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만의 콧대가 잘린 찰나, 거짓말 같은 노인이 나타나다.
IMF가 터졌던 1997년 가을, 나는 미국 워싱턴 주에 있는 한 시골 대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감자가 유명한 아이다호 주와의 경계선 즈음, 드넓은 밀밭 한가운데에 덩그러니 있는 학교였다. 시애틀에서 작은 쌍발 프로펠러 비행기로 갈아타고 한 시간을 들어가면 나온다. 너무 황량해서, 처음 비행기 위에서 바라봤을 땐 노랗게 익은 밀밭이 끝없이 펼쳐진 것을 보고 사막이라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막상 미국 땅을 밟고 나니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상당히 비장한 마음이 생겼다. 어쨌든 부모님께서 어렵게 보내주신 유학생활을 허투루 보낼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소한 그 정도의 양심은 있었던 것 같다. 솔직히 한국에서의 엉망인 생활—대학교 3학년 때 중퇴를 해버렸다—을 뒤로하고 왔는데, 또 망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자마자 IMF가 터졌다. 충격은 컸다. 환율이 불과 몇 달 만에 3배 가까이 올랐고, 유학생 커뮤니티는 태풍 속 갈대처럼 크게 휘청했다. 누구누구가 어쩔 수 없이 짐을 싸 한국으로 돌아갔다는 류의 소문이 하루 건너 들렸다. 그런 뭔가 캠퍼스 전반적으로 한인 학생 사회에 불던 우울한 분위기가 오히려 나에게는 자극이 되었다. '뭔가, 어쨌든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부터, 궁지에 몰려야 비로소 고양이도 앙, 하고 물어뜯는 생쥐 근성이 생긴 것 같다. 그때 친해진 한 형님과는 한 푼이라도 아끼느라 점심에 컵라면 하나를 둘이서 나눠 먹기도 했다. 밥 한솥에 주먹보다 작은 오징어 젓갈통 하나 달랑 꺼내놓고 며칠씩 (핥아) 먹었던 기억도 난다.
IMF의 충격이 좀 사그라진 후에도 긴장은 놓치지 않았고, 약 3년이 지났을 때쯤 놀랍게도 나는 (물론 전혀 경쟁이 치열하지 않은 시골 학교지만) 꽤 좋은 성적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오만함과 거만함이 스멀스멀 가슴속에 싹트고 있었다. 나는 성적도 좋고 유학파니까 국가에서 데려갈 거야, 라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난다. 아마 살면서 공부 잘한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어, 분에 겨워 흥분했던 것이리라. 그런 오만함을 바탕으로 어느새 나는, 전공을 살려 경제학 박사과정으로 진학해야겠다, 는 마음을 먹게 된다. 지금 생각해 보면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말이다.
그렇게 마음먹고 4학년부터는 GRE(Graduate Record Examination: 대학원에 들어가기 위해 반드시 봐야 하는 시험인데 시험이 너무 힘들어서 '지랄리'라고 불렀다) 공부에 시간을 쏟았다. 하지만 처음 치른 시험에서 만족할만한 성적이 나오지 않았고, 그냥 그 별로 좋지 않은 성적으로 대학원에 지원했다. GRE는 좀 낮지만 다른 부분이 우수하므로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오만함만은 잊지 않은 (그 당시의) 나는, 평소 동경했던 스탠퍼드 대학교(Stanford Univerity)와 버클리 대학교(UC Berkeley)를 비롯한 US News 랭킹 기준 초탑스쿨 6군데, 그리고 소위 '안전빵'이라고 생각한 20위권 한 학교에 지원했다. 그 미국 전체 등수에도 등장하지 않던 감자마을 옆 밀밭 시골학교에서. 못해도 4-5개 정도는 합격하겠지, 스탠퍼드는 조금 불안하네,라고 생각했다.
드디어 봄이 되고 '안전빵'을 제외한 6개의 학교에서 결과를 받았다. 너무 긴장하고 기대해서 하루에도 몇 번씩 우편함을 열었다 닫았던 기억이 나는데—당시에는 합격통보를 우편으로 줬다—결국 받아 든 건 6통의 불합격 통지서였다. 그것도 한 번에 안 오고 일주일에 걸쳐 하루에 하나 꼴로 왔는데, 나중에는 우편함을 열어보는 순간 합격 여부를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불합격인 경우 봉투가 얇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에 누군가 멀리서 나를 봤다면, 우체통을 열고 발악하고 있는 짐승 한 마리를 목격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일주일 내내 매일 비슷한 시각에 나와서 똑같은 모습으로 발악하는.
오만의 코가 하늘을 찌른 높이만큼, 그것이 잘린 고통도 컸다. 당시에는 너무 충격이 커서, 3년 간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운영해왔던 태권도 클럽도 문을 닫았고, 수업도 다 빠졌다. 한국에 계신 부모님의 연락도 피했다. 초저녁이면 동네 술집 바 구석에 구겨져 있었고, 점심 늦은 해가 방에 들어와야 깼다. 그렇게 한 달은 보낸 것 같다. 거품 가득한 맥주를 퍼마시면서 내 안의 거품을 빼겠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던, 정말 어린 가슴이 아렸던 날들이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와 같이 술집 바 구석에서 찌그러져 술을 퍼먹고 있는데, 한 노인이 접근해 말을 걸었다.
노인: "젊은이, 굉장히 우울해 보이는데 무슨 일 있는가."
오만: "대학원 다 떨어졌는데, 솔직히 너무 충격을 받았어요."
첫마디에 바로 이실직고한 건 너무도 오랜만에 누군가와 대화를 했기 때문이려나. 귀찮으리라 예상했던 노인과의 대화는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고 대화가 무르익을 때쯤—즉, 와이프에 대한 불평이 나올 때쯤—노인이 흥미로운 이야기를 꺼냈다.
"자네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인 것 같네."
"감사합니다. 하지만 그건 아마 선생님이 취해서 그런 걸 거예요."
"아닐세. 만약 내가 자네라면 떨어진 그 학교에 직접 가서 딜을 한 번 해 보겠네."
"하하. 선생님, 딜은 카지노에서 돈 딴 이후에 끊었습니다."
"아닐세. 이건 진심이라고. 믿거나 말거나 나는 이 학교 단과대학장일세. 만약 내가 입학처장이었다면 자네 같은 친구와의 딜은 심각하게 고려해 볼 것 같네."
"하하. 고맙습니다, 선생님. 단과대학장 받고 주지사 콜."
술에 취해서인지, 노인의 행색이 수수해서인지, 아니면 그냥 모든 걸 부정하고 싶던 마음에서인지 나는 아무것도 믿지 않았다. 내가 너무 안 믿으니 내게 명함을 건넸는데, 그것마저 바로 주머니에 넣어버리고 일어섰다.
"우리 와이프가 다음에 또 출장 가면 그때 또 여기서 보자고."
그 말을 등으로 받고 집에 돌아와 곯아떨어졌는데 점심때 일어나 혹시나 하고 명함을 보니, 어허허 이 노인네. 진짜 단과대학장이었다. (어떤 단과대학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가슴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정신 차리고 딜을 하면 버클리에 갈 수 있을 수도 있다, 라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 자리에서 샌프란시스코로 가는 비행기를 예약했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