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호텔은 산골짜기에 끼여 자리 잡은 조그만 도시 벵겐 (Wengen)의 꼭대기 쪽에 있다. 그래서 역에서 내려 호텔에 갈 때마다 산악인의 심정으로 걸어 올라가야 한다. 하지만 일단 호텔에 도착하면, 산속에 파묻힌 자연인의 생활이 힘들었던 "산악행"을 보상해준다.
오늘은 산새 소리에 잠을 깼다. 조금 열어 놓은 창문 틈으로 새벽부터 지지배배 울어댔다. 부스스한 모습으로 테라스에 나가보니 눈 덮인 기암절벽이 내려다보고 있고, 그 아래 초록빛 풀 나무와 갈색 스위스 샬레가 옹기종기 아침을 맞이하고 있다. 압도적으로 고요하다. 들리는 건 저 지지배배 산새 소리와 어딘가 흐르고 있는 물소리, 그리고 지구가 자전하는소리뿐이다. 그런 것 같다.
숙소에서 보는 풍경은 아니지만, 위 묘사에는 이 사진(벵겐에서 라우터브루넨 가는 길)이 더 잘 어울리는 것 같다. 숙소 이미지는 아래에.
시계를 보니 아침 여섯 시. 동네 한 바퀴 뛰어야겠다는 생각에 부스럭거리니 아내도 잠이 깼다. 그렇게 둘이 호텔을 나와 그림 같았던 마을에 온 몸을 던져 달려들어갔다. 빙하의 공기를 머금어 차갑고 순도 높은 산소가 온몸을 휘감는다. 코와 폐가 뻥 뚫리는 느낌이다.
과연 "신과 스위스인이 함께 빚어낸 아름다움"이란 말이 맞았다. 동네 한 바퀴 다 뛰어봐야 1.6 킬로미터 정도로 짧지만, 한 발 한 발 내디딜 때마다 변하는 주변 풍경은 한 컷 한 컷이 모두 사랑스러웠다. 신이 빚은 대자연과 그 아래 초록색 틈새 안에 스위스인들이 만들어 놓은 작고 귀여운 마을의 조화.
문득, 아름다움이란 것은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 절대적이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프스의 기암절벽이 하와이의 해변을 시기했을 리 없다. 그저 그렇게 우뚝 솟다 보니 남들이 좋아해 줄 뿐. 대자연도 그런데, 그 일부인 우리 사람들이다른 사람들의 아름다움을 시기하고 질투하고 따라 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름다움은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오늘은 아침 식사 후, 이 동네에서 융프라우에 이어 두 번째로 높은 쉴트호른 (Schilthorn)을 방문하는 게 목표였다. 올라가는 코스는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우리는 한쪽 코스로 올라가 다른 쪽 코스로 내려오는 계획을 세웠다. 기차를 세 번, 케이블카를 일곱 번, 버스를 한 번 타는 꽤 번잡한 과정이다.
그리고 이런 번잡한 과정을 거치면 항상 밀접하게 맞닿게 되는 것이 사람이다. 세계 각국에서 모인 사람들이 수십 개의 다른 언어와 수십 개의 다른 문화를 들고 와 한 곳에 풀어놓는다. 겨우 8평 정도 될까 한 케이블카에 몰려 타고 기차에 몰려 타고 버스에 몰려 타고 북적대고 그러는 거다.
지구촌 사람들이 그 작은 공간에 모여 떠들고 웃고 먹고 하면, 서로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이해는 할 수 있다. 아이가 울면 그들만의 언어로 쭈쭈쭈해주고, 무거운 짐을 들어주면 그들만의 눈빛으로 고마워한다. 그렇게 다양한 사람이 모여도 그 사이에는 절대적인 무언가가 있어,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다.
케이블카를 타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는데, 한 아시아인 무리가 우르르 몰려들더니 슬금슬금 옆으로 선다. 그들로 인해 '줄'의 형태가 애매해졌다. 그 애매함을 틈타 비슷한 무리가 또 들어온다. 이제는 '줄'이라는 것이 무색해지고 그냥 사람 떼가 되었다. 사람들이 아름다운 선을 만들어 그려 놓은 교양이라는 작품에 제멋대로 붓질을 해버려 그림이 엉망이 됐다.
이건 좀 아니지 않아요?
우리 바로 앞에 서 있던 한 한국인 커플의 여자분께서 불평을 토해낸다. 뒤에 서 있던 아내가 맞장구를 친다. 그래도 변한 건 없다. 변한 건 맞장구로 인해 조금 나아진 두 사람의 기분뿐이다.
쉴트호른에 올라 알펜호른 (Alpenhorn) 연주를 감상하려니 이미 자리 잡은 뒷사람은 아랑곳 않고 바로 앞을 막아 서 버리는 사람이나 (아내가 한 소리해서 뒤로 보냈다), 한참 연주하고 있는데 아무리 야외라지만 큰 소리로 웃고 떠드는 사람이나, 다 같이 나눠 쓰는 식사 테이블에 음식 쓰레기를 잔뜩 늘어놓고 사라진 사람이나 마찬가지다. 그렇게 다양한 사람이 모여도 그 사이에는 절대적인 무언가가 있다.
문득 '아름다움'처럼, 교양은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 절대적이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누군가의 교양이 조금 덜 없다고 해 봤자 의미가 없다. 새치기를 한 사람이 음식 쓰레기를 잔뜩 늘어놓은 사람보다 덜 나쁘지 않다. 그냥 자기 멋대로만 행동하면 남들에게 불편을 줄 뿐. 그 이기심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알프스의 기암절벽도, 하와이의 눈부신 해변도, 노파의 짐을 들어주는 사람도, 새치기하는 사람도 그냥 다 절대적이다.
아름답고, 시원하고, 훈훈하고, 미울 뿐이다.
7일 차 여행 일지
아침에 부스스하고 나왔을 때의 실제 풍경이다.
아침에 조깅을 마치고 운동이 부족한 듯해 호텔 Gym을 찾았다. 출장 포함 여행을 꽤 다녔지만, 내가 본 것 중 가장 작은 Gym이다.
쉴트호른에 오르기 위해 뮈렌 (Murren)으로 가는 기차다. 맨 앞에 타는 바람에 신나게 동심을 소환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바라본 풍경.
뮈렌에서 바라본 풍경과 마을 안. 벵겐과 마찬가지로 자동차로는 접근할 수 없는 청정지역인 뮈렌. 사실 스위스 여행 전부터 눈여겨봐 온 곳이다. 따로 여행할 계획을 짰지만 쉴트호른에 오르는 길에 어차피 지난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정말 아름다운 도시. 만약 스위스에 또 온다면 한 번 묵어보고 싶다.
스위스 뮈렌을 지키는 소방서. 레고 상자를 뚫고 나온 것처럼 작고 아담하다. 오히려 내가 지켜줘야할 것 같은.
쉴트호른은 안개가 자욱해 아무것도 안 보였다. 융프라우를 희생(?)한 이유가 무색해졌다. 다만 융프라우에서 고산증이 훈련되어서인지, 쉴트호른에서는 멀쩡했다. 겨우 해발 육칠백 미터 차이지만 그 차이는 컸다.
쉴트호른에서 007을 찍었다고 해서 엄청 우려먹는다. 곳곳이 007 테마다. 도움이 된 순간이 있다면 케이블카를 기다리는 대기실에 틀어져 있던 007 영상. 대기 시간 약 10분을 잘 때울 수 있었다.
문제의(?) 알펜호른 공연. 갑자기 앞을 가로막는 한 관광객이 있었다.
내려오는 길에 Sky Walk가 있는 Birg 역에 내려 한 바퀴 돌았다. 정상이 날씨가 안 좋았기 때문에 오히려 정상 아래가 더 재미있는 코스였다.
쉴트호른에서 바라본 뮈렌
스릴 넘치는 구간이 몇 개 있다.
유리에 금이 나 있다. 꼭 이런식으로 까지 스릴 넘칠 필요는 없는데.
점심은 뮈렌에 내려와서. Rosti (해쉬브라운에 치즈 등 각종 재료를 얹어 만든 음식. 맥주 안주로 딱이다.)와 크림수프 등을 먹었는데, 그새 다시 추워진 날씨에 안성맞춤이었다.
스위스 여행의 고수가 묵는다는 김멜발트 (Gimmelwald). 자동차로는 갈 수 없는 청정지역임은 물론이고, 그 흔한 편의점도 없다. 시계가 20세기 초중반에 멈춰버린 듯한 마을이다.
돌아오는 버스 정류장에서 한국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 내 옆에 있는 사람과 사진을 찍고 사인을 받길래 누군지 쳐다봤지만 잘 모르겠다. 아내가 한참을 고민하더니 그분이 박신혜 씨인 걸 알아냈다. 가족 여행을 온 것 같았다. 그 어머님께서 언니와 쎄쎄쎄를 정열적으로 하고 있는 둘째 딸을 보더니 귀여운 듯 쓰다듬으며 "신혜 모르니" 하신다. 미국에서 자라서 알 리가 없는 둘째가 얼음처럼 굳어서 멀뚱멀뚱 쳐다봐 무안해진 어머님에게 아내가 열심히 설명해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