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의 무게
옛말에 장남이 잘 살아야 집안이 잘
된다는 말이 있다.
난 우리 집 장녀이다.
4살 차이 나는 여동생이 있고
6살 차이 나는 남동생이 하나 있다.
부모님은 아마도 딸들보다 남동생이
더 잘 되기를 바라셨는 지도 모르겠다.
여자는 시집 잘 가서 자식 낳고 평범
하게만 살아 주어도 그게 효도라고
생각하는 시대에 태어나신 분들이 시
니... 아무래도 남동생이 우리 집 기둥
이라고 생각하셨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난 어릴 때부터 내가 우리 집
대들보라고 여기며 자랐다.
한두 살 차이 나는 동생들도 아니고
4살, 6살 차이 나는 동생들에게 나는
늘 듬직한 언니이자 누나였다.
그리고 타향 살이 하시는 아버지 대
신 엄마랑 동생들을 내가 지켜줘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살아왔다.
며칠 전 부모님 댁에 텔레비전이
고장 났다.
사람도 나이 드니 여기저기 삐그덕
되는데 오래된 가전제품도
오래 쓰니 하나둘씩 돈 달라고 한다.
몇 년 전에 우리 집도 세탁기. 냉장고,
텔레비전을 바꿨는데 엄마네도 하나
둘씩 망가지는 건 당연한 거였다.
한 번 고쳤는데 또 고장이 났다는 소
리를 동생들한테 건너 들었다.
유일하게 티브이 보시는 게 낙이 신
아버지신대...
나는 주말 내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
을 시청하는데 부모님 생각에 마음
이 불편했다.
동생들한테 얼마씩이라도 걷어 사
드리자고 할 수도 있었지만
요새 동생들이 힘들어하는 게 느껴
져서 그냥 내가 사 드리고 싶었다.
그나마 동생들보다 조금 더 여유가
되는 언니이고 누나이기에...
막상 사 드릴 결심을 하니,
직장생활을 따로 하지 않는 나이기에
일단은 남편과 상의를 해야 했다.
내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남편은 한동안
침묵하더니
"우리 집 티브이랑 같은 사이즈로
주문했어, 그런데 부모님 관련해서
늘 혼자 책임을 다 지려고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라고 했다. 뭔 말인가? 곰곰이 생각
하다 갑자기 옛날 기억이 나니 서운
했다.
가끔 시댁에 가면
시댁에 냉장고가 바뀌어 있다.
막내 형님이
"인영아, 고마워"
뜬금없이 내게 고맙다고 전화하는
형님들
이유인즉 애아빠가 나와 의논 없이
부모님 냉장고도 낡았다고 바꿔 드
리고 텔레비전도 바꿔 드리고
난 영문도 모른 체 고맙다는 인사만
연실 받고...
그래도 난 그걸로 바가지 한번, 싫은
내색 한 번 낸 적이 없었다.
내가 티브이 한대 부모님 사 드리기를
왜 이 사람 눈치를 봐야 하지!
싶은 게 울컥했다.
시골에서 커서인지 남편은 나와
가치관에서 종종 부딪칠 때가 있다.
딸은 출가외인이란 말을 입에 달고
사는 남편
"아들은 배로 낳고 딸은 어디서 주워
온 거냐! 다 똑같이 배로 낳았는데
부모 모시기를 왜 아들만 하고 딸은
하지 말라고 하냐 그리고 솔직히 말
해서 그게 아들이 하는 거냐? 며느리
가 하는 거지!"
거의 반년은 이걸로 싸운 것 같다.
난 부모님 모시는 것에 아들&딸의
몫이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형편이 더 되면 더 해 드리
는 거고 형편이 안 되는 자식은 조금
덜 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대신 마음의 표현은 늘 있어야 한다.
그런데 남편은 부모님은 딸보다
아들이 모시는 거라고 생각한다.
차남보다 장남이 더 잘 살아야 집
안이 더 잘 된다고 여기는 사람이
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아이들에게
그런 본인의 가치관을 많이 어필
한 사람이다.
참 아이러니 한 게..
나도 장녀라 내가 동생들보다 본이
되어야 된다고 생각하며 자랐다.
하지만 난 그게 남자와 여자의 차이
는 적어도 아니었다.
본론으로 돌아와서 아무튼 남편이
어버이날 선물 겸 해서 겸사겸사
부모님 댁 티브이를 사 드렸고,
아버지는
"티브이가 크니 극장에서 보는 것
같네! 사위덕에 내가 호강한다"
라며 좋아하신다
그런 아빠를 보니 진작 바꿔 드릴 걸
싶기도
엄마는 내게 미안하신지
"장서방, 고마워 어째? 큰돈 쓴 거
아냐?
다음에 세탁기 고장 나면 작은 딸이
사 주고 냉장고 고장 나면 아들이 사
주고 하면 되겠네~" 하신다.
이왕 사 드릴 거면 기분 좋게 뒷말
안 부치고 사 주면 너무 고마웠을
텐데
늘 잘하고도 1% 부족한 남편,
어쩌면 좋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