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순간에서 악한 사람은 많지 않다. 다만 상황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알지 못하는 사람에 대해서 쉽게 말하는 경향이 있다. 나쁜 놈, 혹은 멍청한 놈들. 같은 이유로 나도 누군가의 눈에는 멍청하고, 또 나쁜 놈으로 보일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들이 많이 서 있는 곳에 머무르려 하는 것일까? 나를 비난하는 사람들이 이상한 놈들이라 생각하는 편이 정신건강에 이롭기 때문에.
'해야 할 일'은 구조조정에 관한 이야기이다. 다만 스포트라이트를 다수의 현장직원이 아닌 소수의 인사팀 인력에게 맞춘 영화이다. 시점의 전환은 우리가 인지하지 못했던 새로운 사실들을 알게 해 준다. 그들도 누군가의 명에 따를 수밖에 없는 노동자였으며, 우리만큼 치열하고 성실하게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는 사실. 다만 회사가 어렵고, 회장님이 기분이 나쁘면 곤란해질 그런 상황이 불합리를 강제했을 뿐이라고.
[기시감이 많이 드는 르포에 가까운 영화. 무조건적인 악당은 없다]
옳은 일만 하며 사는 게 가능한 일일까? 애초에 뭐가 옳고 그른지는 누가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린 일들은 얼마나 많은가. 결국 개별적인 상황에서 서로의 할 일들을 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게 현실 아닌가. 가족, 돈, 건강, 회사, 드물게 정의까지. 각자가 선택한 합리화의 기준이 스스로를 보호해 줄 것이라는 불안한 믿음 속에서.
'회사와 직원은 상호의 선택으로 이루어진 계약관계. 회사에서 돈을 받는 동안은 회사의 지시를 따라야 한다. 그것이 싫으면 계약을 파기하면 된다. 회사를 살려야 나머지 직원들이라도 살릴 수 있다. 배에서 내릴 사람을 결정해야 하는 책임이 두렵지만 어쩔 수 없다. 그게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원칙에 따라 대의를 위해. 나에겐 가족이 있고. 갚아야 할 빚이 많이 남았다. 이게 회사 생활이다. 나보다 고통스러운 차장님과 부장님도 있다. 부서원들을 배신하는 것도 못할 짓이다.'
약자의 고통, 세상의 불합리에 맞서는 것이 해야 할 일이라 믿었던 준희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했을법한 합리화의 문장들. 살얼음 같은 그 믿음조차 배신당하는 순간은 잔인하게 현실적이었다. 한 번은 본부장님들의 심기 때문에, 마지막은 회장님의 기분 때문에. 회사를 위한다는 대의가 무너지고, 결국 내 가족과 내 대출에 대한 책임만이 남았을 때 준희는 어떤 기분을 느꼈을까. 그렇게 어른이 되는 거라고, 그게 회사일이라고 말해주는 게 정답인 것 같지만 너무 나에게 하는 말 같아서 쉽지 않다. 그래도 세상에는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쯤은 있기를 바란다. 진심으로.
[그래도 살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돈을 벌어야 하지 않겠는가.]
*대리와 차장과 부장의 마음이 다 이해가 되는 짬이 되었다. 대리와 차장 때는 저렇게까지 나이스 하진 못했던 것 같은데 과연 저렇게 멋진 부장은 될 수 있을까.
*마지막까지 웃으며 농담하는 장 부장님이 멋졌다. 나는 또 과연 그렇게 담대하게 마무리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