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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철 Feb 28. 2020

삼협댐 그리고 장강 치수 이야기

예전부터 중국은 겨울철에 황하의 상류에 두껍게 얼은 얼음을 공군을 동원하여 폭격을 한다. 이는 봄이 되면 황하 상류에서 얼음이 녹아내리며 홍수로 변하는 일을 막기 위해서이다. 황하는 70~80년을 주기로 범람하며 중국 전체 식량 생산의 약 40%를 담당하는 황하 유역의 농사를 망치게 되면 민란이 발생하여 결국 황제가 바뀌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한다. 따라서 우임금의 고사를 들지 않더라도 중국 정부는 오래전부터 황하 치수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고 할 것이다.

https://namu.wiki/w/%ED%99%A9%ED%95%98

반면 양자강, 즉 장강의 범람은 그렇게 자주 일어나지 않는다. 구비구비 깊은 협곡을 따라 진행되던 물줄기는 여기저기 주변의 강물과 합하며 중국의 대륙 남부를 서에서 동으로 가로질러 황해에 도달하면 누런 황토물을 쏟아붓는다. 황해가 '황해'인 것은 바로 이 때문이 아닌가? 매우 감동적인 장면이다.


그러나 이 장강도 때때로 범람을 한다. 그 주기는 대략 200년에서 250년 주기로 일어난다고 하는데 이는 중국의 왕조가 망하고 새로운 왕조가 흥하는 주기와 대체로 일치한다고 한다. 식량 생산의 60%를 넘게 차지하는 장강 유역의 농사가 망하면 천하 창생은 먹을 것이 없어지는 것이다.


장강은 황하와는 달리 강폭이 좁고 주로 협곡 사이를 흐른다. 굴원이 원숭이가 깍깍 우는 소리가 들린다고 묘사했던 바로 그런 높은 산과 그 산들 사이를 굽이치며 급하게 흐르는 강물인 것이다. 

이창과 총칭 근처를 지나면 드디어 넓이가 커지며 강물이 위용을 갖춘다. 총칭과 쓰촨 성은 예전에 유비가 제갈공명의 전략을 따라 실력을 키우기 위해 천신만고 고생을 하며 들어간 지역이다. 쓰촨 성 전체가 동그랗고 커다란 분지의 모습이고 그 남쪽은 이 장강으로 막혀있다. 이 쓰촨 성으로 진입할 수 있는 길은 산시 성에서 산을 넘고 넘어 좁은 산길을 통해 들어오는 방법과 장강을 역류하며 강 양옆에서 인부들이 배를 끌게 하여 물길을 통해 들어가는 방법 외에는 없다.

그리고 후베이 성 우한에 다다르면 이제 강폭은 충분히 넓고 물결은 잔잔하며 평화로운 모습을 갖춘다. 우한은 이로 인해서 예로부터 수운의 중심이 되었고 상해로 빠지는 바닷길과 내륙으로 들어가는 강길의 중간에서 북으로는 중원, 남으로는 강남으로 통하는 천하 물류의 중심이었다.


이러한 지형은 비가 많이 와서 물이 불어도 빠르게 굽이치는 물결을 양안의 산들의 험준한 지형이 막아주기 때문에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총칭을 지나 우한 쪽으로 오면서 탁 트인 지형으로 빠져나오면 넓은 강폭이 불어난 물을 통과시켜주었던 것이다. 그래서 장강이 홍수가 나는 일은 거의 없다. 


문제는 한번 홍수가 나면 이에 대한 준비가 없기 때문에 크 피해가 막심하다는 것이다. 중국 인구의 60%를 먹여 살리는 곡창지대가 침수되어 농사를 망치면 배가 고픈 정도가 아니라 천하에 먹을 것이 없어 생존 그 자체가 문제 된다. 가축을 잡아먹고 도적이 휭행하며 서로 아이를 교환하여 잡아먹는 비참한 상황이 전개되는 것이다.


물론 근현대에 이르러서는 이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하지만 한번 발생할 뻔한 적이 있다고 한다. 바로 덩샤오핑 시대의 이야기이다.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 일이지만 장강의 상류 지역에 폭우가 한 달을 넘게 온 것이다. 히말라야 산 아래에 있는 티베트도 홍수가 난다. 그리고 티베트의 물길은 윈난성 북부의 아름다운 도시 리장을 지나 각종 풍부한 지하자원으로 유명한 판지화 근처를 통과하여  쓰촨 성으로, 총칭을 통과해서 내려간다. 

장강 상부에 내리는 장마는 너무 오는데 싶더니 한 달을 넘기자 문제가 심각해졌다. 장강 물마루의 고도가 상승하면서 만일 이대로 두면 중하류의 지류들과 합류하면서 대홍수가 일어날 것이 점점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당시 중국 정부는 여러 가지 분석을 하였는데 대홍수가 발생할 경우 리장, 판지화, 루저우, 총칭, 이창, 우한 등을 휩쓸고 상해를 덮칠 것이라는 결과가 나왔다고 한다. 수 억 명의 사상자가 나오고 곡창은 수몰되며 공장과 도시들이 무너질 것이라고 했다.

여기에 대한 설루션으로 여러 가지 논의되었으나 어느 것 하나 충분히 피해를 막을 길이 없었고 마지막으로 인민해방군이 제시한 방안이 남았다고 한다. 바로 장강 상류의 댐들을 공군이 폭격하여 댐을 폭파하여 불어난 강물을 상류에서 넘치게 하는 방안이다. 그럴 경우 장강 연안의 대도시들을 구할 수 있다는 분석 결과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게 되면 수 천만의 이재민이 상류에서 발생하게 되고 사망자는 1천5백만 명에 이를 것이라는 문제가 있었다. (필자는 그 지역을 스촨 성이라고 생각한다) 1천5백만! 당신이 이 결정을 내려야 한다면 어떤 결정을 내리겠는가?



당시 덩샤오핑은 1주일을 더 기다려 비가 그치지 않으면 댐들을 폭파한다는 결정을 내렸다고 한다. 필자는 그런 의사결정을 내려야 하는 자리에 있게 된다면 제정신을 유지하지 못할 것 같다. 수 억 명의 생명과 재산을 구하기 위하여 천 5백만 명을 내 손으로 죽인단 말인가? 당신이라면 할 수 있을까?


다행히 비는 2, 3일 후에 그쳤다. 모두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물론 일부 지역은 홍수의 피해를 입었다. 수재민도 나왔다. 재산 피해도 발생했다. 하지만 아마도 지도부는 모두 별로 신경 쓰지 않았을 것 같다. 아무 일도 하지 않았지만 너무나도 피곤해서 그냥 집에 가서들 자지 않았을까?


이 일이 정확히 언제 발생한 일이지 필자는 모른다. 이 사건은 지인에게서 들은 일화이다. 시간도 말해 준 것 같은데 오래전 일이라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덩샤오핑이 최고 권력자이던 시절이니까 70년대 이리라. 사실 이런 장강의 치수 이슈는 그 중화민국 시절부터 있었다고 한다. 

삼협 댐으로 침수되어 역사적으로 유명한 강변 길이 없어졌다

현재 무너질지 모른다고 이슈가 되고 있는 삼협 댐은 바로 이러한 장강의 치수를 위해 추진된 국가사업이다. 참고로 필자가 만났던 중국의 원로 학자는 이런 삼협 댐이 적어도 세 개는 있어야 장강의 치수를 제대로 할 수 있다고 했다. 원래 이 삼협 댐의 발상은 중국 대륙과 타이완 양쪽에서 국부로 숭상받고 있는 쑨원 선생이 1919년 출간한 《건국 방략》(建国方略)에서 처음 언급되었다고 한다. 1932년 당시 장제스도 싼샤댐 건설을 검토하라는 지시를 내린 바가 있다고 하며 1944년에는 미국의 기술자 존 루시안 사바지가 장강 일대를 조사하고 싼샤댐 건설 계획안을 중국 국민정부에 제의하여 54명의 중국인 기술자들이 미국의 지원 아래 추진되었으나 국공 내전으로 인하여 중단되었다고 한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후에도 이 삼협 댐 건설 계획은 살아 있었지만 재원과 기술력 문제로 거저 우 댐 (葛洲坝)이 먼저 추진된다. 그리고는 마오쩌뚱의 대약진 운동, 문화 대혁명이 이어지면서 사실 상 이런 거대 인프라 사업을 추진할 여유가 없었다. 게다가 댐의 건설과 관련되어 비용·편익·손해에 관한 많은 논쟁이 있다. 건설 찬성파는 홍수 조절·전력 생산 등을 이유로 찬성하고 있으며, 건설 반대파는 수몰민의 발생·생태계 파괴·창 강 연안의 문화유산의 수몰·수질 오염 등을 이유로 반대하고 있다.


이 사업이 본격화된 것은 1980년대로, 1992년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리펑은 공식적으로 건설을 제안하였고 상당한 논란을 불러일으켰지만 결국 찬성 1767명 반대 177명 기권 644명으로 통과하였다.  착공식은 1994년 12월 14일에 열렸다. 주 구조물은 2006년에 완공되었으며, 2008년에 운전을 시작했다. 댐 완공은 2009년이었다. 이 삼협 댐(长江三峡大坝, The Three Gorges Dam)은 후베이 성 이창 시에 소재하며 1820만 KW의 발전량은 전 세계 수력발전소 중 발전량 제1위이기도 하다. 

사실 이 삼협 댐은 당시 중국으로서는 상당한 재정 부담을 안아야 하는 규모의 사업이었다. 그렇지만 우여곡절 끝에 시작을 하게 된 것인데 그 배경은 상당히 정치적인 것이었다. 우선 천안문 사건에서 리펑이 그 진압에 매우 주도적 역할을 한 것은 이미 알려져 있다. 당시 덩샤오핑의 후임은 리펑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 많았는데 정작 후임이 된 것은 이미 은퇴한 관료였던 장쩌민이 된 것이다. 이로 인해 리펑 진영과 장쩌민 진영은 일종의 긴장 상태 속에 있게 되었는데 그 절충을 이룬 수단이 이 삼협댐이라는 것이다.  즉 리펑 그룹이 국가 예산의 상당 부분을 소모하고 이권을 챙기기 좋은 토목 건설 프로젝트인 삼협 댐 프로젝트를 가져가는 것을 장쩌민 그룹이 양해하고 그 대신 장쩌민 그룹의 권력 승계에 리펑 그룹이 협조하는 방식이다.


이렇게 해서 리펑 그룹은 마음 놓고 삼협 댐 프로젝트를 추진하며 이권을 챙긴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이 삼협 댐 프로젝트의 책임자가 부패 혐의로 체포되어 일부 미디어에 그 내용이 보도되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한 신문에서 이 이야기를 읽고 매우 흥미 있었는데 그것은 기사 내용이 보도문이라기보다는 소설의 형식처럼 쓰여 있어서 마치 한 편의 단편 소설을 읽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내용에는 이 사람에게는 첩이 있었고 첩이 한몫 잡아야 된다고 했으며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기사가 이런 큰 일에서 한몫 잡지 않으면 언제 잡느냐고 충동질하여 세 사람이 한 통속이 되어 부패를 저지른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필자가 이 기사를 잊을 수 없었던 것은 뇌물 액수가 밝혀진 것만 당시 한국 돈으로 6조 7천억이 넘어서였다. 지금은 1 위안이 170원 정도 하지만 당시 환율은 50원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환율로 따지면 3배 이상이므로 20조가 넘는 돈을 뇌물 수수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게다가 지금으로부터 적어도 20년 전 상황이므로 엄청난 액수의 뇌물을 받았다는 것이 된다. 그리고 이 세 사람은 총살형을 당했다.


그렇게만 끝나면 많은 대형 뇌물 수수 사건 중의 하나 같지만 필자는 절대 이 이야기를 믿지 않는다. 당시 경제 규모로 볼 때 단순히 프로젝트 책임자가 그렇게나 많은 돈을 착복할 수가 없다. 그리고 업자들과의 결탁을 하고 많은 상층부의 압력이 있었을 텐데 고작 운전기사나 나이 어린 애인이 이권에 개입을 했단 말인가? 그리고 중국에서 대규모 뇌물 수수로 잡혀 온 사람은 그 액수가 클수록 신속히 재판이 이루어지고 처형이 된다. 그 이유는 무슨 말을 하기 전에 수습해야 되서이다.


세간에서는 모두 리펑을 지목한다. 그리고 삼협 댐 공사의 부실은 장강이 지난 1998년 대 홍수를 일으키면서 만 천하에 공개되었던 것이다. 중국에서는 엉터리 토목 또는 건설 공사를 두부 공사라고 부른다. 벽돌이 아니라 두부로 공사를 했다는 뜻이다. 1998년에 발생한 장강의 홍수는 정말 무시무시했다. 

장쩌민과 리펑

당시 언제나처럼 주룽지 총리가 가장 먼저 현장에 달려가서 보고를 받았다. 그리고 그동안 장강의 제방에 투입된 많은 예산이 턱없는 부실 공사에 쓰였다는 것을 발견하고 불같이 화를 냈다. 이들 무능한 관료들은 대홍수에 아무 대책도 대응도 하지 못했고  결국 인민해방군, 그리고 무장 경찰이 투입되었다.


젊고 나라를 위한 사명감에 불타는 이들 젊은이들은 직접 강물에 뛰어 들어가 군대를 지휘하는 군단장(이성 장군)들과 함께 혼연 일체가 되어 제방을 지키기 시작했다. 당시 상류에서 시작된 홍수는 장강의 특징이기도 하지만 가장 물이 많은 부분이 부풀어 올라 협곡 사이를 내려오기 시작했는데 협곡 사이로 엄청나게 높은 쓰나미가 몰려온다고 생각하면 된다. 이 부분을 물마루라고 부른다. 


중국이 워낙 크고 장강이 워낙 길다 보니 이 물마루가 하류까지 내려가는데 한 달 이상이 소요된다. 과연 물마루가 황해 바다로 도착하여 소진될 때까지 장강의 제방들이 버텨낼 수 있는가 이 문제가 관건이었다. 견뎌내지 못한 제방이 터져나가면 그 일대는 홍수로 수몰되는 일이 지속적으로 일어났다. 그리고 장강 방어의 분수령이 되었던 곳이 바로 '우한'이다. 그리고 이 투쟁은 '우한보위전(武汉保卫战)'이라고 불리게 된다.


그럼 왜 우한인가? 지도를 보자. 티베트와 위난 지역에서 물길은 높은 협곡 사이를 급하고 빠르게 흐르다가 스촨 대분지를 지나고 이창에 다다르면 물길이 제법 넓어진다. 고산지대와 열대 우림을 지나 탁 트인 공간으로 나오는 것이다. 여기서 악양루로 유명한 악양을 지나고 동정호를 곁에 두고 우한으로 진입한다. 우한에 진입 전에 강줄기가 심하게 U자형으로 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우한 시의 뒤에는 량즈후(梁子湖), 시량후(西凉湖), 리자하이(李家海) 등 커다란 호수들이 몇 개 포진해 있다.


이 U자 지형은 물길을 한번 막아 세우는 자연적 방벽 역할을 한다. 필자가 생각하건대 이 방벽이 잘 버텨주면 물길은 한번 동정호 쪽으로 흘러 들어가서 완충 효과를 겪은 후 부분적인 수량을 소화할 가능성이 있다. 만일 이 지형이 뚫리면 후선의 대형 호수들과 조우하며 우한을 휩쓸어 버리게 된다. 그리고 일단 우한이 범람하면 그 뒤에 있는 도시들, 난징, 양저우, 타이저우, 창저우, 우시, 쑤저우, 난통, 상하이 등이 절단 나게 된다.


그래서 해방군은 우한을 지키는 것을 최선책으로 생각하고 우한 상류의 U자 지형을 지키는데 전력을 다하게 된다. 이성 장군인 동완레이(董万瑞)는 자신도 물속에 들어가 비를 맞으며 병사들과 함께 제방을 지켰다. 한편으로는 모래주머니에 흙을 넣어 제방까지 운반을 하며 무너지는 제방을 병사들이 몸으로 막았다. 그 과정에서 제방이 무너지자 병사들은 몸을 겹겹이 쌓아 서로 팔짱을 끼고 밀어닥치는 급류에 자기 몸을 던졌다. 수백 명의 병사들이 이 제방을 몸으로 보호하며 죽어갔다. 필자는 이 장면을 다시 생각할 때마다 눈물이 흐르는 것을 어찌할 수 없다. 최근 우리나라에는 소위 혐중을 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적어도 이들 병사들의 숭고한 죽음 앞에서는 우리도 경의를 표해야 한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리고 경의와 애도를 표하는 바이다.

이 98년 대홍수를 겪고 나서 중국 정부에서는 아무도 삼협 댐의 타당성에 대해 다시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삼협 댐 건설 과정에서의 부패 이야기는 끊임없었고 삼협 댐이 잘 못되면 나라의 재앙이 될 수도 있다는 의견들이 점점 팽배해져 갔다. 그러나 장쩌민을 필두로 한 상해 방의 세력은 막강해져 갔고 리펑 그룹은 전력 산업도 손에 넣으면서 아무도 건드릴 수 없는 세력이 되고 있었다. 완공된 이후에도 이 부패 및 부실 논란은 계속되었고 인 2014년에는 삼협댐 운영을 위해 만들어진 삼협 총공사(三峡总公司) 동사장 차오광징(曹广晶)과 총경리인 천페이(陈飞)가 처벌받기도 하였다. 하지만 몸통은 따로 있다는 것이 중론이다.


완성된 삼협댐은 이제 중국의 현대화, 그리고 국력을 과시하는 하나의 상징이 되었다. 하지만 이렇게 삼협댐의 건설 과정에서 수많은 부실이 있었으리라는 것을 의심하는 중국 사람들은 아마 없을 것이다. 소문으로는 이 삼협 댐 프로젝트를 담당했던 고위직은 결국 프로젝트 완결 결재를 하지 않고 떠나갔다고 한다. 그 사람은 지금 정치국 상무위원 중 한 사람이라는 소문이다. 결국 뒷감당을 할 사람이 없는 프로젝트인 것이다.


관건은 부실 공사의 수준이 과연 요즘 사람들이 걱정하는 것처럼 삼협 댐의 붕괴로 이어질 것이냐 하는 것이다.  삼협 댐의 붕괴는 댐 하나의 사고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장강 중하류의 경제 건설을 파괴할 수 있으며 지금 같은 시국에서는 중국 체계의 몰락을 가져올 수도 있는 큰 사건이다. 


그럼 삼협 댐은 붕괴할 것인가? 필자는 모른다. 사실 아무도 모를 것이다. 안 무너진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과 무너질 것이라고 우려하는 사람들 이렇게 두 그룹이 있다는 것만이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필자보고 판단해 보라면 필자는 중국 정부가 삼협 댐의 하류에 다시 대규모의 댐을 건설하는가 여부와 관계있다고 생각한다. 만일 삼협 댐의 붕괴 가능성이 있다고 중국 정부가 인식한다면 장강의 상류와 하류에 다시 거저우 댐(葛洲坝)같은 복수의 댐 건설 프로젝트가 등장할 것이다. 원래부터 삼협 댐 말고도 최소 2 개의 동일 규모 댐이 있어야 한다는 계획이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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