등 많은 사람들에게 직접 연락해 설득했다. 예전 같았으면 쭈뼜거릴 일이었겠지만, 낙인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나에게 그런 여유는 없었다.
듣기 싫은 그 말이 자양분이 되어서 나를 더욱더 원대한 도전의 장으로 등 떠미는 것 같았다. 분명히 순수한 의도의 이 친절한 칭찬의 한 마디는, 너무나도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가장 듣기 싫은 말이 되었다. 그러나 가장 싫은 말이었기 때문에,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도움이 되는 말이 되었다. 더 많은 임팩트를 내도록 끊임없이 노력하게끔 할 멋진 자극제이자 선물이 되었다.
살다 보면 뭔가 변화를 주고 싶어 질 때가 있다. 그리고 변화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노력을 해야 하는데, 이게 쉽지가 않다. 곧 지치고 만다. 변화에 대한 욕구는 금방 약해지고, 원래대로 돌아가도 괜찮다고 금세 합리화하게 된다.
노력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보통 어떤 강한 계기나 동기부여가 필요하다. 변화를 위한 노력이 아무리 고되고 지겨워도 견딜 수 있는 힘의 원동력. 그리고 보통 그런 계기는 기분 좋아지고 밝은 것보다 기분 나쁘고 어두운 것에서 오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지긋지긋한 백수 생활에서 벗어나겠다고 마음먹었다고 하자. 어딘가에 취직했을 때의 달콤한 상상보다, 지금 당장의 거지 같은 현실을 벗어나고 싶다는 욕구가 훨씬 더 도움이 될 수 있다. 변화된 삶을 직접 경험해본 적은 없어 사실 크게 와 닿지 않지만, 지금 당장의 거지 같은 현실은 얼마나 지긋지긋한지 잘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좋아하는 것을 얻으려는 욕구보다, 싫어하는 것을 피하려는 욕구가 더 강하다. 먹는 것도, 보는 것도, 듣는 것도 다 마찬가지이다.
듣고 싶은 말을 들으려는 욕구보다,
듣기 싫은 말을 피하려는 욕구가 더 강하다.
그리고 그 강한 욕구가 변화의 좋은 시작이 되기도 한다. 즉 거꾸로 말하자면,
뭔가가 거지 같이 마음에 안 든다면,
변화의 자양분 삼기에 딱 좋다, 고 생각하면 편하다.
그리 다루기 쉬운 욕구는 아니지만 꽤 쓸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