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hulW Dec 07. 2018

 Pb

한국의 저속 전기차 사업, GM EV1 실패에서 배웠어야 했다.

2005년 7월, 차세대 전지 성장동력 사업단을 도맡아 운영하던 차에 국외 동향 조사 목적으로 샌디에이고에서 열렸던 작은 초고용량 커패시터 콘퍼런스에 참석했던 적이 있었다. 도중에 잠시 짬을 내 할리우드 쪽으로 ‘룰루랄라’하며 뭔가를 찾으러 갔었다. 아침 녘에 출장지 부근을 돌아다니는 게 습관이었던지라 골목 여기저기를 헤집고 다니던 중에 찾던 ‘반가운’ 표지판이 드디어 눈앞에 나타났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닌 ‘ELECTRIC VEHICLE CHARGING STATION’이라 적힌 파란색 표지판이었다.

할리우드 부근의 ‘ELECTRIC VEHICLE CHARGING STATION’ (전기차 충전소) 표지판 / 2005년 7월경 박철완


캘리포니아 주 어딘가의 배터리 전기차 전용 주차면과 충전기 / 인터넷 커뮤니티

영화 소품 (할리우드 부근이라 했으니, 백 투 더 퓨처?),   

그런데 이 기상천외한 답들 사이에도 공통점이 있었다


'배터리 전기차? 그게 뭔데? 아직은 공상의 산물이고 실재하지 않잖아?’


그런데 말이다. 1996년에서 2003년까지 미국의 캘리포니아 주에서는 배터리 전기차 세상을 이미 경험한 역사가 있다. 위의 녹색 표지판이 어느 배터리 전기차의 실존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유물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때의 배터리 전기차는 바로 GM의 EV1이었다(상업적인 최초 배터리 전기차다운 차명이었다).


GM EV1의 1996년 출시 당시 카달로그 / GM 제공

유가가 갤런당 1달러대였던 시절임에도 GM EV1은 성공적으로 보급된 편이었다. 1110대 정도 생산되어 리스 프로그램으로 보급되었고 2003년 말까지 유지되었다. 7, 8년 정도 지속했던 이 리스 프로그램이 중단된 직후, 《Who Killed the Electric Car?》라는 재기 발랄한 다큐멘터리 형식 영화가 제작됐다.


이 영화는 미국 정부, 주 정부, 그리고 오일 산업, 내연기관 자동차 산업 등등을 차례로 탐방하여 GM EV1을 ‘암살'한 배후를 추적하는 음모론적인 시각을 견지했었다. 이 영화는 본 사람들을 불의에 희생된 배터리 전기차 편에 선 정의의 사도가 되게 하였고 웹 커뮤니티에 간간이 올라온 배터리 전기차 포스트에 ‘배터리 전기차는 오일 산업과 내연기관 자동차 업체가 연합하여 죽인 거잖아요!’란 요지의 댓글 근거로 많이 사용되었다.


Who Killed the Electric Car?의 출시 10주년 기념 사진, 후속편으로 Revenge of the Electric Car도 제작되었다. / 공식 홈페이지


7, 8년씩이나 지속했던 배터리 전기차 최초의 리스 프로그램이 과연 왜 중단되었던 것일까? 정말 《Who Killed the Electric Car?》의 제목에서 상징하듯 의도적인 ‘암살자’가 있었던 것일까?


물론 산업 간의 이해관계는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상황이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배터리 전기차를 죽였다고 보는 건 무리가 있다. 왜냐하면, 당시의 GM EV1은 근원적인 기술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한계는 바로 이차전지였었다.


배터리 기술의 한계 때문에 GM EV1은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좀 더 세밀하게 들여다보면 다음과 같다. GM EV1의 1세대는 연축전지를, 2세대는 Ni-MH 이차전지를 채용했었다. 한데 하필이면 이 두 전지가 둘 다 문제였다. 연축전지는 충전심도(State of Charge, SOC)가 낮은 상태(배터리가 완전 충전된 상태가 아니라 소모된 상태 )로 한참 내버려두면 셀 스택 자체가 회복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지는 기술적 문제가 있었다. 그래서 주행 후 바로 충전기에 꽂지 못하는 일이 잦아지면 실험실 측정 평가값보다 수명이 현저히 떨어지게 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2세대 GM EV1에는 최신의 고성능 이차전지인 Ni-MH 이차전지로 교체했지만 여기서 외려 또 다른 문제가 두드러졌다. 속칭 메모리 효과 때문인데, 연축전지와 반대로 잔량이 충분한 상태로 충전기에 연결하는 일이 잦아지면 예상외로 빨리 셀이 망가지게 된다. 그 결과, 한계에 봉착하며 GM은 결국 EV1 리스 프로그램을 중단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차전지 역사에 선지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문득 다음과 같은 반론을 바로 펼칠지도 모른다.

“여보쇼! Ni-MH 이차전지와 리튬이온 이차전지가 한 해 차이를 두고 상업화가 됐는데 리튬이온 이차전지도 바로 시도했으면 되는 거 아니었나? 그러니 쓸 수 있는 카드를 다 쓰지 않은 셈이니 오일과 자동차 산업 등에서 배터리 전기차를 암살한 게 맞지 않을까!”


그랬으면 얼마나 좋았으련만, 리튬이온 이차전지를 EV1에 채용할 수 없는 이유가 당시로는 너무나도 명확했다. 아직 모바일 IT용 소형 리튬이온 이차전지인 원통형과 각형도 기술적으로 문제가 종종 있어 안전사고가 빈번하던 때문이었다. 게다가 막무가내로 ‘차세대'를 추종하는 이들은 효율성이 우수한 중대형 리튬이온 이차전지를 개발하는 대신 개발이 사실상 불가능한 중대형 리튬(금속)폴리머 이차전지 개발에 몰두했다. 당연히 그 결과들은 영 신통치 않았다(이론적인 한계에 더해 화재와 폭발 단신이 알음알음으로 들리던 시기였고 개발 시도는 100% 실패로 끝났다). 부언하자면, 테슬라 방식으로 소형 리튬이온 이차전지를 배터리 전기차에 채용하자는 아이디어도 아직 개화되지 않은 데다 기술적으로 전지 안전성에 신뢰가 떨어진 게 2000년대 초반의 상황이었던 게다. 아직 리튬이온폴리머 이차전지도 보기 드물었으니 배터리 전기차에 쓸 수 있는 리튬계 이차전지는 찾아보기 어려운 시절이었다.


이렇게 최초의 상업적 배터리 전기차였던 GM EV1은 배터리 기술의 한계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다. 그럼 굴지의 자동차 제작사인 GM이 이런 실패를 왜 미리 방지하지 못하였던 것일까? GM EV1 개발과 리스 프로그램이 계획되던 199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이차전지 패러다임 자체가 지금과 많이 달랐던 게 변명의 이유가 될 수 있을 듯하다. 사실, 연축전지와 Ni-MH 이차전지가 배터리 전기차에 적합하지 않을 거란 예상은 그 당시엔 전문가들 사이에도 거의 제기되지 않았었다. 리튬(금속)폴리머 이차전지를 팔던 벤처와 꾼들은 예외다. 이 시절의 배터리 전기차의 이차전지 패러다임은 '배터리 전기차는 중대형 단셀로 팩을 구성해야 하며 이차전지 종류는 크게 상관없다’였었다. 그래서 가장 먼저 채용된 게 중대형화가 쉬운 연축전지였다.


모바일 IT 쪽도 셀폰이나 랩톱 컴퓨터는 대중화가 아직 요원했고 휴대용 CD 플레이어, 카세트 플레이어, 라디오가 주종을 이루던 때가 1990년대 초중반이다 보니 에너지양이 가득한 전지를 넣어 사용할 수 없을 때까지 '한 번 쓰고 버린다’, 즉, ‘일차전지 패러다임’이 세상을 지배하던 시절이었다. 우연의 일치였는지 Ni-MH 이차전지는 ‘일차전지 패러다임’ 사용 패턴과 궁합이 아주 잘 맞는 이차전지였었다. 다 쓰고 버리는 것은 일차전지였고, 다 쓰고 재충전하는 것이 이차전지를 뜻할 만큼 ‘다 쓴 후’가 그 시절 재충전의 전제였다. 잔량이 아직 충분한 이차전지를 구태여 충전한다는 건 시간과 전기 낭비로 취급되던 때였다.


그런데 배터리 전기차는 이런 ‘일차전지 패러다임’에 충격파를 주며 ‘굴러다니는 거대한 최신 전자 제품’으로 등장하며  ‘술잔에 첨잔 하듯 잔량이 얼마이든 재충전하는’ 뉴 패러다임이 도래했다.


만일 연축전지와 Ni-MH 이차전지의 전지 특성이 배터리 전기차 사용 패턴과 우연히라도 맞았다면 미국은 이미 1996년에 배터리 전기차 상업화에 성공했다고 기록됐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GM은 배터리 전기차를 암살하려 했다는 오해도 받지 않고 배터리 전기차의 아버지로 당당히 기록됐을 것이다.


GM은 연축전지와 Ni-MH 이차전지 시스템으로는 상업적인 배터리 전기차 출시는 불가능함을 7, 8년 동안 운용한 EV1 리스 프로그램의 실패로부터 배웠다. 그리고 다년간의 절치부심 끝에 주행거리 확장형 플러그인 하이브리드인 쉐보레 볼트(Chevrolet Volt)를 한국산 중대형 리튬이온폴리머 이차전지를 채용하여 2010년 12월에 출시했고 몇 종의 시험적인 배터리 전기차를 거쳐 1회 충전 주행 가능 거리 300 km 이상인 배터리 전기차 볼트(Chevrolet Bolt)도 한국산 리튬이온폴리머 이차전지를 넣어 2016년 10월에 곧 출시한다. 이들의 공통점은 리튬이온 테크놀로지에 기반한 리튬이온폴리머 이차전지를 채용했다는 점이다.


2017년형 Chevrolet Bolt 투영모식도 / GM 제공

이처럼 모바일 IT 개화기 때부터 빛나는 역할을 하다가 타 기술 진화 속도를 못 따라가니 ‘왜 너만?’이란 천덕꾸러기 취급도 종종 받는 리튬이온 이차전지이긴 했지만, 배터리 전기차도 리튬이온 이차전지가 더 발전하지 않았다면 GM EV1의 실패 후 오랜 암흑기에 접어들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리튬이온 이차전지는 ‘충전하고 싶을 때 잔량에 무관하게 언제든 해도 성능과 수명이 유지되는 고성능 이차전지’로 최신 모바일 IT와 배터리 전기차 사용 패턴에 유일하게 부합된다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나라는 리튬이온 이차전지 산업만 놓고 봤을 때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선진국이라 배터리 전기차 산업에서 앞서 나갈만한 기반은 충분했다.


그런데 말이다. 이런 좋은 환경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GM EV1 실패 원인조차 제대로 분석하지 못하여 똑같은 길을 답습하다 못해 더 최악의 상황에 봉착한 게 우리나라 국책 사업으로 진행되는 참사가 과거에 일어났었다. 이전 정부 때 시행한 저속 배터리 전기차 보급 사업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자동차 메커니즘과 최고속 문제로 자동차 전용 도로 주행과 고가도로를 등판할 수 없음은 익히 알려진 문제였으니 이는 차치하고서라도 연축전지를 장착한 저속 배터리 전기차 보급 결정은 GM EV1의 실패 전철을 생각 없이 그대로 답습한 참사 수준의 사건이었다(옵션으로 리튬이온 이차전지를 장착한 고급형 모델이 있었지만 애당초 연축전지 장착 모델을 시판하지 않았어야 했다).


저속 배터리 전기차의 이미지 사진 / 온라인 커뮤니티


 외려 GM EV1은 저속 배터리 전기차와 비교 불허의 훌륭한 상용 배터리 전기차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차전지의 한계로 실패했는데, 저속 배터리 전기차 보급은 열심히 했으나 2% 부족하여 아쉽게 실패한 게 아니라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잘못 꿴 첫 단추' 같은 정책이었다. 저속 배터리 전기차 보급 사업은 당시 환경부, 지경부, 국토부의 완벽한 엇박자와 담당자들의 무능에 기인한 대참사였다 평할 수 있는데, 이 사업 실패 이후 후속 배터리 전기차 보급 및 관련 정부 사업이 계속 엇나가며 우려를 자아내고 있다.


나중에라도 실패의 원인이 정책 입안에 참여한 전문가 집단인지 결정한 담당 공무원인지 기회가 닿는다면 철저하게 복기해 볼 필요가 있는 정부 사업이라 본다. 현재 진행형인 각 지역의 배터리 전기차 및 전기 버스 보급, 최근에 발표된 배터리 전기차 관련 에너지 신사업, 그리고 여러 배터리 전기차 기술개발 사업도 도미노식으로 후유증이 큰 상황이라 제대로 짚으며 가지 않으면 필연적인 실패로 이어져 세금 낭비로 귀결될 우려가 크다. 배터리 전기차와 관련 에너지 신사업, 원점부터 다시 차근차근 검토하여 세금 낭비 요소를 제거할 필요가 있다.

07.12, 2016
매거진의 이전글 Si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