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엄마의 엄마가 되어주고 싶었다.

존경하는 부모님~

by 문학소녀

나는 우리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 존경

스럽다.

우리 엄마는 일복을 타고 태어난 사람

처럼 평생 일복이 많은 분이셨다.

엄마는 삼촌 두 분, 막내 고모 그리고

어린 이모까지 없는 살림에 훌륭하게

잘 키워내신 분이다.


아버지는 7남매 중에 세째셨다.

할아버지가 참기름 공장을 하시다가

잘 안되어 쫄딱 망하고

큰아들, 둘째 아들만 고등학교까지 마

치고 셋째였던 중학교 1학년 아빠부

터는 학교 다니다 일찍 어린 나이에

일을 했다 한다.


사업실패로 허구한 날 패인처럼 살던

아버지 밑에서 세 아들이 돈 벌어 동

생들을 키웠다고 들었다.


아버지나이 중학교 15살부터 객지

에 나와 돈을 벌었다고.

아버지가 공부도 제일 잘했는데 형

편이 넉넉지 않으니 부모 대신 자

식들이 벌어 부모를 봉양한 것 같다.


일찍부터 객지 생활을 했던 아버지는

23살에 빵집 아르바이트생한테 반하고

만다.


엄마 역시 순탄치 않은 삶을 사셨다.

5살에 부모님이 이혼하시고 할머니

손에 자라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고모손에 자라고 또 작은 아버지댁

에서 더부살이 하며 자랐다.


엄마는 책을 좋아하는 문학소녀였

다. 밥은 안 먹어도 책 보는 것을 그

렇게 좋아했단다.


엄마 역시 여기저기 친척집에 돌려

가며 지내시니 학교를 정상적으로

마치지 못하고 이른 나이에 객지

생활하며 고등학교도 채 마치지 못

하고 사촌 언니가 취직시켜 준 일식

집 홀서빙도 보고 빵집에서도 일하

지내다 아빠를 만났다.


엄마가 나이에 비해 성숙해서 손님

들 눈에 20대 여자로 보였다고...


아빠도 처음에는 본인 또래 거나 한두

살 어리거나 그렇게 보였단다.

엄마에게첫눈에 반해 쫓아 다니

두 분은 그렇게 연애를 했다고,


엄마는,나중에 그때는 애가 뭘 사랑

을 알겠어?

이른 나이에 일찍 객지 생활하니 외로

워서 빨리 내가족이 생기면 좋겠다 싶

었다고 했다 그러면 덜 외로울 테니...


결혼하고 아빤 빙그레 회사에 취직해

다니고 18살 앳된 엄마는 신혼 생활

을 하게 되었다.

그것도 잠시, 아주 잠시,


부모가 자식 키울 능력이 안된다며

삼촌 둘을 아빠한테 보낸 것 같다.


할아버지는 술만 먹으면 할머니를

때리셨고 사업 부도 이후 거의 폐인처

럼 사시다 하늘나라 가셨다.


14살, 16살 동생들과 단칸방에서 옹기

종기 살았단다.

18살밖에 안된 새색시는 그렇게 도련

님 하나도 아닌 둘을 떠안고 키우셨다.


두 분이 25살에 독립해 나가시기 전까

지.. .공장에 나가시는 삼촌들 작업복

을 빨래터에 나가 빨고 도시락을 챙김

해 주며 키웠단다..


할아버지란 인간은 참, 나중엔 막내

딸까지 아빠한테 보내서 우리 엄만

삼촌 둘에 막내 고모까지 키우셨다.


나도 아직도 선명히 기억이 난다.

삼촌들이 독립해 나가니 바통 터치하

듯 막내 고모가 우리 집에서 살았다.


자식들 중에 아버지가 제일 순딩순

띵하니 다 몰아주기라도 하듯


큰아빠도 있고 둘째 큰아빠도 계셨지

만 늘 우리 부모님한테만 보내셨다.


부모가 무능력하면 공평하기라도 하시

든 지.. 엄마가 친정 식구가 온전하지

않으시니 좀 얕보고 그런 거라고 엄만

평생 그렇게 느꼈다고 했다.


삼 남매 키우시며 삼촌 두 명에 막내

고모까지 억척스레 키우신 엄마,


삼촌들 독립해 나가고 우리 식구끼리

좀 사나 보다 했더니 또 시누이를 키

우게 되고

거기에 덤으로 또 배다른 동생까지,


어른이 되서 친정 엄마가 그리워

찾았는데 엄마가 병들어 나이 차이

많이 나는 여동생(배다른)과 살고

있었다고


엄마를 만나 3년쯤 왕래하고 지냈을

때 부고 소식이 들려왔고 그렇게 부모

없이 혼자된 11살 된 여동생을 떠안게

된 우리 엄마


팔자에 덤으로 누굴 키내야 하는 운

명을 타고 난 양, 인생 구비 구비 본인

삶도 넉넉지 않은데

고아원 원장이 아들 거둬 키우듯이

어린 시동생에, 시누이, 배다 동생

까지 마의 삶속에 들어온 그들이였

다.


그렇게 이모는 10년 동안 우리와 함께

자매처 컸다.


이모는 늘 엄마한테 감사한 마음으로

지낸다.

그때 엄마가 이모를 데리고 오지 않았

다면 고아원에 보내졌을 라고 늘

입버릇처럼 말하며

언니가 내부모고 언니여서 고맙다고

한다.


같은 여자로서 엄마의 삶을 생각하면

난 눈물이 난다.

그리고 참 존경스럽다.


5살에 부모 이혼과 재혼으로 이쪽에도

저쪽에도 끼지 못하고 천덕꾸러기처럼

친척 손에 여기저기 눈칫밥 먹고 크다


한 남자를 만나

행복하게 좀 더 편안하게 살았으면 좋았

을텐데 거의 20년을 업둥이들 네 명

키우다시피 하신 엄마


무슨 일복이 팔자에 싣려 있었는

셋째 낳고 한 푼이라도 더 벌자고

결심한 신랑 타지에 보내고 여자 혼자

사는 집에 동생 둘에 시누이에 동생에

삼남매를 합의 7명을 키웠다.


엄만 시아버지가 무서웠다고 한다. 술

만 취하면 아내를 때리고 집안을 다

때려 부수던 시아버지가 무서워 싫단

소리 한 번을 못하고 순종하며 사셨다

고..


다행히 그렇게 사시던 친할아버진 폐

병으로 하늘나라 가시고 할머닌 큰아

들네서 평생 사셨는데.

할머닌 늘 셋째 며느리랑 살고 싶어

하셨다.


어린 내가 보기에도 큰엄마랑 둘째

큰엄만 좀 깍쟁이 기질이 있었다.

거기에 비하면 우리 엄만 착하고 어른

들한테도 참 잘한다고 느껴졌다.


그땐 다들 그렇게 어렵게 살았다고들

하지만, 난 우리 부모님이 자라온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공부가 너무 하고 싶었던 아빠는 중학

교때부터 돈을 벌어야 했고

밥은 굶어도 책은 읽고 싶었던 엄마는

친척집을 전전긍긍하며 눈칫밥을 챙겨

먹어야 했다.


머리 검은 짐승 거두는 거 아니라고

키워 준 공은 없다더니 다들 본인들이

잘 나서 큰 줄 아는 삼촌들,


그나마 고모랑 이모는 엄마한테 잘

하고 사니 50% 성공한 셈인가?


그 뒤로도 우리 엄마는 교회 다니며

성가대 식사 봉사도 하시고 이런저런

봉사 활동을 많이 하셨다.


평생을 본인보다 남뒤치다꺼리 하고

사셨으면서 또 봉사하시는 엄마를

보며 이해가 안 되기도 했다.


난 자라면서 나의 엄마의 딸이 아니라

나의 엄마의 엄마가 되어 주고 싶었다.


신랑없이 힘들게 본인 몸 녹는 줄 모르

고 삶을 살아가시는 엄마가 가여웠다.


어린 마음에도

그래서 때로는 딸의 모습으로

때로는 엄마의 모습으로


나라도 잘 살고 싶었다.

그래서 엄마가 갖고 싶은 거 사고 싶은

거 다 사 드리고 싶었다.


나도 장녀여서인지 가지고 있는 부모

의 책임감이 동생들보다 더 강하다.


점점 나이 들어가시는 부모님을 볼

때 마다 더 잘해 드려야지 싶기도 하고

뭉클뭉클해지고도 한다.


앞으로 내가 얼마나 부모님과 같이

눈을 마주보고 몇 번이나 밥을 먹고

얼마나 이분들과 함께 있을지 모르겠

지만...

적어도 그분들을 낳기만 하고 사랑을

주지 않았던 부모들처럼은 안되리라


늘 부모님께서 사랑받는다고 느끼게

해 드리고 싶다.


모진 세월 참 힘들게 살아오신 나의

부모님,


곧 다가올 어버이날을 맞아 부모님과

동생들, 이모와 함께 좋은 곳 가서

식사도 하고 하루 종일 행복한 시간을

갖은 하루였다.


부모님, 살아 계실 때 잘해 드리자

제사 상에 아무리 좋은 음식 갖다 놓

은들 뭐 하랴


딱 그날만 효도하지 말고

매일매일이 어버이 날인듯

부모님께 많이 많이 현해 드리자.



애만 낳았다고 부모가 아니다. 사랑

과 희생,책임감이 동반했을 때 진짜

부모가 되는 것 같다.


부모도 자식도 올바르게 성장하여야

한다고 생각 한다.


"연만아! 명자야

너네 잘 커 주었구나

너희가 난 참 대견하고 자랑스럽다

그동안 애많이 썼다"


"부모님,사랑하고 존경합니다"


나는 이분들께 이렇게 말해 드리고

싶다

그분들의 부모 대신

그리고 그분들이 키워주신 그들 대신

덤으로 사랑하는 딸이기에...


keyword
작가의 이전글대한민국이 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