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교, 불교, 문성공주, 그리고 12진마사

송찬깐푸와 문성공주, 사실상 문성공주 이야기

by 이철

1400년전 7세기 티벳은 토번이라고 불리웠다. 당시 토번 국왕에 해당되는 짠푸는 송찬깐푸(松贊乾布)는 매우 흉폭한 성격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두 사람의 왕비를 맞이했는데 하나는 당나라의 문성공주와 네팔국의 츠존공주(尺尊公主)였다. 당시 당나라나 네팔의 문화 수준은 매우 높았고 토번은 그야말로 황무지가 가득한 곳이었다. 두 나라 모두 국가 외교 안보 차원에서 공주를 시집 보냈지만 그렇게 성의있는 결혼은 아니었었던 것 같다. 당나라의 문성 공주만 해도 사실은 진짜 공주가 아니라 적당한 궁녀를 하나 공주라는 명분을 만들어 씌워 시집을 보냈다는 말이 있을 정도이니 말이다. 또 송찬깐푸는 혼사를 청하는 편지에 만일 혼사가 이루어 지지 않으면 공격하겠다는 암시를 했다는 말도 있다. 당시 당나라의 황제는 명성이 자자한 바로 당태종이었다. 무위로 말하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당태종이었지만 쓸데없는 싸움을 여자 아이 하나로 피할 수 있다면 피할 줄 아는 지도자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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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찬깐푸가 당나라와 네팔의 공주와 혼인한 것은 그가 점령한 티벳 지역에 있어서의 정치 권력을 공고히 하려는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문성공주는 송찬깐푸에게 불교를 권했는데 이는 송찬깐푸가 티벳 지역에 널리 행해지던 본교를 대신하는 새로운 정치 사상으로 송찬깐푸의 정치적 이해관계가 일치했다. 송판깐푸는 즉시 불교의 사찰을 세우고 전국적으로 불교를 지원했다. 덕분에 문성공주는 관음보살의 화신이라는 말을 듣기도 한 모양이다.


이 당시 문성공주가 지원했던 불교는 당나라식 불교, 즉 현종이었다. 현종은 불교의 가르침을 주로 경전과 분석적 접근을 통한 이성적 접근 방식으로 수련하는 것이었고 학문과 과학적 마인드가 중요했다. 즉, 엘리뜨 집단적인 불교였다. 반면 현재의 티벳 불교는 밀종으로, 이런 논리적 접근 방법보다는 진언, 법술 등을 통한 비논리적 접근 방법이 유명하다. 송찬깐푸의 증손자인 츠송더잔(赤松德贊)은 불교에 매우 심취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당시 티벳은 보편적으로 본교를 믿고 있었고 일반 백성들은 물론 신하들도 대부분 본교를 믿고 있었다.

01-2.jpg 츠송더잔(赤松德贊)

츠송더잔은 천축의 고승 몇 사람을 초청하여 이들로 하여금 본교의 승력들을 제압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때 티벳으로 온 고승 중 한 사람이 그 유명한 롄화셩(蓮花生, पद्मसम्भव) 대사이다. 그는 다수의 본교 승려들을 패퇴시키고 불법의 위력을 발휘했다고 한다. 그는 여러 가지 신통력을 가지고 있었고 사(事), 행(行), 유가(瑜伽), 무상유가(無上瑜伽)의 4대 밀종 금강 법문에 도통했다고 한다. 이 시대 이 지역의 과거 이야기를 보면 이런 종교, 철학, 사상의 논쟁을 목숨을 거는 행위이다. 토론에서 지면 수치심을 이기지 못해, 또는 명예를 지키기 위해 토론에서 진 사람이 목숨을 끓는 사례가 많았다고 하니 말이다. 이 롄화셩 대사의 활약으로 티멧의 본교는 점차 불교에 흡수되는데 이 과정에서 지금의 밀교 형태의 불교로 변천해 갔다고 한다.


티벳 불교는 9세기에 들어와 랑다마웨이불(朗達瑪滅佛)의 참극이라는 사건을 겪게 된다. 이때 티벳의 수 많은 불교 경전이 불태워졌다고 한다. 이 사건을 겪고 나서 티멧은 다시 한번 인도로부터 고승을 청하게 된다. 그리고 인도에서 가져온 경전을 다시 한번 번역을 하게 된다. 이때 인도에서 온 승려 중 아디샤(阿底峽, अतिश)라는 고승이 있었다. 그는 티벳에서 밀종과 현종이 서로 반목하는 모습을 보고 이 두 종파가 사실 하나라는 점을 설파하였다. 그는 급하게 수련을 서두르면 주화입마 될 수 있다고 가르치며 먼저 그의 보티다오등론(菩提道燈論)을 익혀 현종을 수련하고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른 후 밀종의 수련을 할 것을 제시하였다. 그의 가르침에 의해 티벳 불교는 정상을 찾을 수 있었다. 이를 다오츠디(道次销, लामविम) 수련법이라 한다. 아디샤의 제자는 이 수련법에 기초하여 다당파(噶當派)를 창시하였다. 또 이어서 가줴파(噶舉派), 사쟈파(薩迦派) 등이 출현하게 된다. 이런 티벳 불교 각 파벌의 출현은 조금 씩 서로 다른 수련법을 채택하게 되었으며 그만큼 수련법의 스펙트럼이 넓어져갔다고 할 수 있다. 환희불이 얽혀 있는 그림으로 유명한 쌍수(雙修)같은 수련법이 나올 수 있는 배경이라고 하겠다.

1024px-Atisha.jpg 아디샤(阿底峽, अतिश)

토번이 토착 종교인 본교를 누르기 위해 불교를 도입한 역사적 사실은 당나라의 문성공주와 나찰녀의 기운을 누르기 위한 12 진마사의 전설로 지금까지 남아있다. 아니, 어쩌면 전설이 아닐 수도 있다. 일단 그편이 더 재미있으니 전설이 아니라는 가정으로 이야기를 전개해 보자.


12진마사의 이야기는 1991년 티멧 자치구 문물국에서 소장 자료를 정리하다 발견한 두 장의 탕카에서 시작되었다. 두 장 모두 높이는 1.5미터, 넓이는 0.7미터였다. 내용은 동일했는데 바로 여자 귀신이 누워있는 모습의 지도였다.그림 속의 여자 귀신은 바로 나찰녀였는데 그 모습은 누군가에 의해 강제로 억제되어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문물국 직원들은 이 지도를 살펴 본 결과 바로 티벳 상당 지역에 걸친 지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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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에는 사찰이 여러 개 그려져 있었는데 지금까지 잘 유지되고 있는 사찰들이었다. 다만 그 범위는 지금의 중국 티벳 자치구 지역 뿐만 아니라 인도나 부탄의 경내에 있는 사찰까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그림은 최소 6백년에서 어쩌면 1,100년 정도 된 것으로 평가되었는데 어쩌면 문성공주가 죽고 나서 얼마되지 않아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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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360doc.com/content/24/0602/07/84402461_1125079126.shtml


아무튼 토번이 가장 강성했던 시기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림이 발견된 로부린카(羅布林卡)는 티벳 최고위 귀족들의 별장으로서 대대로 전승된 귀중한 물건임에 틀림없었다. 이 그림은 지금은 서장마녀도(西藏魔女圖), 또는 서장진마도(西藏鎮魔圖)로 불리우고 있다. 그리고 이 그림 관련하여 문성공주와 12진마사라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당시 티벳 지역을 정복한 토번의 왕 18세의 송잔깐부(松讚干布)는 당시 36세의 당 태종 이세민이 돌궐과 토욕혼(吐谷渾)에 모두 공주를 보내 부마국으로 삼았다는 말을 듣고 그 역시 당 나라에 공주를 요청하였다. 네팔은 츠지 공주를 보내 송잔깐부와 혼인을 맺었고 송잔깐부는 네팔의 문화를 받아들여 토번 고유의 문화를 발전시키려 하였다. 당시 티벳은 본교가 광범위한 영향력이 있었고 이는 언제든 티벳 민족 정서를 함양할 동기가 될 수 있었기에 정복 왕조인 토번으로서는 군사력과 함께 소프트파워가 필요했던 것이다. 송잔깐부가 네팔의 문자를 기반으로 토본의 문자를 창제한 것도 이의 일환이었다.


하지만 네팔과는 달리 당시 국력이 최고조였던 당 나라는 송잔깐부의 혼인 요청을 거부하였다. 그러자 송잔깐부는 토욕혼에 군대를 보내 토욕혼으로 가는 공주를 탈취하려 하였다. 당시 선비족의 당나라, 선비족에서 갈라 나온 모용씨의 일원인 토욕혼, 토번 모두 초원 지대의 유목 민족으로 이런 약탈혼은 결코 이상한 것이 아니었다.

14문성공주상.jpg 문성공주


그 결과 당나라도 군사를 보내 토욕혼의 역내에서 송잔깐부의 토번국과 일전을 겨루게 되었다. 그리고 토번이 대승을 하였다고 한다. 당 나라의 기록을 보면 당 나라가 대승을 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 전쟁 이후 토번은 당 나라에 조공을 하기 시작하였고 당 나라도 공주를 보내 토번과 혼인을 하였다. 이 공주가 그 유명한 문성공주이다. 문성공주는 우리나라로 치면 서산대사나 사명당같이 법력이 강한 인물이라는 전설이 있어 불법 뿐 만 아니라 천문 지리, 음양술, 풍수지리에 이르기까지 폭 넓은 학문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문성공주는 출가하면서 석가모니 12세 때 모습을 본 딴 등신불을 가지고 갔다고 한다. 문성공주는 토번에 불교를 국교로 심는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인물이지만 문성공주의 음양술법과 풍수지리 또한 송잔깐부(松讚干布)의 토번을 강건하게 하는데 큰 힘이 되었다고 한다. 문성공주는 지금의 칭하이에 있는 빠옌컬라(巴彥克拉)사에 올라 토번, 그러니까 지금의 티벳의 지세를 살폈는데 티벳 전역의 지세가 마치 나찰녀가 누워있는 형상이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공주를 맞이한 송잔깐부(松讚干布)는 문성공주를 라사에 있는 포달랍궁으로 데리고 갔는데 이 포달랍궁의 위치는 바로 나찰녀의 심장에 해당되었다. 전설은 이 나찰녀의 모습이 바로 티벳을 점령한 송잔깐부의 토번을 물리치기 위해 포설한 대규모의 풍수진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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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찰녀가 자신을 몰아낼 것이 틀림없는 문성공주를 환영할 리는 만무했다. 아니나다를까 문성공주의 마차가 라사에 진입하여 늪지대를 지나려 할 때 마차는 늪에 빠져 꼼짝하지 않았다. 문성공주는 즉시 제단을 세우고 부처를 모시는 의식을 거행했다. 그리고는 늪에 네 개의 나무 말뚝을 박았다. 그리고는 하얀 천으로 이 네 개의 나무 말뚝을 둘러씼다. 그리고 석가모니 불상을 이 가운데 모시자 잠시후 불음이 나오기 시작했다. 문성공주는 즉각 이 하얀 천으로 둘러쌓인 부분에 절을 짓도록 하였다. 바로 오늘날의 샤오자오스(小昭寺), 라노체 사원이다. 문성 공주는 그리고 나서 포달랍궁에 들어가 송잔깐부 왕과 네팔 공주에 합류하였다.

스크린샷 2025-08-20 082425.png 샤오자오스(小昭寺), 라노체 사원


이 샤오자오 절은 포달랍궁의 맞은 편, 관광객들이 바글거리는 시장통에 있다. 필자도 수 년 전에 이곳을 들른 적이 있는데 유감스럽게도 당시에는 이 전설을 알지 못하여 그저 아, 조그만 밀종의 절이 있구나 정도로 지나쳐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이곳이야 말로 바로 나찰녀의 심장을 누르고 있는 불법과 풍수지리의 밀법을 행하고 있는 곳으로 앞으로 소개할 12개 진마사 중 가장 중요한 절인 것이다. 포달랍궁은 원래 송잔깐부 왕이 네팔의 츠존(赤尊) 공주가 불편함 없이 지내라고 건축한 것이라고 하는데 포달랍궁이 완공되는 시점에 문성 공주가 도착하여 마치 문성 공주를 맞이하기 위하여 건립한 것처럼 되어 버리고 말았다고 한다.

스크린샷 2025-08-21 064736.png 포달랍궁의 모습

송잔깐부의 토번 국 사람들은 그들의 전설에 따르면 미후(彌猴)와 나찰녀(羅剎女)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미후가 어떤 존재인지 분명히 알 수는 없으나 대체로 히말라야의 설인과 비슷한 존재, 즉 원숭이 종류로 생각된다. 후대의 전설에 의하면 관음보살이 미후로 현신하여 야크샤라고 하는 마신, 마녀와 결혼하여 여섯 명의 자식을 낳았다고 한다. 말하자면 이 야크샤 또는 마녀가 나찰녀인 셈이다. 이 전설에서는 토번국의 조상에 나찰녀가 섞이고 원숭이가 조상이 되는 등 뒤죽박죽인데 원래 토번의 설화이지만 후대에 와서 일반적인 티벳 사람들의 조상 설화로 두 곳의 설화가 뒤섞인 것 같다.


토번은 이렇게 미후의 후손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문화 수준이 낮은 부족이었던 모양이다. 반면 티벳 지역은 이미 상당한 종교, 철학, 사회 체계를 뻔교를 통하여 갖추고 있었으므로 이들을 통치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토번은 군사력을 통해 티벳을 점령했지만 문화적 우위를 갖추지 못한 이상 통치 체계를 갖추기 어려웠다. 송잔깐부는 불교가 융성하고 문화 수준이 높은 당 나라와 네팔과 혼인함으로써 불교 체계를 통해 치국의 질서를 정립하려 한 것이다.


송잔깐부의 의도를 알게된 문성 공주는 팔십종오행산관찰법(八十種五行算觀察法)이라는 비급을 송잔깐부에게 주었다고 한다. 문성공주는 본교와 불교는 원래 하나라며 본교는 나찰녀를 통해 준동하는 바 불법이 강하지만 장기간에 걸쳐 억제하고 천천히 사라지게 하여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리고는 중원의 음양풍수의 술에 따라 진법을 나찰녀의 사지와 관절에 펼쳐야 한다고 했다. 마치 나찰녀 전신의 각 관절와급소에 큰 대못을 밖아 넣는 것 처럼 말이다. 그렇게 하면 영원히 나찰녀를 진압할 수 있다고 했다.


마침 포달랍궁에 부처를 모시니 나찰녀가 쉽사리 움직일 수 없고 연이어 12개의 진마사(鎮魔寺)를 건립할 것을 촉구하였다. 이 말을 듣을 츠존공주 또한 이미 어느 정도 상황을 눈치채고 있었는지라 자신이 모셔온 석가모니 8세불 역시 진마사를 세우고 모실 것을 청하였다. 그런데 츠존 공주가 세우려는 절은 지으면 무너지고 지으면 무너지고를 거듭했다고 한다. 알고보니 절을 세우려고 매립한 땅이 계속 무너지며 절을 세우기 어렵게 한 것이었다. 이 말을 들은 문성 공주는 티벳에서는 성스러운 짐승으로 여겨지는 백양을 모아 땅을 다지게 하였다. 마지막으로 송잔깐부의 손가락에 끼워져 있던 조상으로부터 내려오는 반지를 뽑아 호수에 던졌다. 그러자 땅이 굳건해지면서 절을 완공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절이 지금의 따자오스(대조사, 大昭寺)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츠존공주가 모셔온 석가모니 8세불과 다른 마귀를 진압하는 법기들을 이곳에 모셨다.

CN_210141442.jpg 따자오스(대조사, 大昭寺)

이렇게 대조사, 소조사 두 절을 세웠으나 나철녀의 기운은 계속 반항하였고 소조사에 모셨던 석가모니 12세불 마저 대조사에 옮겨 안치한 후에야 나철녀의 기운을 누를 수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나찰녀의 기운을 억제한 후에야 12개의 진마사를 세우는 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먼저 나찰녀의 두 어깨와 두 고관절 부분에 진변사(鎮邊寺) 또는 진지사(鎮肢寺) 4개의 절을 세웠다. 두 어깨의 절이 바로 가저스(噶泽寺, 지금의 무주공카 현, 墨竹工卡县에 있다.)와 창주스(昌珠寺, 지금의 나이동 현, 乃东县에 있다)이며 두 고관절에 해당되는 절이 바로 지금의 나무린 현(南木林縣)의 장창스(藏昌寺)와 라즈현(拉孜县)의 중빠쟝스(仲巴江寺)이다.

7f39f8317fbdb19.jpg 창주스(昌珠寺)


두 팔굽에 해당되는 절은 지금의 린치부지우(林芝布久) 구의 부취스(布曲寺)와 로자(洛扎) 현의 콩팅스(空廳寺)이다. 두 무릅은 지금의 지룽(吉隆) 현의 창준스(強准寺)와 중바(仲巴) 현의 쟝자동저스(江扎东哲寺)이다. 마지막으로 손발에 해당되는 4 곳에 전지스(鎮翼寺)를 세웠다고 한다. 바로 지금의 인도 지역의 차이르시나오줘마스(蔡日喜铙卓玛寺), 부탄에 있는 펑탕지취스(朋塘吉曲寺), 티벳 북부 초원 어딘가의 창빠농런스(仓巴弄伦寺), 쓰촨의 덩커(鄧柯) 현의 롱탕줘마스(隆塘卓玛寺)이다. 이렇게 12개의 진마사가 다 쉐워지자 나철녀의 준동은 없었다고 한다.


문성 공주의 포진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고 계속해서 여러 마귀를 진압하는 절을 지어 나가 모두 108개의 사찰을 완성했다고 한다. 불탑이나 석상 등은 무수히 세웠다고도 전해진다. 많이 발견되는 대자재천(大自在天)은 바로 브라만교의 시바 신이라고 하는데 불교와 섞여서 부처를 지키는 호법의 하나로 일컬어진다. 그외 그리핀의 형상이나 고동의 형상들도 풍수용 건축에 많이 발견된다. 이런 노력은 문성공주가 50세에 이를 때까지 지속되어 완성이 되었다. 송잔깐부나 츠존공주는 30세 정도에 사망하였으니 문성공주는 이 두 사람이 사망한 후 20여년간, 합산하여 약 30여년간 풍수 진법을 완성하는데 노력한 셈이다. 문성공주의 노력으로 토번은 불교 문화를 일으켜 원래의 뻔교를 누르고 당연히 나찰녀를 압제하는데 성공하였다. 지금 우리가 아는 티벳의 라마교와 라마승들은 모두 문성공주 노력의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큰 안목에서 보면 송잔깐부와 문성 공주의 일생 노력은 토번의 요청에 따른 불교 소프트 파워와 본교 소프트파워 간의 전쟁이라고 할 수 있다. 군사력은 일시적인 강제된 평화를 가져올 뿐이지만 소프트파워는 장기간에 걸친 존경과 평화를 가져다 준다. 또 다른 외부의 무력이 정복해 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결국 오늘날의 티벳은 원래의 샹송 문화가 완전히 축출되고 밀종 불교로 완전히 대치되었고, 밀종 불교의 나라 또한 이제 중국 공산당에 의해 완전히 대체되어 버렸다. 샹송에서 시작된 뻔교 문화는 인도의 불교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 것으로 여겨지고 또한 바라문 교에도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문화는 서로 섞이고 발전하며 새로운 국면으로 이끈다. 얼마나 장대한 우리 인간의 서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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