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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파리: 불안한 시작

Recharge 1일 차

by Chuchu Pie

1일 차 하이라이트

약 17년 전, 난생처음으로 파리에 온 날을 기억합니다. 패션과 낭만의 도시를 향했던 설렘을 그 도시에 도착한 순간 딱 날려버렸던 기억이 있습니다. 공항에 내리자마자 소매치기를 당한 거죠! 같이 온 직원의 지갑도 저의 설렘도 모두 눈 깜짝할 새 사라졌습니다.


17년이 지난 지금 가족과 함께 다시 파리 여행을 준비하게 됐을 때, 처음부터 테마가 소매치기 방지였습니다. 자물쇠도 사고, 복대 지갑도 사고, 트렁크 스트랩도 사고. 17년 전에는 없었던 유튜브와 페북을 통해 방대한 양의 소매치기 수법도 머릿속에 익혔습니다. 마치 호신술을 수련하듯 복대 지퍼를 열어보고 빠르게 닫아보기를 반복했습니다.


그래도 뭔가 불안한 마음이 있었는데, 알고 보니 "적"은 내부에 있었을 줄이야.


일단 아침에는 예전에 미리 현금으로 뽑아 챙겨둔 한 달 여행 경비가 통째로 사라져 난리법석 한바탕 소동을 벌였습니다. 그렇게 몸을 좀 "푸는가" 싶더니, 결국 프랑스행 비행기에 콘택트렌즈 보관통과 안경을 통째로 두고 내리고 말았습니다.


안경이 없으면 아비어미도 못 알아보는 마이너스 6.5의 가공할 시력의 소유자인 저에게는 제법 큰 일입니다.


분실물센터에 신고하고 난리를 쳤지만, 직원들은 아마 찾을 수 있을 거라고 미소를 지어줬지만! 오랜 "깜빡"의 경험을 통해 알 수 있었습니다. 이미 누군가에게 발견되어 쓰레기통으로 들어갔을 일. 10년을 넘게 동고동락한 정든 안경에 마음속으로 작별인사를 했습니다. 보헤미안 랩소디의 프레디가,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한 메리를 떠나보내는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약 한 시간 후, 결국 못 찼았다는 얘기실낱 같은 희망을 담은 연락처로 답변을 대신하고 숙소로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고된 첫 날을 뒤로 하고 깊은 잠에 빠진 아내의 안경을 대신 빌려 쓴 채 첫 일기를 씁니다.




1일 차 여행 일지

출발하기 전이 가장 신납니다. 오클랜드 공항은 처음이었는데, 생각보다 여유 있고 아담해서 좋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Norwegian 항공도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Bay Area에서 Paris 행 비행기 중에는 XL Airways 다음으로 싼데, 주 기종인 보잉의 Dreamliner 연비가 좋아서 그렇다고 합니다. 뭐 사실이든 아니든 싸고 좋으니 감사할 뿐이죠.


물론 일찍 구매하긴 했지만 1인당 편도 캘리포니아 오클랜드 - 프랑스 파리 최 성수기 가격이 약 250불! 아주 만족스러웠습니다. 너무 만족스러워서 와인 등등 이것저것 세 번이나 시켜 먹어서 결국 예산을 초과한 건 함정.


샤를 드골 공항은 17년 전과 비교해 크게 달라진 건 없다,라고 멋있게 말하고 싶지만 너무 오래전 일이라 사실 기억이 안 납니다.


우리 일행은 네 명이기 때문에 공항에서 시내 들어가는 교통편 가격이 버스나 기차 대비 우버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네 명 기준 약 60 - 80 유로. 아이들은 비행기에서 영화만 주구 장창 보더니 결국 내리자마자 뻗었습니다.


호텔에 짐 풀기 무섭게 안경부터 구매했습니다. 마침 호텔 근처에 리뷰 좋은 안경 가게가 있어 들어갔습니다. 안경 잃어버려 왔다고 하니 (소중한 안경을 함부로 대했으므로) 벌금을 매기겠다는 둥 농담 따먹기를 합니다.


처음에 264 유로 달라던 걸 현금이 어쩌고 하면서 사정하니까 200 유로로 대번에 깎아줍니다. 아저씨도 아가씨도 통도 크고 목소리도 크고 아주 시원시원했습니다. 그리고 재고가 없어서 그까이꺼 대충 그냥 양쪽 도수 모두 마이너스 6으로 통일하잡니다. 그건 재고가 있어 하루면 되지만, 마이너스 6.5 이상은 당장 재고가 없어 일주일을 기다려야 한다고 합니다. 선택권이 없으니 그냥 끼고 다니는 걸로.

저녁은 호텔 직원이 추천해 준 세 곳 중 하나인, La Terrasse. 와이프 말로는 유튜브에도 나왔던 곳이라고 해서 설렘을 안고 들어갔지만 완전 실패. 맛도 인상적이지 않고 뒷사람이 담배를 피워대는 통에 여러모로 망쳤습니다. 특히 Beef Chop을 Veal Chop으로 오해하고 시킨 게 실수였습니다. Veal Chop은 얼핏 맛이 Pork Chop과도 비슷해서, 지금 당장 블라인드 테스트를 한다면 분명히 틀릴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로 평범했습니다. 옆 테이블이 Beef Chop 시킨 거 보니 정말 맛있어 보였는데.


Prawn Ravioli는 낯선 향신료가 들어가서인지 무슨 우주에서 날아온 외계의 맛이었습니다. 먹다 보니 훗날 인류가 화성에 정착한다고 해도 과연 입맛이 맞을까 급 걱정이 됐습니다. 가장 기대 안 했던 달팽이 요리 (Escargot)가 그나마 가장 나았습니다. 마늘과 파슬리 버터향이 가득한 골뱅이를 먹는 식감입니다. (그래서인지 소주 생각이...) 실험 정신으로 주문한 음식이 주식이 되었습니다.


저는 오래된 와인을 좋아합니다. 사실 맛은 잘 모르겠지만, 왠지 그 와인이 만들어진 연도에 따라 당시의 추억을 떠올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추억은 오래된 것일수록 떠올릴 맛이 나니까요. 물론 와인 없이도 충분히 추억은 떠올릴 수 있지만, 그래도 와인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이를테면 Gym 없이도 사실 운동할 수는 있지만, 실제로는 Gym을 끊어 놓지 않으면 절대 운동하지 못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미국에 비해 프랑스에서는 오래된 와인을 상대적으로 싸게 살 수 있어서, 종류 상관없이 예산 내에서 살 수 있는 가장 오래된 와인을 샀습니다. 그런데 맛은 그냥 그랬습니다. 2010년 MBA 당시 면접에 80번 떨어진 기억만 괜히 떠올랐습니다.


아버지께서 언젠가 "똥을 먹어봐라 안 맛있다고 하나"라고 하실 정도의 쉬운 입맛인데, 오늘은 영 실패네요. 여행이 길어 피곤해서 그런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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