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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철 Oct 20. 2019

시진핑의 후계자

싱가포르 부총리와의 회담에서 노출이 되었다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의 후계자가 정해졌다는 관측이 나왔다. 이 관측을 내놓은 사람은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천안문 사태 주도자 중의 한 사람인 천포쿵(陈破空)이다. 천포쿵은 1963 년 12 월 20일 생으로 중국 작가이자 정치 평론가이다. 그는 1989 년 중국 천안문 민주주의 운동 지도부에서 핵심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중국 정부에 의해 수년간 투옥되었으며, 이후 미국으로 추방되었다


반중 인사 천포쿵(陈破空)


그는 미국에서 여러 반중 매체 등을 통한 활동을 하고 있었으며 유튜브를 통해 거의 매일 중국의 정치 상황을 전하고 있다. 특히 중국 공산당 내부의 소식을 많이 전하고 있는데 근거를 밝히기 어려운 상황 상 주류 매체에서는 그의 발언을 크게 전하고 있지는 않다. 미국의 반중 단체는 크게 천안문 사태 등을 시작으로 한 민주 인사들과 그 후 파룬궁 탄압으로 발생한 파룬궁 계보의 그룹이 두 주축인데 천포쿵은 바로 천안문 사태로 시작된 민주화 그룹의 일원이라 할 수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GWMIhcNlc1g&t=323s

천포쿵은 최근 2019년 10월 18일 자신의 유튜브를 통하여 시진핑 주석의 후계자가 정해졌다고 주장했다. 그는 사중전회를 맞이하여 시진핑 주석의 후계 구도가 수면 위로 떠올랐으며 상당 정도 구체화되었다고 주장한다. 그가 들고 있는 근거는 이번 싱가포르 Heng Swee Keat(중문명, 왕뢰이지에/王瑞杰, 1961년 4월 15일생) 부총리의 방중 행사이다. 왕 부총리는 10월 14일부터 17일까지 중국을 방문하였고 한정 부총리가 응대하였다.

Heng Swee Keat 싱가포르 부총리


Heng 부총리의 이번 방중은 중-싱 위원회 5차 회의 참석과 10월 16일에 발효하는 중국-싱가포르 간 자유 무역구의 승급 행사 참석이 주목적이었다. 특이한 것은 이러한 활동이 관례대로 베이징에서 열리지 않고 총칭 직할시에서 거행된 점이다. 그리고 상대역인 한정(韩正)이 총칭에 날아가 대응한 것은 물론이다.

천민얼(陈敏儿) 정치국 위원, 총칭 시 당서기

그런데 총칭에서 열린 이 행사에서 한정보다도 더 주목을 받은 인물이 총칭 시의 당서기인 천민얼(陈敏儿)이다. 그는 이번 행사에서 싱가포르와 베이징 양 쪽 손님들을 접대하는 만찬을 주관했고 행사 형식이나 만찬에서 돋보이는 모습을 보였다. 천포쿵에 따르면 이 만찬에서 오간 대화에서 의미심장한 메시지가 있었다는 것이다.


싱가포르 Heng Swee Keat는 이번에 싱가포르의 제4대 지도부들을 데리고 왔다며 중국의 차 세대 지도자들과 만나고 서로의 유대를 강화하고 싶다고 이야기를 꺼냈다. 참고로  Heng Swee Keat 부총리는 싱가포르 초대 총리 리광요의 비서를 지낸 바 있고 교육부 장관, 재무부 장관 등 요직을 거쳐 사실 상 다음 총리로 내정된 사랍이다. 다시 말해 싱가포르의 다음 국가 지도자인 셈이다. 그리고 Heng Swee Keat 부총리가 천민얼에게 이러한 인사말을 건넸다는 것은 천민얼이 중국의 다음 지도자라고 암시한 것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1M7sog0B4RE

여기게 대해 천민얼은 부정하지 않았다. 천민얼은 이번 만남을 통하여 중국과 싱가포르의 고위 지도자들이 유대를 강화하고 양국 간에 협력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화답했다. 즉 천민얼은 자신이 다음 세대 지도자임을 부정하지 않은 것이다.


천포쿵은 싱가포르가 중국 공산당 지도부에게 여러 면으로 중요한 참고 모델이라고 말한다. 싱가포르는 기본적으로 화교들이 많은 국가인 데다가 실질적인 일당 독재 상태이면서도 글로벌 선진국으로 진입하는 성과를 이루었다. 바로 중국이 지향하는 모습과 많이 닮아있다는 것이다. 

왕후닝과 한정

천포쿵은 한정이 이번 상대역이 된 것은 외교 상 의전에 맞추어 부총리 급이 응대해야 한다는 측면 외에도 내부 정치 공학이 작용한 것으로 본다. 중국 최고 지도부인 정치국 상무 위원회 7인 중 한정과 왕후닝은 상해방 출신이지만 정치적 야심이 적고 실무적인 것 외에 기타 각 파벌과의 관계가 원만하다는 개인 특성이 있다. 왕후닝의 경우 그렇기 때문에 3대에 걸친 국가 주석을 보필할 수 있었다고 하는 것이다. 쉽게 말해 한정과 왕후닝은 권력을 잡은 사람에게는 반발하지 않고 순응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두 사람도 성격 차이가 있는데 왕후닝은 상대적으로 권력에 대한 생각이 많은 사마의, 왕망과 같은 사람이라면 한정은 상대적으로 권력에 대한 욕망이 적은 담백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한정의 경우 반대파들의 반발이 적다고 하며 권력자, 예컨대 시진핑 주석이 의심하지 않아도 되는 인물이라는 평가이다. 그래서 한정이 이번 행사를 담당하게 된 것은 먼저 시진핑 그룹을 적대시하지 않는 지도자이며 동시에 시진핑 그룹이 아닌 타 그룹을 대표한다는 성격을 가지게 된다. 


그럼 천민얼은 어떤 사람인가? 천민얼은 1960년 9월 29일 생, 저장성 사람으로 학력은 샤오싱 사범 전문 대학(绍兴师范专科学校) 중문과 출신이다. 전문대학은 2년제 대학으로서 천민얼의 학력은 평균 이하라고 하겠다. 후에 당교 등에서 대학원 등의 자격을 획득하기는 했으나 학문적 성과로 보기는 어렵다. 1982년 입당하여 제17차 중앙 후보 위원, 제18, 19차 중앙위원, 제19차 중앙정치국 위원이 되었다. 구이저우 성 성장, 성위서기, 성 인대 상위 주임 등을 거쳤고 현재 총칭 시 당서기이다.


그의 젊은 시절 경력은 모두 선전 업무이다. 샤오싱 시에서 출발하여 후에는 닝보로 근무지를 옮긴다. 당 선전부의 일을 주로 했으며 후에 저장성의 한 신문사를 맡게 된다. 이때 시진핑 주석이 저장성 서기로 부임해 오면서 시진핑 당시 성위서기를 도와 여러 가지 문헌 공작을 한 것이 두 사람 인연의 시작이다. 문헌 공작이라는 것은 보통 우리나라에서는 선전선동, 언론매체 활동 등을 말하는데 중국 공산당에게 있어서는 그 범위가 더 넓다. 단순한 언론 플레이가 아니라 위로는 사상 논쟁에 관여되고 아래로는 구체적인 언론을 통한 정치 투쟁과 연결이 된다. 그래서 중국 공산당의 경우는 건국 초기부터 선전 부문을 인민해방군과 같은 무력과 동일하게 중요한 국가 통치의 도구로 삼고 있다. 지금 현재의 언론 통제나 인터넷 통제 등도 이러한 사고의 연장선 상에 있는 것이다.

시진핑 국가 주석

저장성 당시 시진핑 서기의 이름으로 언론 매체에 270여 편의 글이 발표되었는데 이중 대부분은 천민얼이 대필한 것이라고 한다. 천민얼은 당시 저장성 공산당의 선전부 주장을 맡았다. 이때 천민얼이 대필한 글들에 대한 세간의 반응은 상당히 좋았으며 시진핑 본인도 만족해했다고 한다. 이 천민얼은 내세울 만한 학력이나 세력이 없었지만 눈치가 빠르고 아부를 잘하며 여러 가지 꾀를 내는데 능숙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대부분의 윗 사랍들에게 귀여움을 받았으며 시진핑 주석도 마찬가지였다는 것이다. 천민얼은 당시 저장의 신문에 "즈강신어(之江新语)"라는 칼럼을 시진핑 주석을 대신하여 만들어 운영하였고 그 외에도 많은 선전 영역의 건의를 시진핑에게 하여 시진핑 주석이 매우 만족해했다고 전해진다. 후에 시진핑 주석이 베이징에서 회의를 하게 되었을 때 참석자 중 하나가 절강 신어의 글을 들어 칭찬하자 본인은 글솜씨가 없다며 다른 이가 대필한 것이라고 했다고 한 일화는 천민얼의 대필설을 더 신빙성 있게 하는 일이다. 


실제로 시가군(习家军)으로 불리는 현재의 시진핑 그룹의 주력은 절강 사람들이다. 시진핑 주석이 저장성 당서기를 할 때 많은 인력들이 그의 휘하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을 '저장성의 새 군대(저장 신군, 浙江新军)' 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천민얼은 이 저장 신군의 대표 주자인 셈이다. 천민얼은 시진핑 그룹의 이인자 리잔수가 구이저우 성 당서기 자리에서 중앙으로 들어갈 때 이 자리를 이어받는다. 먼저 구이저우 성의 성장이 된 후 당 서기로 승진한다. 그러고 나서 총칭 시의 당서기로 부임한 것이다. 총칭은 원래 시진핑의 숙적 보시라이가 관장하던 곳이다. 후에 순정차이가 이어받은 후 숙청당했고 그 자리를 이 천민얼이 차지한 것이다. 크게 보면 시진핑 그룹이 반대파의 영토를 하나 점령한 꼴이 된다.

총칭을 관장하다 비운에 간 보시라이(薄熙来)와 순정차이(孙政才)


 중국 내부 정치에 있어 총칭은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이다. 서부 대개발의 중심지인 반면 좌경인 서북 세력과 자본화된 서남 세력, 그리고 내지의 중도 세력이 상호 충돌하는 곳이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중앙의 입김이 잘 안 닫는 곳이기도 하다. 한때 보시라이, 왕양, 순정차이, 그리고 왕치산까지 쟁쟁한 인물들이 거친 곳이다. 그리고 중앙의 정책과 어울려 이러한 막강한 권력자들이 총칭을 경영함으로써 총칭의 경제 발전도 기세를 올렸으나 보시라이, 순정차이 등의 실각과 함께 경제 성장 또한 곡절을 겪고 있어 쉽지 않은 것이기도 하다.


그러면 왜 시진핑 주석의 후계자 문제가 거론되고 있는가? 천포쿵은 여기에 두 가지 원인이 있다고 말한다. 하나는 이번 베이다이허(北戴河) 회의에서 시진핑 그룹과 기타 파벌 및 당 원로들은 사실 상 결렬하였다고 한다. 필자는 상해방의 주력 인사들은 아예 참가하지 않은 것으로 추정하며 단파(团派)와 시진핑 그룹은 의견 불일치한 것으로 추정한다. 천포쿵은 이 베이다이허 회의에서 시진핑 주석이 임기제로 사실 상 복귀를 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후계 구도 이야기가 떠올랐다는 것이다. 10월 1일 국경절 전날 인민일보가 시진핑 주석 본인의 5년 전 글인 '임기제의 장점을 인정한다'라는 글을 다시 게재한 것이 이를 시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종신제를 포기함으로써 파벌 간 갈등을 어느 정도 봉합하여 공산당 내부 단결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다른 한 원인으로 시진핑 주석은 다른 파벌에서 주석직을 승계하는 것은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필히 자신의 파벌에서 계승자가 나와야 한다고 임기제 수용 조건을 주장했다는 것이다. 이 것이 바로 천민얼이 부상한 배경이라고 한다. 결국 시진핑 그룹과 기타 파벌 간에는 이 선에서 타협하여 상호 1승 1패가 된 형국이라 하겠다. 시진핑 주석이 사실 상 임기제를 수용하고 계승자를 지정할 것을 수용한 반면 그 승계자는 다시 시진핑 그룹에서 지정하는 결과가 되었으니 말이다.


사실 중국 공산당의 전통에 따르면 후계자 지명은 일찍부터 이루어진다. 보시라이는 장쩌민 전 주석이 지지한 인물이었던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리고 후진타오가 민 승계자는 후춘화, 원자바오 전 총리가 지지한 인물운 순정차이였다. 그런데 순정차이는 정변이 의심되는 등 군부와의 관계가 문제 되어 부패 혐의로 베이다이허 회의에서 시진핑 그룹에 의해 숙청되었다. 후춘화는 다음 지도자로 매우 유력하게 부각되었으나 역시 시진핑 그룹의 공격에 의해 중앙 위원회에서 떨어져 나가는 말로를 맞이하였다. 그 후 다시 회복은 되었으나 사실 상 후계자 경쟁 구도에서는 이미 탈락한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https://www.boxun.com/news/gb/china/2019/04/201904171727.shtml

시진핑 주석이 금년 초 프랑스를 방문했을 당시 걸음걸이 등이 불안정하여 건강 이상설이 퍼지기도 하였는데 귀국 후에 류허 부총리 등을 대동하고 총칭을 방문하였다. 그리고 4월 16일 돌연 고위 지도부들을 소환하여 회의를 열었는데 이때 회의석 상에 앉은 서열을 천포쿵은 지적한다. 우선 시진핑 주석의 옆에는 중앙 급 서열 3위인 후춘화가 앉았어야 했다. 그런데 우측에 4위인 류허(刘鹤) 부총리가 앉았고 후춘화(胡春华)를 맨 가장자리에 앉혔다. 좌측에는 중앙 반공청 주임 딩셔샹(丁薛祥)이 자리했고 그다음에는 천취엔궈(陈全国) 신장위구르 당서기가 앉았다. 이 천지엔궈 서기의 좌석 배치는 상당히 예외적인 것이었다. 중앙 급보다 지방급은 서열이 낮은데 천지엔궈 서기를 후춘화보다 앞에 앉힌 것이다. 예외적인 사항으로 하나 더 천민얼이 류허 부총리 다음에 앉은 것이다. 그리고는 발개위 주임 허리펑(何立峰)이 딩셔샹 옆에 앉았다.

후춘화-천민얼-류허-시진핑-딩셔샹-천지엔궈-허리펑

라는 배치가 된다. 그리고 맞은편에는 통례대로 지방급인 윈난 성 서기 천하오(陈豪), 광시자치구 서기 루신셔(鹿心社), 길림성 서기 바인차오루(巴音朝鲁, 몽고족) 등이 배치되었다.

천취엔궈(陈全国)

이러한 배치는 시진핑이 관례를 무시하고 자신의 의도대로 좌석을 안배한 것인데 천취엔궈의 경우 이 사람을 부각하려는 시진핑 주석의 의도는 명확했다고 본다. 천취엔궈는 중국 공산당 입장에서 불온한 신강위구르 지역을 상당히 효과적으로 관리하고 있어 이를 치하하는 성격이 있으며 또한 20차에서 상무위원으로 임명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다고 한다. 천취엔궈는 1955년생으로서 상무위원이 된다면 시진핑 주석 입장에서는 리커창 총리나 왕양 등과 동년배로서 이들과의 균형을 이루는 우군으로서의 역할을 기대할 수 있다. 그래서 시진핑 주석이 천취엔궈를 다음 승계자로 지목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들이 흘러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천취엔궈는 신강 위구르 족을 탄압한 대표적 인물로 미국 정부에 의해 제재 대상 1호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천취엔궈를 다음 주석으로 민다면 미국과 정면 대결하겠다는 의지로 해석될 것이기 때문에 쉽지 않은 여건이 되었다고 천포쿵은 분석한다.

후춘화(胡春华)

후춘화에 대한 시진핑 주석의 처사는 비교적 명확하다. 골치 아프지만 생색나지 않으며 권력과 관계없는 임무를 위주로 맡기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아프리카 돼지 열병 같은 문제들이다. 기본적으로 시진핑 주석이 후춘화를 다음 승계자로 고려할 리는 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관측들이다.

후하이펑(胡海峰)

후하이펑은 최근 2년 고속 승진을 거듭해서 주목을 받았고 시진핑 주석이 다음 후계자로 삼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관측들이 그래서 나오기도 했다. 그리고 천포쿵에 의하면 원래 시진핑은 후계자로 후진타오 전 주석 아들 후하이펑(胡海峰)를 삼기로 후진타오 전 주석과 합의를 보았던 것이라고 한다. 허나 이것은 시진핑 주석이 20년 집권한다는 전제 하에서 이루어진 일로 후와 시 두 사람 사이가 홍콩 문제 등으로 악화되고 종신제가 무산된 현재의 상황에서는 이 합의는 무의미한 것이 된다고 한다. 사실 후진타오는 보시라이에게 갈 주석직을 시진핑에게 가게 한 사람이며 그 후 국가 주석직은 물론 군위 주석까지 일괄 깨끗하게 시진핑에게 넘겨준 사람으로 시진핑 주석으로서는 매우 고마워해야 할 사람임에 틀림없다. 


결론적으로 천민얼이 과연 시진핑 주석의 승계자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천민얼의 당내 권력 기반이나 군부와 같은 무력 세력의 기반이 국가 주석이 될 정도로 충분한가에 대한 의문도 있다. 기타 파벌은 물론 시진핑 그룹 내부조차 꼭 받아들인다는 법이 없어 보인다. 아직은 여러 모로 모자란 기량으로 보이는 것이다. 천포쿵은 본인 역시 천민얼이 확고히 승계자가 될 지에 대해서는 유보적인 입장이다. 그간 공산당의 과거를 보면 진짜 후계자를 숨기고 먼저 가짜 후계자를 내세우는 경우도 있었고 천민얼이 그룹 내부, 그리고 외부의 동의를 얻어나갈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확실치는 않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또 다른 큰 가능성이 천민얼을 국가주석으로 내세우고 사실 상 시진핑 주석이 후렴 청정하는 방식이다. 과거 등샤오핑이나 장쩌민이 그러했듯이 말이다. 그런 방향이라면 승계자가 너무 실력이 있어도 안 되는 일이어서 천민얼과 같은 인물이 가장 적합한 인선일 수 있다. 천포콩은 이쪽에 무게를 주는 것으로 보인다. 어쩄건 중국 공산당으로부터 후계자 구도와 관계된 소리가 나오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로서 후계자 구도에 대한 여러 그룹 간의 셈법과 경쟁이 본격화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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