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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벵겐: 나무늘보를 만나다

Recharge 6일 차: 융프라우 > 미리미리미리뽕

by Chuchu Pie

6일 차 하이라이트

스위스에서의 첫날은 융프라우에 오르기로 결정했다.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우리에게 주어진 3일의 스위스 일정을 융프라우 (Jungfrau), 쉴트호른 (Shilthorn), 그리고 패러글라이딩 세 개로 잘 나눠야 했기 때문이다. 같은 날에는 할 수 없지만--산 꼭대기에 두 번 오르고 하늘을 나는 것이다--꼭 경험하고 싶은 것들이다. 문제는 날씨다. 세 일정 모두, 날씨에 따라 그 퀄리티가 천차만별로 변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며칠 전부터 시간 단위로 일기예보를 확인해왔다. 어떤 날은 융프라우가 오전에 화창했다가 눈이 왔고, 어떤 날은 쉴트호른이 맑다고 나왔다. 그렇게 이른 아침까지 융프라우와 쉴트호른 두 itinerary 사이에서 갈등했다. 오전에는 둘 다 맑았고, 오후에는 둘 다 흐려졌다. 내일 날씨도 둘 다 비슷했지만 쉴트호른이 쪽이 더 맑았기 때문에 결국 오늘 융프라우를 희생(?)시키기로 결정했다.


여행 사이트 등을 보면, 융프라우에 가려면 무조건 아침 일찍 가라고 나온다. 보통 오전에 날씨도 좋고 사람도 덜 북적대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침부터 서둘러 대략 오전 10시쯤에 나왔다. 10시 정도면, 아직 시차에 적응해 가는 아이 둘을 데리고 다니는 4인 가족 기준으로는 새벽이다...라는 건 솔직히 미적댔던 스스로를 위한 변명이고. 실은 너무 늦은 것 같아 마음이 급했다.


융프라우로 가는 기차는 삼십 분 간격으로 있다. 삼십 분이면 알프스의 거친 먹구름이 맑은 하늘을 열두 번 덮고도 남을 시간이다. 다음 기차는 10시 54분에 있었기 때문에 이번 것을 꼭 타야 했다.


그러나 이럴 때일수록 문제가 터지지 않으면 더 이상할 일. 막상 매표소에 도착하니, 여권이 없으면 티켓을 안 끊어 준다고 한다. 여권은 호텔 금고에 있고, 시계를 보니 발차 시각이 15분 남았다. 호텔까지는 왕복 약 1.4킬로미터 정도이고 오르막이다.

그래, 그나마 돌아올 땐 내리막이지.


잠시 망설이다가 뛰기로 결정했다. 기차는 놓칠 수 없기에, 살면서 이렇게 숨이 찾던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뛰었다. 게다가 고산 지대. 뛰기 시작한 지 채 1분도 안돼 후회되기 시작했다. 매 한달음 내디딜 때마다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을 간신히 뿌리쳤다. 그렇게 왕복 1.4킬로미터의 급경사 산악 지형 달리기 (+ 금고 열고 여권 챙기고 다시 금고 닫기)를 8분 만에 주파하고 돌아왔을 땐 막상 기차표 창구에서 묻는 질문에 대답을 제대로 하지 못할 정도로 숨이 턱 밑까지 차올라 있었다. 그래도 7분이나 남아서 희망적이었다. 생각보다 빨리 돌아온 아빠에게 놀란 아이들과 아내에게 주먹을 불끈 쥐어 보여줬다.


하지만 마지막 변수는 창구에 계신 백발의 할머니. 인상이 주토피아 (Zootopia)의 나무늘보 같아 불안하다. (비디오 보기) 아니나 다를까, '이 세상에서 제일 급한' 아빠와 '이 세상에서 제일 느린' 할머니가 마주치게 됐다. 모니터와 여권을 번갈아 보시는가 싶더니만 옆 직원과 농담 따먹기를 하신다. 다시 독수리타법으로 뭘 하나하나 입력하는 듯하더니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도저히 서두르실 기미가 안 보인다. 때마침 우리가 타야 할 기차가 플랫폼에 미끄러져 들어온다. 손목시계와 기차를 차례로 쳐다보며 내가 불안해하자 창구 너머로 힐끗 보시더니 한 마디 하신다.


"저 기차는 잊어."


아니, 지금 어떻게 뛰어갔다 왔는데! 심장 마비의 위험을 건 나의 산악 달리기를 그렇게 쉽게 수포로 만들 수는 없었다.


"저 기차를 꼭 타야 합니다. 빨리 부탁해요."

"불가능해. 30분 있다가 또 오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아주 간단명료하고 논리적인 정리였다. 반박할 틈이 보이질 않았다. 심장 마비의 위험을 건 나의 산악 달리기는 그렇게 '쉽게' 수포로 돌아갔고, 실망한 내 어깨를 아내와 아이들이 토닥거려줬다. 온몸이 땀 뒤범벅이었다.


하지만 막상 포기하고 나니 편했다. 시간은 30분이나 남아 있었고 어차피 할 일도 없다. 꽉 막혔던 시야가 넓어지면서 주변이 보이기 시작했다.


할머니의 주름이 상당히 깊다는 것도 (그제야) 눈치챘다. 못해도 연세가 80세 후반 90대 초반은 되실 것 같다. 그래도 코 끝에 세워놓은 돋보기 뒤로 눈빛이 제법 날카롭다. Swiss Half Fare가 좋을지 Swiss Travel Pass가 좋을지 능숙하게 계산해주신다. 그 연세가 되어서도 건강하고 밝은 모습으로 동료들과 농담 따먹기를 즐기는 모습이 문득 멋져 보였다. 사회의 한 일원으로 당당하게 살아가시는 모습에 힘이 느껴졌다. 젊은 시절, 아름답고 자신감 넘쳤을 커리어 우먼의 모습이 투영됐다.


주토피아의 나무늘보 같은 사람이다,라고 생각했던 뇌를 꺼내다가 엎드려뻗쳐를 시키고 싶을 정도로 무안해졌다. 기차를 타야겠다는 내 욕심에 갇혀 주변을 못 봤다. 그 욕심에 도움이 안 되는 것은 모두 나무늘보처럼 "쓸데없는 것" 취급을 했다.


오며 가며 지나치기만 했던 시골 역사에 우두커니 앉아 주변을 둘러봤다.


정말 멋있는 역이다.





6일 차 여행 일지

해발 3,500미터가 넘는 융프라우요흐에 와보니 내가 고산증에 얼마나 약한 지 처음으로 깨달았다. 숨도 잘 안 쉬어지고 어지러웠다. 제대로 걷기 힘들어 몇 걸음 만에 계속 쉬어야 했다. 뱃멀미를 할 때는 누워있어야 한다는 것처럼 응급처치 방법이 있을까 인터넷으로 찾아보니 수분과 염분, 그리고 당이 좋단다. 일단 기념품 가게에서 초콜릿부터 샀다. 근육이 많은 사람이 고산병에 더 취약하다는 말을 위안 삼았다.


우리 가족 중 첫째만 괜찮다.


7월이라고는 믿기 힘든 날씨다.

아내와 첫 째는 zipline을 탔다


융프라우에 오면 꼭 먹어야 한다는 컵라면. 하나에 7.5유로, 사발면을 챙겨가 뜨거운 물만 필요할 경우 4유로만(?) 내면 된다. 터무니없는 가격에 망설일 법도 하지만, 일단 맛있다. 라면값에 경험 값을 얹은 거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좀 더 편하다.


융프라우요흐 (Jungfraujoch: 융프라우 봉우리를 볼 수 있는 기차역 이름이다)에는 전망대 말고도 여러 가지 액티비티가 가능하다. 유럽의 꼭대기 (Top of Europe)라 불리는 융프라우. 사실은 "처녀"라는 뜻이다. 변화무쌍한 날씨로 인해 보통 때는 그 멋진 모습을 안개 옷에 가려 잘 보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그대로 느껴지는 이름이다.


내려오는 길. 고산증에서 해방되면서 일단 졸렸다가 에너지가 생긴다. 마이너스가 되었던 에너지 레벨이 급격하게 돌아오면서 관성이 생겨, 에너지 과다와 부족 상태를 시소처럼 반복한다.


저녁식사는 스위스식 이탈리안, 이라는 게 만약 있다면 바로 그거.


융프라우 하나로 지쳤지만, 시간은 많이 남았다. 그래서 호텔방에서 그냥 놀기로 했다. 쎄쎄쎄도 하고 카드놀이도 하고 미리미리미리뽕도 하고 놀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왜 그랬나 싶지만, 너무 웃겨서 자지러지는 줄 알았다. 텔레비젼과 핸드폰이 없으니 가족과 더 많은 시간 동안 더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보낼 수 있게 된다. 소중한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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