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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영 Nov 03. 2024

아버지와의 추억

사람들은  다 한 가지씩 결핍을 가지고 산다

나는 아버지와의 추억이 별로 없다

아버지가 안 계시거나 부모님이 이혼 하셨

거나 그런 경우는 아니다

그럼에도 나에겐 아버지와의 추억이 없고

난 아직도 아버지가 낯설다

조금씩 아버지랑 친해지기 위해 노력한다


우리 아버지는 영양사&조리사시다

내가 어릴 때는 빙그레 회사에 다니셨다

그래서 아버지와의 기억이랄까? 추억이

?  좋은 기억이라면

퇴근길에 아버지가 늘 사 다 주시던 부라

보콘은 내게 늘 최애 간식이었다

6시에 퇴근하시던 아버지가

"영이야, 아이스크림~"

하고 건네주시는 세상에서 제일 맛있었

던 아이스크림,,,

나이 50이 넘어도 여전히 내겐 부라보콘

최고의 아이스크림이다

내가 6살 때 4살 차이 나는 동생이

있었음에도 엄마가 남동생을  낳으셨다

딸딸 만 낳고 아들이 없어서  시부모님

를 보셨다는 엄마

지금이야 딸, 아들  상관없이 잘 낳아

키우자 지만 엄마 시절엔 딸만 낳으면

 그리 눈치가 보였던 시절이였나 보다

아이가 하나 더 느니 아버지가 가장의

무게를 더 느끼셨고 그 당시에 현대건설

중동지역에서 일하면 더 많이 벌 수 있다

는 공고를 보고 신청하셨다신다

 그래서 난 6살 이후 아버지와의 억이

없다

처음에 아버진 한몇 년 생각하셨다던데

처음이 이리 길어질 지 몰랐다고..

3~4년전에 해외 일을 다 정리 하셔서

귀국하신 아버지

중간중간 휴가처럼 일 년에 한두 번씩...

크리스마스 날 굴뚝을 타고 몰래 와서

상자를 두고 가는 산타클로스처럼 아빤

그런 분이였다

잠자고 일어나면  아빠가 계셨고 선물도

가득 사 오셨다 그리고 또 며칠 있으면 또

비행기를 타고 가셨다

엄마와 동생들이 크게 아플 때도 엄마가

힘드실 때도 아버진 우리 곁에 안 계셨다

학교입학 졸업, 생일 때도  안 계셨다

주변에서 엄마한테 젊은 여자가 남편

없이 사는 게 안쓰럽다고 많이 챙겨 주

시곤 했다


난 1남 2녀의 장녀,,,

4살, 6살 차이 나는 동생들에 비해

애어른 같은 아이였

아빠가 안 계시니 어린 마음에 마랑

동생들을 내가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엄마가 옷 장사를 하셨는데 종종 새벽에

남대문&동대문 옷 떼러 가면 따라 나섰

가게 청소나 정리도 도와 드리고 동생들 

숙제도 봐주고

지금도 우리 엄만 동생들보다 날 더 많이

의지 하신다

나도 아빠와의 기억이 몇 개 없는데,,

너무 어린 나이에 아빠랑 헤어진 동생들


아빠와 함께 한 시간 4년 차

아빠도 우리를  어려워하시고 자식인

우리도 여전히 아빠가 낯설다

물론 처자식 위해 평생을 타향 살이하며

바깥에서 살아오신 아빠도 고생이 많으셨

 것임을 머리로는 안다

모에 대한 감사함은 있지만 딱 거기까지

가족도 살을 비비고 살아왔어야 하는데

그런 게 단절된 우리의 관계는 여전히 서

먹함이 베어 있다

아빠&엄마도 모두 내향적인 성격이셔서

리도 셋 다 내향적인 성격이다 보니 더

그런 것 같다

내가 장녀이다 보니 왠지 이런 가족 관계

도 내 책임인  같고 나라도 조금 달라지면

생들도 달라지지 않을까 싶어서 한마디

도 아빠와 더 하려고 하고 우리 가족의 단

위해 애쓰는 중이다


둘째는 아버지랑 셋 중에 제일 많이 서먹

한다 막내 동생은 그래도 남자라고 아버

더 이해해 드리려고 하는데 여동생은

쌔하다


"선아,, 부모님이 어제랑 오늘이 또 다른 거

같아 언니 보기에는

아빤 엄마랑 다섯 살 나이 차가 나서 그런지

더 많이 요새  나이 들어 가시는 게 느껴지

더라 아빠도 우리랑  헤어져 산 시간이 길다

보니 자식들 눈치를 보더라고 우리가 자식

이니 좀 더 다가서자

나중에 후회하지 않게 언니말,무슨 뜻인지

더 안말해도 알지!"


"난 아빠가 여전히 어렵고 불편해 노력은

 볼게 언니가 애쓰는 거 알아"


해외에서 몸이 불편해서 일을 접고 나오신

빠,, 한국에 나와 가족과 살려고 노력을

안 해 보신 건 아니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

아빠와 한 1년  살았었다

그런데 아빠가 고국에서  일하시는 걸 어려

워하셨다


오랜 기간 해외에서 살다보니 

그곳 생활이 더 편하셨던 것 같다 그래서

다시 나가셨고 우린 그렇게 긴 헤어짐을

맞이 했다 그러니 늘 우리에겐  아빤 손님

같았다

중동지방 여러 곳에서 함박짐 사업을 하신

아빠덕에 우리가 살아 왔다

20대 어린 나이에 시집와 남편 없이 이것

것 하시며 우릴 키워오신 엄마

아무래도 엄마랑 함께 살다 보니 아빠의

다 엄마의 삶이 늘 안쓰러웠던 우리다

아빤 어쩌면 그런 부분은 서운해하실지 모

모르겠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작년에 아빠 건강이 좀 더 안 좋아지시

느껴졌고 그럼에도 자식들한테 용돈

받을 나이 아니라며 아파트 경비일 하시는

아빠를 보면 너무 속상하다


"아빠 나이도 계신데 이제 자식들 용돈

 받고  좀 편히 쉬세요"

해도 말을 안 들으신다

"아빠, 아직 일두기 싫다 손주들한테 조

 용돈도  능력은 된다"

하신다

자식들 커 가는 모습은 함께 해 주지 못 

했지만 손주들 커가는 모습보며 용돈도

주고 싶어 하시는 아빠다 

난생처음으로 아빠 손을 잡아 드렸다


"아빠, 그동안 애쓰셨어요 아빠가 열심히

아 오신 덕분에 저희가 잘 컸네요

감사합니다"

엄마한테는 늘 마음 표현 하며 살아왔는데

빠한테는 못 하고 살아 온 것 같다

내 나이 50이 되어 처음 잡아드린 아빠의

손...


아버지가

"고맙다 딸!"

하며 눈물을 글썽이셨다

동생들도 조금씩 아빠한테 다가서려 한다

가족은 그런 것 같다

내 나이, 50이 넘었다

6살 아빠의 부라보콘을 기다리던 아이는

없지만 여전히 아빠를 사랑하는, 우리 가족

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나는

부모님도 동생들도 챙김 하며 소통하며 살아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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