겁 없는 남편
나는 오산에 짐짝처럼 버려지고
택시 안에서는 비련의 여주인공이
되고 반쯤 넋을 도로 위에 두고 귀
가 했다.
집에 도착해도 화가 안 가라앉아
서 냉장고를 열었지만 흥분을 잠
재워 줄 씹을 만한 거리가 아무것
도 없었다.
두 눈이 퉁퉁 부어 반쯤 떠질락 말
라고한 눈으로 슈퍼 나가기도 귀찮
을 때쯤, 반짝 뇌리를 스치는 게
있어서 뚜껑을 열고는 잔에 따라
홀짝홀짝 마시기 시작했다.
너무 착하게만 살았던지라 그 술
이 그리 독한지도 몰랐고 얼음을
넣어 조금 희석해 먹는 건지도
몰랐다.
내가 술을 처음 먹은 게
22살 맥주 한 병이 시작이었다.
소주는 병원 알코올 솜 냄새가 나서
내 취향이 아니었고 맥주 한두 잔
먹는 정도가 그 시절엔 고작이던
나에겐... 그날의
그 술은 마시자마자 목이 타 들어
가는 게 천장이 빙글빙글 돌았고
몇 잔 더 마시자 기분이 알딸딸 몽
롱해 지는 게 천국에 온 기분이였
다.
그렇게 거실에서 천국을 헤맬 때
대학생이던 여동생이 때마침 전화
를 했다.
"언니 뭐 해? 나, ㅇㅇ 보러 놀러 가
도 돼?"
워낙 애기라면 사죽을 못쓰고 이뻐
하던 동생은 아기 때부터 조카라면
끔뻑 죽는 이모였다.
"애들 없는데... 형부가 데리고 시
댁 갔어"
"언니는 왜 안 가고?"
"맘에 안 든다고 나를 짐짝처럼
버리고 지 새끼들만 데리고 가
더라"
"언니, 목소리가 이상하다 어디
아파?"
"아프기도 하고 열받아서 혼자 술
먹었는데 이 술 처음 먹어 보는
건데 천장이 지금 빙빙 도네 놀이
기구 탄 기분이야"
동생이 걱정이 되었는지 전화 통화
끝자마자 순간 이동을 한 거 마냥
내 앞에 있었다.
"언니가 이거 이만큼이나 다 먹은
거야 미쳤어! 얼음도 없이.. 원액
으로 마신 거야?"
"그럼 술을 그냥 먹지, 설탕 타
먹냐"
남편은 그밤 전화도 한통 없었고
동생이 나를 간호해 주었다.
난 중간중간 필름이 끊겨 생각이
안 났고 동생은 밤새 내 등을 토닥
여 주었다고 했다.
하루 잤다고 아침엔 제정신으로
돌아왔고 동생은 나한테 아침부
터 잔소리를 시전 했다.
"언니, 누가 양주를 그냥 겁도 없
이 마셔 보통 얼음을 넣고 마시는
거지! 진짜 미쳤구나!"
내가 마신건
선물로 들어온 양주로
박정희 대통령님이 즐겨 마셨다는
거였다. 술을 안 좋아하는 남편이
묵혀두면 나중에 돈 된다고 박스도
풀지 않고 고이 모셔 둔...
그걸 내가 개시해 홀짝홀짝 얼음도
없이 소주 마시듯 반 병이나 마시고
는 천국 체험을 했던 것이었다.
동생과 늦은 아점을 먹고 있을 때쯤
나쁜 남자 그가 귀가했다.
혼자가 아닌 체로..
두번째 완전 멘붕, 유체이탈~
동생은 약속이 있다며 밥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나가고..
나는 애써 웃으며 시어머니와 둘째
아주버님을 맞이했다.
아이들은 할머니네서 아빠가 연도
만들어 주고 연날리기하며 놀았다
고 조잘조잘 되고 나는 아이 둘의
말이 귀에서 윙윙~ 거렸다.
급히 냉장고를 뒤져서 이것저것
점심 끼니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우린 쇼윈도 부부처럼 앙금이
풀리지 않은 채 웃어대며 며칠을
시어머니와 아주버님과 지냈다.
남편은 미운데 막무가내로 내
동의 없이 모시고 온 시어머니와
아주버님은 밉지가 않았다.
늘 막내며느리를 이뻐하시는
어머니,
그리고 태어날 때부터 장애가 있
게 태어나신 6살 지능의 아주버니
그분들은 내게도 늘 소중하고 신경
쓰이시는 분들이기에...
계시는 일주일 동안 최선을 다해
잘 해 드렸다.
"어머니, 저랑 팩 하실래요?"
"아가 너나 이뻐지게 해 .다 늙어
서 뭔 팩이라니 이쁘게 보일 사람도
없는데.."
"누구한테 이쁘게 보이려고 하나요?
좋다니까 하는 거죠!"
생긴 거와는 다르게 난 애교가 많고
살가운 며느리다.
거실에 어머니와 나란히 누워 팩도
하고
"어머니, 이거 제가 선물 받은 건데
써 보니 좋더라고요 같이 세수하고
같이 발라요"
어머니 손에 내 화장품을도톡톡
덜어 드리고
아주버님은 소통이 더 자연스럽다.
유치원교사인 난 6살, 7살, 아이들을
주로 맡았기에 그 아이들 눈높이에
맞추어 말을 해 준다.
그래서인지 아주버님도 나를 잘 따
랐다.
"재수 씨, 내가 맛난 거 사 줄까?"
아주버님께 가장 맛난 거는 믹스
커피다.
믹스 커피릎 사 오셔서는 나만 타
주신다.
누나도 여동생도 큰형수도 아무도
안 타주시는데 늘 내게만 인심이
후하시다.
일주일 동안 시어머니, 아주버님이
계시다 가시고 드디어 간이 배밖으
로 나오신 그분과 조우를 했다.
애들은 어느새 꿈나라로 직행 한
체...
서로 자존심 싸움인지 먼저 말 거
는 이가 없다.
방 안 가득 어색한 공기만 차곡차곡
쌓인다.
"엄마랑 형한테 늘 따뜻하게 대해줘서
고마워!"
"그게 다야
또 뭐 없어 더해야 될 거 같은데.."
"네가 먼저 말하면..."
"말하기 싫으면 하지 마라 누워 절
받기 싫다 나도.."
"내가 미안하다 됐냐?"
"진심이 아닌 거 같은데 뒤에 됐냐가
붙어서 그런가!"
"그래 미안하다 미안해"
난 사실,
까마귀 고기를 잘 먹고 산다.
불편한 마음을 오래 가지고 사는
사람이 아니다.
좋게 말하면 단순한 거고 나쁘게
말하면 자존심도 없는 게 되나 싶
기도.. 근데 사실,
가족끼리 자존심을 부려 뭐 할 거
며 오래 질질 끌어서 좋을 게 뭐가
있을까 싶기도 하다
"내가 더 착해서 넘어가 준다"
그리고 그날 나는
애아빠한테 무식하고 용감하게
처음으로 양주 마신 썰을 풀었다.
애아빠는 가뜩이나 큰 눈을 더
동그랗게 뜨며 속은 괜찮냐고
물어봤다.
그리고 한참 뒤에 가끔 드라마에
서 그 양주가 나올 때마다 저게 지
금까지 가지고 있었으면 돈이 얼
마냐며 아쉬워한다.
그 후로
누가 양주 선물만 주면 사양한다는
남편,,
오늘 아침 일찍 대학병원에 추가로
검사할 게 있어서 금식하고 아침에
검사받고 오니
애아빠가 아점을 차려 주었다.
"어제부터 금식하느냐고 애썼다"
"와! 오늘 자기야,
내 생일이야? 다 내가 좋아하는 건데"
두부김치, 갑오징어 숙회, 고기..
"많이 먹고 아프지만 마라"
투닥거리며 정든다고
25년을 투닥거리며 살았더니
이젠 미운 정, 고운 정이 들어서
아무래도 이 사람이랑 죽을 때까지
살지 않을까 싶다
부부싸움은 이래서 칼로 물 베기
라고 하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