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제명 Sep 30. 2024

월급을 받고 산다는 건

영화 '해야 할 일'

모든 순간에서 악한 사람은 많지 않다. 다만 상황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알지 못하는 사람에 대해서 쉽게 말하는 경향이 있다. 나쁜 놈, 혹은 멍청한 놈들. 같은 이유로 나도 누군가의 눈에는 멍청하고, 또 나쁜 놈으로 보일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들이 많이 서 있는 곳에 머무르려 하는 것일까? 나를 비난하는 사람들이 이상한 놈들이라 생각하는 편이 정신건강에 이롭기 때문에.


'해야 '은 구조조정에 관한 이야기이다. 다만 스포트라이트를 다수의 현장직원이 아닌 소수의 인사팀 인력에게 맞춘 영화이다. 시점의 전환은 우리가 인지하지 못했던 새로운 사실들을 알게 해 준다. 그들도 누군가의 명에 따를 수밖에 없는 노동자였으며, 우리만큼 치열하고 성실하게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는 사실. 다만 회사가 어렵고, 회장님이 기분이 나쁘면 곤란해질 그런 상황이 불합리를 강제했을 뿐이라고.

[기시감이 많이 드는 르포에 가까운 영화. 무조건적인 악당은 없다]

옳은 일만 하며 사는 게 가능한 일일까? 애초에 뭐가 옳고 그른지는 누가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린 일들은 얼마나 많은가. 결국 개별적인 상황에서 서로의 할 일들을 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게 현실 아닌가. 가족, 돈, 건강, 회사, 드물게 정의까지. 각자가 선택한 합리화의 기준이 스스로를 보호해 줄 것이라는 불안한 믿음 속에서.


'회사와 직원은 상호의 선택으로 이루어진 계약관계. 회사에서 돈을 받는 동안은 회사의 지시를 따라야 한다. 그것이 싫으면 계약을 파기하면 된다. 회사를 살려야 나머지 직원들이라도 살릴 수 있다. 배에서 내릴 사람을 결정해야 하는 책임이 두렵지만 어쩔 수 없다. 그게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원칙에 따라 대의를 위해. 나에겐 가족이 있고. 갚아야 할 빚이 많이 남았다. 이게 회사 생활이다. 나보다 고통스러운 차장님과 부장님도 있다. 부서원들을 배신하는 것도 못할 짓이다.'


약자의 고통, 세상의 불합리에 맞서는 것이 해야 할 일이라 믿었던 준희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했을법한 합리화의 문장들. 살얼음 같은 그 믿음조차 배신당하는 순간은 잔인하게 현실적이었다. 한 번은 본부장님들의 심기 때문에, 마지막은  회장님의 기분 때문에. 회사를 위한다는 대의가 무너지고, 결국 내 가족과 내 대출에 대한 책임만이 남았을 때 준희는 어떤 기분을 느꼈을까. 그렇게 어른이 되는 거라고, 그게 회사일이라고 말해주는 게 정답인 것 같지만 너무 나에게 하는 말 같아서 쉽지 않다. 그래도 세상에는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쯤은 있기를 바란다. 진심으로.

[그래도 살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돈을 벌어야 하지 않겠는가.]





*대리와 차장과 부장의 마음이 다 이해가 되는 짬이 되었다. 대리와 차장 때는 저렇게까지 나이스 하진 못했던 것 같은데 과연 저렇게 멋진 부장은 될 수 있을까.


*마지막까지 웃으며 농담하는 장 부장님이 멋졌다. 나는 또 과연 그렇게 담대하게 마무리할 수 있을까.


*르포 같던 영화가 두 부장님에 대해 생각해 보니 판타지 같이 느껴진다.

작가의 이전글 보름달이 뜨면 모입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