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 과잉의 시대: Publish, or Perish
요즘은 한 마디로 논문 과잉의 시대라 이야기할 수 있다. 논문의 중요성을 이야기할 때 흔히들 인용하는 말로 ‘Publish, or Perish’를 들 수 있다. 논문으로 출간 혹은 게재(Publish)하지 않으면 결국 학자로서 어려운 상황에 빠지며 멸할 수 밖에 없다(Perish)를 강조한 리드미컬한 표현이다.
내가 학교를 다니던 90년대엔 학술(투고)논문 게재가 지금보다 많지 않던 시절이었다. 석사학위를 하며 투고논문이 없는 졸업자도 흔히 볼 수 있었고, 국내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서울대학교 자연대와 공대에서도 국외 학술지 투고를 두려워하는 교수들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었다. 국외 학술지 투고의 어려움을 보여주는 일화로 랩 사이에서 회자되던 일화가 하나 있었는데, 미국 유수대(M으로 시작하는......)에 유학했던 콜럼비아 유학생이 학위 중에는 미국전기화학회지(J. Electrochem. Soc.)에 수월하게 논문을 게재하며 훌륭한 학술 실적을 올리다가 모국의 일류대 교수로 부임하여 본인이 액티브 멤버(Active Member)인 저널에조차 논문 게재를 제법 오랫동안 못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였다.
투고논문이란 건 서너 명의 분야 동료 연구자들의 검토와 리뷰를 거쳐 거절 혹은 수정 절차를 거쳐 활자화되어 나오는데, 과거엔 논문 투고 후 검토와 리뷰에 몇개월에서 1년 정도까지 답이 오지 않기도 해서 게재까지 걸리는 기간이 상당히 긴 편이었다.
이윽고 출판기술이나 인터넷 보급이 급격히 이뤄지던 시기를 거치며 오비이락이랄지 투고 논문량이 급증하기 시작했다. 고전적인 강자였던 Nature, Science 등은 여전히 강세를 보였고, 이들은 몰려드는 투고 논문을 소화하기 위해 자매지를 앞다투어 창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학술지 전문 출판사 전성시대가 다가왔다. 이들의 번성과 달리, 고전적인 강자였던 전문학회 학술지의 상대적 퇴보도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말이다. 출간 논문량이 폭증하기 시작한 것은 어느 한 나라가 아닌, 세계적인 추세였다 할 수 있다. 출간된 논문량이 폭증했으나 수준의 하향 평준화가 일어나며, 사실상 ‘논문 과잉의 시대’에 접어들었다 할 수 있다. 필자가 그렇게 보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먼저, 논문량은 증가했고 그에 따라 IF 높은 저널도 덩달아 증가하기 시작했다. 필자가 석사 때 낸 모 저널은 당시엔 IF 1.xx로 보기에도 힘들었지만, 지금은 거의 IF 10 조금 아래에 육박하고 있다. 그렇다면 논문 수준도 같이 올라가야 할텐데, 그 저널의 투고논문을 보면 필자가 냈던 때보다 저급한 수준으로 가득차 있다. 어찌 보면 그 시절에는 논문으로 내기에도 부끄러웠던 수준이 당당하게 논문으로 게재되어 있다(필자가 20년 전에 시쳇말로 개고생하여 1년 걸려 합성했던 전해질 논문 내용이 필자도 모르게 IF 10이 넘는 저널에 뉴 테크놀로지인양 포장되어 실려 있을 정도였다).
연구비 폭증에 힘입어, 과거엔 논문으로 내기도 부끄러웠던 수준들이 활자화되어 돌아다니기 시작한 것이 논문 과잉의 시대를 연 게 아닌가도 싶다. 이런 변화가 과학기술/공학의 발전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면 모르겠지만, 연구비가 늘어난다 해서 투자 대비 극적인 연구 결과가 나오지는 않는다는 게 작금의 현실이다.
이에 맞춰 논문 게재에도 학계내 정치가 개입되어 서로 리뷰어로 품앗이를 해주며 수준 미달의 논문이 나가는 것도 부지기수이며, 드디어 이 분야도 ‘논문 브로커’가 음지에서 벗어나 양지로 올라와 석학행세를 시작했다. 그리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악효과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10여 년 전에 필자에게 자신이 논문 브로커임을 뻔뻔스럽게 밝힌 이가 모 대선후보 캠프에 합류하여 한 파트를 이끌고 있을 정도이니 말이다(10여 년 전에 있었던 황우석 박사 사태도 어찌 보면 이런 자들에게 황우석 박사께서 속은 사건이라 봐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에 더해, 논문량이 절대적으로 증가하며 IF 10 이상 저널에 ‘데이터 마사징’이 된 논문들도 급증하기 시작했다. 어찌 보면 이런 논문들은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성향을 가지는데, 당시까지 물성이 나오지 않던 소재 물성이 마사징을 통해 과장되어 뛰어난 성능인양 포장되어 나온다. 이는 ‘특허 선점’ 목적과 같이 한다. 이런 ‘마사징’ 논문이 한두 편 출현하면 갑자기 유사 성향 논문이 또 나오는 것도 흔치 않게 볼 수 있다.
연구자들의 창의적 연구 활동이 많아지며 논문이 급증하는 것은 환영할 일이지만, 과거엔 논문 수준도 안 되었던 습작 연구가 논문으로 활자화되고, 오랜 연구를 통해 돌파구와 결과가 얻어져 나온 논문이 아니라 기획된 연구 계획 결과가 주목할만한 연구 결과로 이어졌다는 ‘소설’이 데이터 마사징에 힘입어 세계적인 연구결과라고 게재되는 게 더 많은 게 안타깝다.
새 정부가 곧 들어선 후에 과학기술 정책이 전면적으로 개편될 것이 예고되어 있다. 이때 불요한 논문들과 조작된 논문들이 여전히 득세하는 일이 잦아들길 기대한다. ‘실력 없고 실적 좋은 가짜 석학’이 아닌, ‘실력 좋은 진짜 석학’들이 학계 주류로 재편되도록 하는데 있어 차기 정부 역할은 지대하니 정신차리고 정책을 세워주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