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스 한 장 짜리 국가 R&D 과제 보고
대략 15년 전쯤, 이차전지 분야 진짜 1세대 인사이시고 지방 모 정출연의 이차전지 그룹을 맨땅에서 만들어 이끄시던 분을 만나 저녁 식사 중에 해주신 이야기가 있었다. ‘초일류급' 국립대에 위탁 R&D 과제를 준 후 결과 보고서를 받을 때가 되었는데 감감무소식이라 조심스럽게 과제 책임자이신 모 원로 교수님께 전화를 올리셨다고 한다.
모 그룹장: “저…….. 교수님, 죄송스럽지만 혹시 결과 보고서는 언제쯤 받아볼 수 있을까요?”
모 교수님:”보냈는데, 못 받으셨어요?”
모 그룹장: “네, 중간에 분실이라도 되었는지 아직 못 받았습니다…….”
모 교수님:”어, 도착했을 텐데, 팩스 안 들어갔어요?”
모 그룹장:”네?? 한 번 찾아보겠습니다"
이 분이 연구원들에게 물어물어 혹시 모 교수님께서 보낸 게 뭐가 있냐 하고 찾은 건 바로 ‘팩스 한 장'이었다. 그것도 자필로 휘갈겨 쓴 팩스 한 장 말이다.
기천만원 짜리 국가 R&D 위탁 과제 결과로 수십 페이지 짜리 결과 보고서를 써서 내던 시절이라 낯선 형태인데 더해 연구결과를 평가원에 보고해 결과 평가를 받아야 할 상황이라 어쩔 수 없이 자신들이 한 걸로 위탁 개발 내용을 따로 만들어 연차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였다.
이런 일이 있은 직후, 필자에게 3천만 원의 위탁과제를 받은 일본 모 대학교를 방문해서 연구결과를 협의하고 그 옆의 일본인 교수님 랩을 방문하였다. 랩 투어를 하던 중에 일본인 교수님이 안 그래도 궁금한 게 하나 있으시다며 필자에게 질문을 하나 하셨다.
모 일본인 교수님:”한국의 모 전지 제조사로부터 과제를 하나 받아하고 있다. 매년 5천만 원 정도씩 받아 감사히 연구하고 있다. 그런데, 연구결과를 보내달라는 이야기가 몇 년째 없다.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일본 기업들은 연구비를 주면 시시때때로 찾아와 협의하고 질문하고 보고서를 요구한다."
뜬금없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건 요즘 ‘기초연구 지원 확대 청원' 관련 후속조치가 계획되고 있다고 해서이다. 기초연구 지원 채택 의견서 내용을 살펴보면 자유공모 형식의 기초연구지원사업을 확대하고 과제 규모별 투자비중이 균형을 기하도록 노력한다 되어 있다. 그리고 연구에 있어 ‘자율적 연구 촉진'과 더불어 연구개발사업 관련 정보의 ‘투명한 공개'를 천명하려 하고 있다.
연구자들의 문서 작업을 줄여주고 연구에 집중하도록 해주기 위해 결과 보고가 간소화되면, 정말 ‘팩스 한 장' 짜리 국가 R&D 과제 보고가 새 시대의 연구 패러다임이 될지도 모른다.
자율적인 연구이든 자유스러운 연구이든 자율엔 책임이 따라야 한다. 앞서 이야기한 한국과 일본 교수님의 연구비에 관한 책임 의식 차이는 시사점이 크다. 필자도 국가 R&D 과제를 수행하며 위탁 과제를 드린 교수님 중에 꼬박꼬박 과제 성과로 해외 학술 논문이나 보고서를 성의껏 써준 분들도 있었지만, 자율적인 연구를 한다며 궤변을 하며 성과 보고를 거부한 분들도 만난 적 있다.
전자들은 공동연구를 한 덕에 그분들 논문에 공동 저자로 최소한의 기여를 인정받았지만 후자들은 위탁 과제 아이디어, 공동 연구, 연구비를 제공한 후, 받지 못한 연구 결과로 인해 필자가 한 연구 내용으로 위탁 내용을 따로 구성했던 황망한 상황이 필자에게도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위탁 연구용으로 제공한 아이디어와 공동연구 결과로 자기 것인 양 몰래 다른 기업 과제 결과 보고를 하는 꼴도 보았다. 후자 케이스들은 어김없이 ‘가짜 석학' 행세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이 ‘가짜 석학’들의 논리는 위탁 과제가 어딨냐? 너랑 나랑 각기 과제받은 것인데 왜 내가 너에게 결과를 보고하냐고 얼굴을 붉혔다. 그런데 말이다. 이 ‘가짜 석학’들은 결국 받은 연구비에 관한 피드백을 국가엔 하지 않았다.
언제나 그랬지만, 받은 연구비에 책임감이 강했던 분들이 성실한 연구 결과를 냈었다. 연구하는 데 있어 ‘과도한’ 자율을 요구하며 행정 업무 과중을 토로하고 ‘기부금' 형태로 국가가 연구자들에게 연구비를 주어야 한다고 한 이들 중 제대로 된 연구를 하는 이를 본 적이 없었던 듯하다. 투고 논문과 특허를 쓰는 과정만 정리해도 결과 보고서를 쓰는 것 식은 죽 먹기인 게 상식이다. 실험 일지를 정리하는 게 일상인 사람들에겐 결과 보고서 정도는 소셜미디어 포스트 하나 쓰는 정도란 말이다.
그래서, 국가 R&D 과정과 결과 간소화를 요구하기에 앞서 연구 과정과 결과 공개는 수반되어야 한다. 제대로 된 스몰 사이즈 연구가 제대로 정착하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가령, 국비로 지원된 스몰 사이즈 연구 결과는 일종의 비 징수 과제이기 때문에 그 연구 과정과 결과가 ‘상시로 공개'될 필요가 있다. 과제 관련 평가도 실명 평가위원 평가 내용을 공개할 수 있으면 더욱 좋다.
연구자들을 믿지 못해 공개하게 한다기보다 국민 세금으로 지원된 연구 결과는 자율에 의거하여 수행되었다 할지라도 결과와 활용에 관해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런 차원에서 ‘상시 공개’를 추진할 필요가 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첨단 연구를 수행하는 상황이라 기밀이 유지되어야 한다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그런데, 논문과 특허로 제출하는 내용을 보다 디테일하게 묘사하고 우수 저널에 논문과 함께 제공하는 추가 자료(Supporting Information) 수준은 얼마든지 공개할 수 있다.
완료된 과제의 최초 과제 계획서가 연구 도중에 어떻게 다른 길을 찾아가나도 후학이나 동료 연구자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연구 과정, 결과와 함께 연구자들의 연구 과제 수행, 연구비 수득 규모 등도 공개함으로 우리나라 연구 기반이 더욱 강화될 거란 기대가 외려 합리적이다. 혹여라도 연구내용에 문제가 있을 때는 공개된 후 동료 연구자들의 조언과 지적으로 살찌울 수 있다.
수년 내 양산할 수 있는 대단한 기술이라면 국가에 연구비를 바라지 말고 기업에 당당하게 연구비를 요구하는 게 상식이다. 국비로 연구하여 기업에 기술 이전하는 것보다, 대단한 기술을 보유했다면 처음부터 기업 자금으로 하고 기밀을 유지하는 게 맞다. 기초연구로 국민 세금으로 조성된 연구비를 수득하였다면 연구 전 과정과 결과를 상시 공개하는 패러다임 쉬프트를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 할 때가 왔다.
국가 R&D엔 공짜 점심이 없다는 걸 이제는 알아야 하고 대단한 능력을 가진 ‘석학’이라면 자처하고 기밀을 유지해야 할 정도는 대단한 기술이라면 국민 세금은 그만 탐하고 기업 연구비로 자생하는 모습을 보여주길 기대한다. 국비로 하는 기초연구는 연구과정과 결과를 상시 공개할 의지가 있고 함께 저변을 넓혀갈 분들에게 양보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