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해 드리고 싶은 사람들~
우리 아이들 초등학교 2학년, 4학년
때였던 것 같다.
지금으로부터 13년 전쯤..
어머님 팔순 잔치로 뭘 해 드릴까?
시어머님이 여행을 좋아하셨다
그래서 신랑한테
"어머님 팔순 잔치로 제주도로
다 같이 가족여행 가는 건 어때?
어머님 비행기도 안 타 보셨지!"
"좋은 생각이네~ 누나들이랑 형
이랑 의논해 봐야겠다"
그리고는 일사천리로 우리는 비행
기표와 숙소, 렌터카를 예약했다.
형 두 분, 누나 네 분,, 매형에 형수까지
가고 싶은 조카들에
작은 아버님댁,고모님 두 분
완전 대가족 여행이였다.
큰 버스 하나,
봉고차 하나를 대여했고
가족 대표로 막내가 볼거리&놀거리
식당등을 짜 보라고 어르신들이 하셔
서 우리가 총대를 메야했다.
어르신들이 갈 만한 곳과 좋아할
만한 식당을 검색해 리스트를 뽑고
조카들이 즐거워할 만한 놀거리와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식당 리스트
도 뽑았다.
이 여행을 제일 좋아했던 건,, 아무
래도 당사자이신 어머님과 몸은
40대인데 마음은 6살 지능을 가진
아주버님 이셨다.
"재수 씨, 우리 비행기 타고 놀러 간대
나, 비행기 타고 놀러 간다"
하며 신나 하셨다.
시골 동네방네 다니며
"나, 비행기 타고 놀러 가요"
며칠을 자랑하고 다니셨단다.
당일 청주 공항에 다 같이 모여
비행기를 타는데 워낙 대가족이다
보니 비행기 전체를 마치 우리가
전세를 낸 것 같은 풍경이었다.
각 집마다 150씩 각출하여 애아빠
가 관리를 하였다.
신랑 중학교 때부터 몸이 편찮으셨
다는 우리 시어머니.
애아빠는 형누나 다 출가 이후
6살 마음을 가진 형이랑 부모님이랑
셋이 살았다고 했다.
아빠는 농사일로 늘 바쁘셨고 늘 누워
계셨던 시어머니
중학교 때부터 라면을 끓여 형이랑
밥을 먹을 때가 많았다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내가 느끼기에 7남매
형제분 중에 애아빠가 최고 효자였다.
나한테는 달갑지 않았지만...
88세 우리 어머님 하늘나라 가셨을 때
우리 어머니, 치매로 6년 고생하셨을 때
다른 가족은 다 기억 못 해도 막내
아들만큼은 기억하셨을 정도였다.
제주도 푸른 바다와 노란 유채꽃이
어울거리는 곳에서 웬만한 곳은 두루
두루 다녔던 기억이 난다.
봉고차 운전도 하고
거동 불편한 어머님을 휠체어로
모시고 다니며..
애아빠가 고생을 참 많이 했다.
아주버님은 나만 따라다니며
조잘조잘 어린아이 마냥 신나
하셨다.
"재수 씨, 나 여기 너무 좋아!
다음에도 또 오고 싶다! 비행기도
하나도 안 무서웠어"
우리 두 아이들보다 더 많이 조잘
대던 아주버님
주말 연속극 최종회에서 늘 가족사진
을 찍고 끝나듯이
우리도 여행 끝, 모두 모여 가족사진을
찍고 마무리했다.
어머님의 팔순 잔치는 그렇게
어느 봄날에 한 장의 사진처럼 추억이
되었다.
3박 4일 제주도 여행을 다녀와서
시골 갈 때마다 어머님과 아주버님
은 종종 여행 가서 좋았단 말을 몇백
번은 하셨다.
여행 기획부터 과정까지 총대를 메
고 전두지휘했던 신랑과 나
신랑은 제주여행 아이디어를 내 준
나한테 오래도록 고마워했다.
몸이 불편하셔서 휠체어로 이동을
하셔야 하니 부모 입장에서는 자식
한테 미안해서
"너희들끼리 다녀와 난 괜찮아"
할 때가 많다
우리 애아빠는 그런 면에서는 참
효자이다.
"엄마 안 가면 뭐, 우리도 못 가는
거지!"
늘 부모님을 모시고 여행을 다녔다.
홈플러스 장 볼 때도
"엄마, 시골 장만 가 봤지 이런 데는
처음이지, 요새는 다 이렇게 잘 돼
어 있어요!"
모시고 다닐 정도였다.
남편으로써는 솔직히 말하면 같이
짐을 지어야 하는 아내 입장에서 늘
힘들었지만,,
자식 키우는 엄마 입장에서는 우리
어머님은 참 행복했을 것 같다.
결혼하고 장 씨 집안 며느리가 되는
순간부터 난 애아빠 따라 효부 아닌
효부가 되어 있었다.
거의 한 달에 한 번 꼴로 시댁에 다녔고
애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해서는
여름방학 때, 겨울방학 때마다
시어머니와 아주버님을 모시고 와
2주씩 모시고 있었다.
애아빠만의 소신 같은 거였다.
난 늘 그가 하자는 데로 말없이 따라
주었다.
'저렇게 부모한테 잘하는 사람이니
나중에 우리 부모님한테도 잘할 거
같았다 그리고 우리 아이들도 아빠의
효심을 닮아 가겠지 싶었다'
봄이 올 때마다
제주도 여행지에서 그리도 좋아 하시
던 어머니와 아주버님이 생각난다.
두 분 다 이젠 고인이 되셨지만...
어머니의 마지막 소원은
늘 자신이 아주버님보다 하루라도
더 살다 가시는 거였는데... 그 소원
까지 이루고 가셨다.
보통 부모는 자식보다 더 살기를 바
라지 않지만 자식이 장애를 가진 부
모는 자식보다 하루라도 더 살기를
바란다.
장애를 가진 자식을 두고 갈 수 없기
때문이다
늘 입버릇처럼
"내가 더 오래 살아야 하는데.."
하셨던 어머님은 아주버님을 보내
시고 몇 년을 더 살다가 아주버님 곁
으로 가셨다.
봄날, 벚꽃이 흐트러지게 피면
꽃을 그리 좋아하시던 어머님이
생각나고 제주도에 여행이라도
가면 , 여기 다음에도 또 오고 싶
다고 했던 아주버님이 생각나고
나이가 자꾸 많아지니 그리워지
는 게 더 많아지는 느낌이다.
기억하고 싶은 게 더 많아지는
느낌이다.
나는 오늘, 그녀와 그를 기억해
드리고 싶다.
봄날, 행복해하던 그 모습 그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