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데 아주 약간의 도슨트를 곁들인
인데 아주 약간의 도슨트를 곁들인
'해석의 여지를 얼마나 남겨야 하는가'
작업을 진행하고, 전시회가 다가와도 늘 계속 함께 고민했습니다. 처음 작품을 선보이는 입장에서 도무지 감이 잡히질 않았습니다. 어떤 작가는 그냥 전시장에 무언가 가져다 놓은 것 만으로 의미가 되고, 사람들이 아주 다양하게 해석을 하는 여지를 열어주는 능력이 있는 반면에 또 어떤 작가는 스스로는 아주 촘촘하고 정밀한 의미를 담고도 누구도 작품을 쉽게 해석하지 못해 대중에게 의미적으로 보여주는 데 서툰 작가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두려워서 마구 설명해 버린다면, 작품에 더 이상 해석의 여지가 남지 않은, 예술이라기보다는 하나의 개인적 역사서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도슨트를 하기에도, 그렇게 규모가 큰 전시도 아니고 시간적으로 통일할 수도 없고, 제가 그렇게 도슨트를 할 정도로 대단하지도 않습니다.
도무지 어느 방향으로 얼마나 건드려야 할지 감도 안 와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가장 나답게 해보고 싶어서 고민을 거듭했습니다.
저는 스토리를 전하는 글을 쓰는 것을 참 좋아합니다. 방금 이렇게 전개가 이어져 온 것처럼 이런 글을 가장 잘 쓰고 많이 쓰고 자신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사진을 한 시간보다 더 길고, 더 질적으로 깊이, 이런 글들을 써왔는지도 비교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아 그럼. 비하인드를 잘 녹여낸 이야기에 가벼운 나의 해석을 덧붙이면 어떨까? 그래서 탄생한 게 바로 이 비하인드 섹션입니다. 저를 정의할 때나 누군가 제게 무얼 하냐 물어보면, 항상 사진 찍는 것만큼 많이 나오던 글을 쓰고 있다는 말. 이 사진전 한편에 비하인드 스토리들이 존재하는 것. 그 둘이 아주 저답게 잘 어울리지 않을까?라는 기대를 가지고, 비하인드를 전하기 시작합니다.
카이로스에서 한 범주 더 상위로 올라가서, '시간'에 대해 고민하는 연작들의 원형은 사실 '추억'에 대한 정의를 내리는 작업이었습니다. '추억조각사'라는 작가명을 쓰고, 2년 넘게 그 이름으로 사진작업을 하면서 누구나 쉽게 어느 문장에나 함께 붙여서 써도 개연성에 문제가 없는 '추억'이라는 단어를 저는 조금 더 무겁고 깊게 이해해서 '추억'이라는 단어의 의미에서 '추억조각사'가 전하고자 하는 가치를 가지는 어느 부분을 연구해서 조명하고 싶었습니다. 글과 사진이 함께 어우러지는 그런 작업을 저의 첫 작업으로 삼겠다며 시작했죠.
그런데, 추억에 대해서 글을 쓰고 사진 작업을 하면서 더 의미들을 깊게 이해해 가는 도중에 늘 '시간'이라는 녀석이 빠지지 않고 그 곁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추억의 되는 순간들, 추억들을 조명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현재, 과거, 미래의 연결을 고민하고 있고. 기억과 망각을 보면서 질적인 시간을 떠올리게 되고. 그런 과정에서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결국엔 추억의 의미를 더 깊게 다뤄보기 위해서는 한 단계 또 위의 범주인 '시간'을 이해해야 했던 것이지요. 그리고 '시간'에 대해 작업을 한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정말 호기심과 흥미가 막 올라갔습니다.
그때부터 저의 작업의 범위가 확장되었습니다. '추억'에서 '시간'으로 그리고 추억에 대해 가장 밀접한 관계가 있던 '질적인 시간'이 첫 주제가 된 것입니다.
작업의 초창기엔 저도 '카이로스'라는 개념과 용어를 알고 있지 못했습니다. 글을 쓰고, 추억에 대해 이해하는 과정에서 뭔가 정략적인 시간 말고, 시간의 다른 축이 있을 것이고, 그에 대한 글을 계속 써오고 생각을 더 깊이 가지고 들어갔지만 여전히 '카이로스'라는 완벽한 이름을 만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집중력의 탄생' '시간의 놀라운 발견' 두 권의 책을 보고 '카이로스'와 더 가까운 생각을 하게 되고, 그러다가 결국 어떤 글을 보고 '카이로스'라는 단어를 만나게 됩니다. 보자마자 아! 이거다.. 이거다.. 이거네.. 내가 생각하고 전하려던 내용의 이야기가 이거였구나 했습니다. 제가 생각했던 게 이미 있었고 고대의 유물이 되어버린 시간의 개념이자 신의 이름으로 역사 속에 한 장면에 있었습니다. (기억이 자세히 나진 않은데, 아마 저 두 책에서 나왔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만난 카이로스와 크로노스의 비교는 너무 재밌어서, 아주 늦게 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노트북을 무릎에 올려두고 집에 도착하기 직전까지 몰입해서 글을 써봤던 기억이 있습니다.
카이로스 작업은 정략적, 그리고 약속된 시간의 정의인 크로노스와 반대의 부분을 바라보고 있어요. 그래서 아주 자연스럽게 즉흥적인 것, 정해지지 않은 것을 좋아하는 즉흥형(P)들은 그저 보는 것만으로 공감하기 쉽고 좋아할 만한 작업이에요. 그럼 자연스럽게 반대인 계획형(J)들은 싫어하지 않을까 싶지만 오히려 계획형들에게는 마음대로 안 되는 일이 있을 때 시간적으로 크게 틀어졌을 때 그것이 문제나 없어야 할 것이 아닌, 자연스럽게 존재할 수 있고, 여러 형태로 우리 주변에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싶은 작업이에요.
저는 뭐든 한쪽 극에 치우치기보다 양측면 혹은 그보다 더 다각을 바라보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지더라고요. 약간 저는 뭐든 조금 더 따듯하게 재해석해서 스스로를 위로해 주는 버릇이 있는데, 카이로스 작업에도 그러한 저의 버릇이 조금 담긴 것 같아요. 저는 시간에 대한 어떠한 관념이나 압박이 이 작업으로 인해 조금이나마 더 여유가 생기고 볼 수 있는 시선이 하나 더 추가가 되었는데, 작업을 보는 당신에게도 이런 것이 전달되고 어떤 순간에 조금의 도움이 된다면 어떨까? 아주 작은 바람을 드러내봅니다.
'그냥 아주 너무나도 평범한 일상의 표현'
솔직히 이 작업은 그냥 저의 너무나도 평범한 일상이고, 카이로스 작업을 하면서도 수도 없이 많은 예술가의 시간을 지나올 정도로 '하이퍼리얼리즘'이 깃들어 있는 작업입니다. 글쓰기 시작할 때였나? 사진 시작할 때였나. 여하튼 아주 밤까지 작업하는 게 너무너무 당연한 삶을 보내고 있습니다.
일이 많아서도 있지만 미루다 미루다 그런 것도 있고, 낮에는 너무 더워서, 그리고 이 루틴이 굳어져서 그렇기도 하고, 청각이 예민하다 보니 낮보다는 밤의 고요함이 더 집중이 잘 되는 것 같기도 하고.. 네.. 구구절절하네요. 사실, 게으르기도 게으르고 저녁형 인간도 맞는 거 같아요.
그리고 게으름에 대해 조금 더 들어가면 완벽주의의 탈을 쓴 게으름, 그리고 다시 조금 더 마음의 원형을 보면 두려움인 거 같아요. 흔히 창작의 고통이라고 하는 그거, 그게 저는 다른 게 아니라 머리를 쥐어 짜냈는데, 생각과 작품이 일치하지 않을 때 혹은 일치하지 않더라도 마음에 들면 괜찮은데 마음에 안 들 때 꽤나 고통스럽거든요. 그래서 그게 학습되면 한 번 작업을 하는 게 큰일이 되고, 할 때는 몰입하는데 정말 시작하기가 싫은 그런 네.. 그렇습니다. 제가 어떤 영상을 봤는데, 이건 아주 거장분들도 똑같더라고요. 작업하기 싫어하고, 머리 부여잡고 있고, 이건 극복의 분야가 아니라 아주 숙명적인 그런 게 아닌가 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게 있는데 또 그렇게 미루는 시간도, 만족 못하는 초안이 나오는 고통도 약간 둘 다 결코 의미 없지 않고, 오히려 실용적으로 도움이 된다고 해냐하나 아니 정말로 다 나중에 의미가 생기더라고요. 근데 그럼 이게 분명히 날린 시간인데 날린 시간이 아닌, 그럼 질적으로도 판단하기 애매한 그런 포인트가 너무 재밌어서, 작업으로 발전되었습니다.
물론 '예술가의 시간'이라고 제가 제목을 지어버렸으니 어떤 분은 "나는 예술가가 아니라 잘 모르겠어"라고 생각하셨을 수도 있는데, 누구나 삶을 그려나가니까. 예술가가 아닌 사람은 없다고 생각해요. 또 생각해 보고 곱씹어보면, 삶의 문제들을 해결할 때나 직업적인 길을 지나고 있을 때 '예술가의 시간'과 아주 유사한 경험들을 느껴보신 적이 분명히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작품을 보시고 그런 순간들이 떠올랐다면, 저는 작가로서 너무나도 행복합니다. 작품의 의미는 제 해석보다도, 여러분이 보냈던 작품 속 그 장면과 아주 유사했던 혹은 똑같았던 그 장면에 더욱더 크고 아름답게 존재하니까요.
'고양이와 글작가님'
고양이가 있었죠? 아주 귀여운,,, 저도 공간을 찾아볼 때는 몰랐는데, 너무 귀여운 고양이가 반겨주어서 더 재밌게 촬영했어요. 그리고 이 작업을 준비하면서 사진책에 대해서 레퍼런스를 조사할 겸 사진과 글이 있는 여러 책들을 보다가 '예술가와 고양이'라는 책도 봤거든요. 그리고 이런 사진도 찍고요. 그런데 '예술가의 시간'을 찍으러 간 공간에 고양이가 있다? 와 미쳤구나 속으로 생각하고 '대박'이라고 모델님께 신나서 이야기했어요.
그런데 이 당돌한 녀석, 초반에 작업할 때는 호기심을 보이다가. 함께 있으면 아주 좋을 것 같은 순간에는 들어가서 아주 코 자는 것 같더라고요. 정말 아쉬웠어요... 그래도 아주 귀여운 사진을 건졌고, 또 박스에 들어간 사진도 있는데 정말 귀여워서 따로 뽑았어요 ㅎㅎ
그리고 모델님과 작업을 시작하면서 어떤 예술가가 될지 정해보았는데, 거의 여쭤보자마자 글을 쓰는 작가로 고르셔서 사진 속 예술가는 글작가였습니다!!
'메인사진'
메인사진은 액자사진 아니야? 맞습니다. 결과물들을 보고 정했죠. 그런데 기획단계에서 메인은 핸드폰을 놓고도 시선과 손이 가고, 또 주변에 작업거리가 널브러져 있는 그 장면이 이 작업의 메인이었어요. 일하다가 5분만 폰 보자 하고 잠들뻔하다가 일하다가 할 때의 제 모습입니다. 정말 이것도 하이퍼리얼리즘. 심지어 이 비하인드 글도 딱 그 사진처럼 하다가 다시 일어나서 쓰는 중입니다.
그리고! 아주 열심히 준비해 주시고, 작업에 몰입해 주신 모델분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핸드폰 보는 콘셉트에서 누워야 하고, 구도상 어쩔 수 없이. 조금 망가져 주셨는데... 걱정되면서도 이게 너무 상상했던 모습 그대로 자연스러워서 속으로 너무 좋았습니다.. 잘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실제로는 더더 예쁘시고 이미지도 정말 밝으신 느낌이십니다. 사실 이 작업이 모델분 구하다가 한 분은 캔슬, 한 분은 거절하셔서 의지가 많이 꺾이고 멘탈이 흔들렸던 작업입니다. 그래서 기한을 얼마 안 남기고 작업제한을 전하게 되었는데 흔쾌히 응해주셔서 이렇게 마무리까지 왔습니다. 정말 너무 감사했습니다!
'물'
이 작업들의 원 제목은 '물'입니다. 생명체가 등장하기 이전부터 존재해 왔던 물. 어쩌면 물이 없었다면 생명체도 존재할 수 없었을 지구 생명의 역사의 가장 시작점에 위치하며 그때부터 지금까지 우리 주변에 너무 당연하게 있는 물. 물론, 지구나 달을 보고도 비슷한 생각을 해볼 수 있겠지만, 땅에 손을 댄다고, 지구를 느꼈다고 하기에도 좀 이상하고, 달은 너무 멀어, 관측에 그치기에, 우리 주변에서 그만큼 가늠하기 힘든 세월을 보내면서 아주 가까이 심지어 오늘도 몇 번은 마셨을 그 물. 그런 의미에서 이 작업의 제목이 물이었고.
비슷한 성격의 고목을 먼저 작업하고, 물도 작업하려고 했는데, 이미 고목만으로 너무 마음에 들어버리고, 물은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안 와서 그냥 '물'을 고목으로 바꿔버렸습니다.
'영원에 대해'
이 사진들은 작업을 막 시작하던 때, 사진보다는 글과 현생의 일들에 시간을 많이 쓰던 시기라 사진가의 '눈'을 좀 풀자면서 가볍게 집 주변을 산책하면서 찍은 사진입니다. 때마침 '살아가며 찍은 사진'과 '구경하며 찍은 사진'의 차이에 대해 고민하고 있어서 생활 범위 내에 보지 못했던 것, 눈여겨보았던 것들이 막 구상 단계이던 주제에 어렴풋이 닿아. 작업에 포함시키게 되었습니다.
두 사진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먼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보는 잡초꽃 사진에 대해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그 사진은 놀랍게도, 실제 꽃 길이의 1/3 밖에 담지 못했습니다. B컷 아니 C컷쯤으로 중간 부분이 있지만 맘에 너무 안 들게 찍혀서 그냥 이 사진만 골랐습니다. 그리고 이 사진에는 아주 작게 숨어있는 귀여운 생명체들이 있는데, 다음 섹션에 그 생명체들을 찾는 이벤트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사진은 처음처럼 사진입니다. 제가 촬영을 돌아다닌 시간이 아침 무렵이고, 전날엔 비가 왔습니다. 사진을 찍고, 병에 냄새를 맡아보니, 술냄새는 거의 날아가고 비냄새만 남아있었습니다. 그런데 옆에 작은 병뚜껑은 그 와중에, 비를 담고 마치 술잔에 술을 담은 듯 가지런히 놓여 있더군요. 이 병이 이 자리에서 얼마나 있었는지, 그리고 이 술을 마신 분이 어떤 인생을 살고 계신지. 사진을 찍으며 그런 생각이 스쳤습니다.
'모기'
고목 작업하면서 간 곳도 '살아가며 찍는 사진'의 영역에 가깝습니다. 지금은 좀 멀어졌지만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 살았던 동네에 있는 고목이고, 친구집을 갈 때 지름길 삼아 지나다니던 길입니다. 성남 보통골에 있는 아주 오래된 상수리나무고 역사 속에 임꺽정이 이 나무 아래서 자주 쉬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근데 다 모르겠고, 모기 너무 많았어요.. 사진에서도 보면 아시겠지만 안개가 끼고, 비가 오다 그치다 하는 중이었고, 끝날 때쯤엔 아예 비가 왔어요. 다행히 거의 온몸을 가렸는데, 사진은 찍어야 되니까 손은 빼고 있었는데, 손에 한 세 방정도 물려서 2주 정도 가려웠습니다.. 피도 몇 번 나고.. 산모기는 정말 무섭습니다.
'이름 따라간다'
정말 이름을 잘 지어야 하는 것 같아요. '지각'이라고 작업의 이름을 지었더니 50분은 여유 있게 나왔는데, 이상하게 교통편이 딱딱 어긋나더니, 촬영지에 거의 도착했을 때는 두 개역정도를 남기고 종점이라 내려야 하더라고요.. 다행인 건 저는 잘 도착했는데, 모델분께서도 아주 똑같은 상황으로, 심지어는 반대로 타시면서 몰입을 해서 지각을 하며 오셨습니다.. 다행히 이날은 바로 촬영에 들어가는 게 아니고 밥부터 먹기로 해서 먼저 시키고 기다렸는데 금방 오셨고, 또 일식집이었는데 가게가 너무 분위기가 좋고 구경할 것도 많아서 보다 보니 금방 오신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가게 이름은 테츠로입니다! 무드가 진짜 너무 좋고, 옥상에서는 기차 지나가는 것도 보여요.. 그거 보면서 식사하는 메뉴도 있습니다. 광고는 아닌데 추천입니다. 가보시면 후기 좀..ㅎㅎ) 일단 이 작업 이 비하인드는 여기까지.
그리고 보시면 지각 작업은 한 번에 마친 작업이 아니라 보충작업을 한 번 더 했습니다. 이번에는 집이 가까운 친한 동생이자 군대 선임에게 부탁을 해서 약속장소로 가서, 전화를 했는데, 어머 전화를 받으면서 일어나더라고요! ㅋㅋㅋㅋ 아니 이게 마냥 나쁘지가 않아요. 몰입을 원래 제가 시켜줘야 되는데 이미 몰입을 해서 다들 뛰어오셔서. 음 사실 굉장히 편했습니다. 그 상태로 잘 찍었어요 ㅋㅋㅋ. 근데 정말 '지각'작업이라서 지각을 한 에피소드가 참 좋은. 아주 신기한 비하인드입니다.
'지각예찬'
두 분의 지각을 이야기했지만 사실 제가 더 지각이 소울인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지각'이라는 작업이 꼭 필요하기도 했었고요. 정말 지각이라는 건 현재까지 저의 최고의 영감거리입니다. 어떤 때는 짝사랑의 조력자였고, 어떤 때는 제가 시를 쓰는 것에 재미를 느끼게 해 주었고, 어떤 때는 처음 글을 쓰면서 스스로 만족감을 느끼게 해주기도 하고, 대학교 면접에 가서는 '꽃이 예쁘다면 그걸 보다가 지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이랬다가 내신이 안정적이던 곳을 예비 20번대 받기도 하고, 이제와서는 사진작업까지 하고 있으니. 정말 제게 축복처럼 주어진 이야깃거리이자 영감거리입니다.
처음 제가 지각에 대해 쓰면서 만족감을 느낀 글이 '지각예찬'이라는 짧은 에세이고, 그때 당시에는 지각의 장점만 보던 녀석이 어느새 자라서, 지각의 단점도 담은 사진작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 경험에서 알 수 있듯, 저는 원래 지각이 창의성, 창조성에 유의미한 영향을 준다는 경험을 여러 번 거치며 긍정적으로 보았는데, 이게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하다 보니 약속의 영역이고 평판의 영역이고 미안해져서 더 손해 보고 그렇더라고요. 그래서 이번 작업에서는 그렇게 지각으로 손해 보는 몇 분이 그 몇 분 이상의 가치를 할 수 있다는 걸 담고자 노력했습니다.
'다시는 오지 못할 그곳을 뛰어가고 있다면'만 보아도 사실 제가 전하고자 하는 대부분의 의미가 있습니다. 지각을 하면서 뛰어서 지나가는 그곳엔 당신이 지나갔다는 사실도 희미하게 남고, 지나왔다는 기억도 거의 남지 않게 되며 만약 초행길이었다면 주변풍경을 눈에 담을 시간도, 자주 오던 길이라면 변화를 눈치챌 시간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렇게 달려서, 몇 분을 일찍 갈 수 있을까요? 아무리 잘 뛴다고 해도, 잘 쳐줘야 10분 조금 넘게 일찍 간 것뿐입니다. 겨우 그 시간에, 생각보다 많은 우리 주변의 것들을 놓치게 되는 거죠. 지각 작업에 대한 저의 개인적인 해석입니다.
작품은 이미 내놓았으니 여러분께서 다른 생각이 드셨다면 그게 정답입니다. 예술은 그래서 가치 있는 거니까요.
'달리기'
이 '지각' 작업에선 남자 모델분이 두 분 계셨는데요. 모두 정말 열심히 뛰어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숨을 고르며 쉬시던 모습도, 비 오듯 땀을 흘려주신 모습도 기억하고, 제 작업을 위해 진심을 다해주신 점 정말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너무 고생하셨어요!!!!!
'실패한 작업'
고백하자면 놀랍게도 상대성 이론 작업은 기존에 기획했던 콘셉트와 완전 반대방향으로 가버린 실패한 작업이다. '외연'과 '내연'이라는 단어를 디자인에서 사용한다. 이번에 사진책을 준비하면서 본 타이포 강의로 알게 되었는데, '외연'은 형태적인 특징을, '내연'은 의미적인 특징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사과를 보았을 때, 애플의 로고 모양이나, 동그라미를 따라 그리는 것을 외연적 묘사라고 한다. 반대로 사과를 더 맛있게 보이게 하거나, 사과를 먹으면 기분이 좋다는 것을 강조하면 '내연적', 의미적인 묘사에 가까운 것이다.
상대성이론 작업은 지극히 '외연적인 재현'에 가깝다.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다. 처음 아이디어를 냈을 때는 조금 더 상대성이론을 어떻게 인문학적으로 의미적으로 받아들여 좀 더 직관적인 표현을 하고 싶었다. '시간이 모두에게 다르게 흐른다'를 직관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을 한 장소에 모아서 다양한 시계를 들고 각자의 시계를 다르게 흐르게 설정한 뒤 찍으려 했다. 그러나 그 기획은 더 많은 사람과 시간, 고려해야 할 수많은 요소들이 추가적으로 필요했다.
그래서 방향을 선회하여 상대성이론의 외연적 이미지라도 담아보고자 한 것이다. 인터넷에서만 쳐봐도 볼 수 있는 상대성이론의 간단한 그림이다. 중력이 큰 물체는 공간과 시간을 휘어버린다는 그런 의미가 담긴 그림이다. 지구 -> 시계로만 바꾸면 상대성 이론 작업의 작업물과 아주 유사한 모습이지 않은가?
그런데, 저런 외연적인 특징을 담은 동시에, 중력의 매개체를 시계들로 삼으니 의미적으로도 새로운 지점들이 생겼났고, 더불어 또 다른 외연적 특징인 '우주'를 담기 위해 블랙을 주로 사용하였더니, 정말 상상도 못 할 정도로 만족스러운 결과물들이 나오게 되었다. 이날 솔직히 사진 찍다가 소리 질렀다. 내가 너무 잘 찍어서 놀랬기 때문이다.
'억울한 날'
상대성 이론의 외연적 표현을 하기 때문에 잘 보면 단 하나의 사진에도 빠지지 않는 소품이 있다. 바로 파스타 보울이다. 처음 스튜디오를 예약한 시간에 나는 잘 가고 있었다. 오직 저 타스타 보울만 제외하고 말이다. 거실 책상 위에 깨질까 봐 뽁뽁이를 겹겹이 붙여둔 그 모습 그대로 말이다.
여유 있게 나온 터라 그 사이 파스타 보울이 있을 법한 곳들을 찾아보기로 했다. 그래도 어딘가에서는 팔겠지.. 했다. 인터넷으로 다이소를 검색해 보니 비슷한 제품이 하나는 있어서 다이소를 먼저 가보기로 했다. 그런데 이럴 수가 처음 간 스튜디오에서 가장 가깝던 다이소는 아주 소형의 매장이었고, 파스타 보울은커녕 그냥 뭐가 많이 없었다. 마침 그곳이 시장 쪽이라, 그릇 가게를 두 곳 정도 방문하고 여쭤보았는데, 거기도 없다고 했다. 이런... 그냥 조금 늦더라도 시내에 다녀오기로 했다. 지하철역까지 뛰는데 생활용품점이 보였다. 들어가서 여쭤보았더니 역시나.. 없었다. 아니 이걸 안 파나?
그래 그래도 있겠지 하면서 시내까지 가는 지하철을 타러 뛰었다. 땀이 비 오듯 흘렀고, 숨은 가쁘게 차올랐다. 시내에 도착했다. 시내에는 롯데마트 하고도 다이소 두 곳 그리고 롯데 백화점까지 있었다. 먼저 큰 단독 다이소부터 갔는데 없었다. 무슨 손잡이 있는 거만 있다. 롯데마트 내의 다이소로 달렸다. 없다. 아니 정말 왜 없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제는 비싸더라도 살 의향이 있었다. 백화점 식기코너로 갔다. 역시 없었다. 그냥 없다. 왜 없는지는 모르겠고, 직원분들께 여쭤봤는데 해당 브랜드들에서 판매를 하고 있긴 하다는데, 여기에 없다고 하는 상황이었다.
이젠 더 볼 수 있는 곳도 남지 않았고, 무거운 짐을 한가득 들고 달린 탓에 쑤셔오는 어깨와 다 젖은 옷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하.. 그냥 날린 샘 치고 포기하고, 집에 다시 다녀오기로 마음먹었다. 멘탈이 나갈 대로 나간 상태로 스스로에게 욕을 하며 힐난하다가 버스를 타려고 했는데, 이번엔 버스가 나를 태우지 않고 한참 앞에서 잠시 정지했다가 지나갔다. 어이가 없고, 화가 나던 중에 정류장보다 조금 더 앞쪽에 빨간 광역버스 표시가 따로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정말 긴장되는 상황에 시야가 얼마나 좁아지는지 또 보았다.
그냥 마음을 편하게 먹고, 더 제대로 찍으라는 기회일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곧 버스는 왔고, 집에서 간단하게 씻고 다시 나갈 준비를 했다. 이번에도 여유는 있었는데, 오히려 뭐 하나라도 놓고 갈까 봐 그리고 하나라도 더 필요해 보여서 모든 걸 다 챙기다가 가방이 세 개로 늘어나버렸다. 그때 동생이 캐리어를 챙기라는 묘책을 내놓았는데, 나는 냉큼 아! 그거 좋다 생각하고 가장 무거운 가방하나와 삼각대 하나를 통으로 그냥 캐리어에 넣고는 집을 나섰다. 그런데 정말.. 이럴수가.
광역버스에 타려던 순간 캐리어는 안된다는 말을 들었다. 퇴근시간이기도 했고, 인터넷에 찾아보니 나만 못 탄 게 아니었다. 그냥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냥 뭔가 다 포기할까 싶다가도, 캐리어를 일단 놓아야겠다는 생각에 10분 거리에 있는 집 쪽으로 뛰면서 동생에게 전화를 하고, 캐리어를 뺀 채로 가방 세 개를 들었고, 곧바로 아버지께 혹시 도와주실 수 있는지 전화를 드렸고, 다행히도 금방 와주셨다.(감사합니다.. 덕분에,, ㅜㅜ)
그런데, 아버지는 평소에 운전을 정말 잘하시는데, 그 길이 초행이기도 하셨고, 그날따라 네비가 버퍼링이 더 심했는지 빠져야 할 때 못 빠지거나 다른 길로 빠져버려서 시간이 무한으로 증식했고, 결국 아주 조금은 늦었다. 그 사이 긴장을 하며 진이 빠졌고, 낮에 고생했기에 몸에 뭔가 힘이 없었지만 그래도 정말 다행히 무사히 도착했고, 나는 비장한 표정을 하며 스튜디오에 들어갔다.
놀랍게도 영화 같은 이 모든 과정은 각본이 없다. 오히려 1~2번 더 있는 약한 고난을 가독성을 위해 제외했다. 사실 뛰면서 아 이런 거 유튜브 찍어야 하는데..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못했으니 글로라도 써먹는 중이다.
'조형물들'
상대성 이론 작업 때 사용한 시계, 파스타 보울, 모래시계 등의 소품을 전시장으로 거의 그대로 보존하여 가지고 왔다. 약간 재밌는 게, 유리가 거의 원형에 가깝게 있다. 깨려고 뾰족한 걸로 강하게 내리치고 단단한 걸로 때려보며 노력했는데, 너무 강했다. 그래서 잘 보면 알 수 있지만 그냥 해체한 뒤에 찢은 것이다.
소품의 90%를 이 세상 모든 것이 다 있는 그곳, 알리익스프레스에서 샀는데 생각보다 너무 좋은 것들이 와버려서 내심 당황했다.
그리고 새로운 시계모양의 조형물을 배치했는데, 시계의 숫자 부분을 시계로 다 바꿔버렸다. 보는 사람마다 다른 의미를 느끼겠지만 개인적인 해석으로는 상대성 이론 내의 시계들이 여러 종류의 다 다른 사람인 것처럼 다 다른 숫자에게도 각자의 시간이 흐르고 있음이 보인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