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는 공짜밥이 없다
우리 엄마는 내게 늘 그랬다.
"어렸을 때부터 자랄 때까지 속 한번
섞이지 않은 아이였다고.. 그래서
늘 고마웠다고 천상 뼛속부터 속 깊은
아이였다고"
내가 생각해도 난 그랬던 것 같다.
부모님이 하지 말라는 건 안 하는
아이였다.
아버지는 중동 지역에 돈 벌러 나가
셨고 어머니는 우리 삼 남매 챙기며
열심히 사셨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는 엄마가
가사에만 집중하시다 이후에 이것
저것 하며 아빠랑 맞벌이를 하셨고
내 눈엔 4살, 6살 차이 나는 동생들이
내가 챙김 해 주어야 할 가족이라
생각했다.
그러면 엄마가 좀 덜 힘들지 않으실
까? 싶어서
해맑게 지내는 동생들에 비해 조금
일찍 어른이 된 아이였다.
성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였다.
10시 통금 시간을 잘 지키는 20대
였고 직장 생활하며 월급날 받은
돈을 한 푼도 쓰지 않고 부모님께
드렸다.
그리고는 교통비며 필요한 용돈을
타 쓰는... 그에 비해
밑에 내 동생 들은 나와는 달리 조금
은 자유롭게 살았다.
돈을 벌면 부모님께 안 드리고
본인들 돈이라고 자체 관리를 하거나
부모님이 정해 놓으신 통금 시간이
있어도 늦게 귀가하는 날이 종종 있
었다.
내가 장녀가 아니었다면 나도 어쩌면
동생들처럼 조금은 자유롭게 생활했
을 지도 모른다.
장녀라는 타이틀이 주는 무게로 난
27년을 지낸 것 같다.
결혼이란 건 어쩌면 답답했던 그 시
절에서 조금은 나답게 살 수 있지
않을까? 싶은 동아줄 같은 거였다.
그래서 나는 그 동아줄을 잡았다.
그때는 알지 못했다.
그 동아줄의 의미를... 버거운 장녀
라는 책임감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그 동아줄은 또 다른 책임감의 무게로
다가왔다.
더 많은 타이틀로..
엄마의 무게,
며느리의 무게,
아내의 무게,
하나를 집어던지고 싶었을 뿐인데
일타쌍피의 무게가 덤으로 더 생긴
것이다.
28살부터 지금까지, 나는
장녀의 무게
엄마의 무게
며느리의 무게
아내의 무게로 살고 있다.
아! 시어머님이 몇 년 전에 하늘나라
가시고 며느리의 무게에선 벗어났다.
부모님 살아생전에는 잘 모이던 시댁
식구들이 이젠 자주 안 모이기 때문이다.
세월이 더 흐르면 그땐 어쩌면
장녀의 무게도
.
.
.
사라질 것이다
.
.
더 세월이 흐르면
엄마의 무게, 아내의 무게도 벗어날
지도 모른다.
그때가 되면
버거워 다 벗어던지고 싶었던 타이틀의
무게가 다시 그리워질지도 모른다.
엄마도 나이가 자꾸 드셔서 그런지 부
쩍 마음 약한 소리를 자주 하신다.
"인영아! 내 딸 덕에 엄만 늘 행복했어
세상에서 제일 착하고 이쁜 딸로 커
주어 늘 고맙고 미안했어"
"다음 세상에서 우리가 또 만나면 그땐
딸 말고 내 베스트 프랜드로 태어나렴!
그럼 그땐 엄마가 더 잘해 줄게"
난 상상만 해도 설레이고 행복하다
장녀라서 내가 나 스스로
동생들한테 본이 되고자 했고
부모님께 뭔가 도움드리고 싶은 욕심에
나 스스로가 끊임없이 나를 채찍질하며
달려오느라 힘들었다.
사실 누가 강요한 삶이 아닌
나 스스로의 틀 안에 갇혀 산 건
전적으로 내 의지였던 것 같다.
나와는 다른 좀 더 유연한 삶을 사는
동생들을 부러워하며...
장녀인 나는
그렇게 살아야 되는 줄만 알았다.
요즘은 하나 아니면 둘이 고작이니
장녀, 차녀, 막내 개념이 시들해진
것 같다.
상황에 메여있지 않고 좀 더 자기를
사랑하며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요즘
아이들이 참 멋지다.
다시 태어난다면..
무언가에서 벗어날 목적으로
다른 것을 택하진 않을 것이다.
감투에 대한 책임감보다
나에게 더 집중하며 살고 싶다.
나를 더 사랑해 주지 못했던 지난날의
나를 반성한다.
그래서 요즘,
나 스스로를 많이 사랑해 주려고
한다.
"엄마, 이생엔 엄마딸로 살아 보았으니
담생엔 엄마 말처럼 우리 친구로 사는
것도 재미있을 거 같아!"
예전에 나라면
혹여라도 엄마가 서운해하시면 어쩌지
싶어서
"그래도 난 엄마랑 딸로 다시 태어나고
싶은데.."
했을 것이다.
그때는 그랬고 지금은 아니다.
그 시대의 나와 2025년을 사는 나는
다르기에..
나를 먼저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
어야 다른 사람도 진심으로 사랑 할
힘이 생긴단 사실을..... 인생을 통해
배운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